* 1,000여 년 전, 캄보디아에 장엄한 문명이 있었다
지적 열망으로 시간을 거슬러 오르고, 먼길 마다않는 열정이 있어 우리는 세계사의 수많은 문명과 친숙해져 있다. 비록 서구 편향적이었고, 명소 나들이의 가벼움이었다 해도 한국의 지적 풍토는 세계의 문명에 열린 마음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지적 호기심의 그물망 너머에서 교감을 기다리는 문명 또한 있기 마련이고 그 대표적 미지의 땅이 앙코르 문명이다. 더욱이 앙코르 문명은 킬링필드라는 현대사의 비극이 두룬 커튼과 사회주의 국가의 문명이라는 이념 장막에 가려 우리에게 한결 낯선 것이었다. 필자는 이 낯선, 그러나 주목받아 마땅한 앙코르 문명과 신선한 문명적 교감을 시도한다. 캄보디아의 옛 제국 캄푸자왕국이 이룩한 앙코르 문명. 한반도에 고려가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있던 무렵에 동남아시아에는 캄푸자왕국이 있었고, 그들은 웅장하다고 밖에 달리 표현할 수 없는 장대한 도시국가를 밀림 속에 건설하며 독특한 민족문화를 영위하고 있었다.
<신화가 만든 문명, 앙코르 와트>는 우리들의 세계문명 편력에서 정글 속에 작은 연못처럼 숨은 미지의 영토를 다룬 책이다. 우리들이 지닌 친숙한 문명의 도감에 낯선 앙코르 문명을 즐겨찾기에 추가한 작업이랄까? 이 책은 앙코르 문명의 기념비적 종교 건축물인 앙코르 와트 사원을 분석하며 앙코르 문명 전반에 대한 안내와 주요 상징들을 힌두신화의 세계관과 상상력에 기반하여 충실히 해독하고 있다.
* 앙코르 와트는 관광을 넘어 이해되어야 한다
앙코르 문명은 몇몇 사진첩과 여행 후기에 기대여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방대한 650여년에 걸쳐 이룩된 문명체계이다. 이 책은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동남아시아를 호령하던 크메르인의 민족문화의 젖줄이었던 힌두사상과 힌두신화가 창조한 독특한 문화 양식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시도한다. "앙코르 왕도로 여행을 가기 전에 또는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동남아시아의 대제국이었던 앙코르 왕조의 역사와 종교, 문화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위해, "힌두사상과 그 상징체제, 건축양식을 체계적으로" 접근한 이 책은 국내 최초의 앙코르 문명 종합 안내서라 할 수 있다.
앙코르 사원들에 대한 잘 간추려진 여행 길잡이를 기대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짐짓 무거운 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앙코르 문명에 대한 체계적인 소개를 목적한 이 책의 구성과 내용은 '약간의 지루함이 동반하는 인문학의 즐거움과 뿌듯함'을 독자들에게 선사한다. 앙코르 유적의 복원과 역사 해석에 그토록 열성적이었던 프랑스 학자들의 열정과 비교할 때, 그 전문성과 방대함에 압도당하는 수많은 영어판, 불어판의 앙코르 문명 관련서적과 비교할 때, 비록 늦은 감이 있고 내용상의 미흡함도 있지만 이제 우리도 제대로 된 앙코르 문명 역사문화 안내서 하나를 갖게 된 셈이다. 우리 독자들의 인문학적 몰입과 지적 열망이 프랑스인들의 그것과 비견하여 못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책은 앙코르 문명에 대한 수많은 고고학자, 역사학자의 필생의 연구 업적과 특히 조르쥬 세데스, 폴 펠리오 등 프랑스 연구자들에게 크게 기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에서 앙코르 문명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창의적 역사해석과 역사기술의 독특함보다는 우선적으로 풍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실정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앙코르 유적 발견 이래 100여 년에 걸쳐 축적된 앙코르 문명 연구서들을 천착하며, 그 성과들을 일관된 체계로 구성하여 소개하는 필자의 노력은 매우 값진 성취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하나의 문명과 비로소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 힌두신화를 알면 앙코르 문명이 보인다
- 크메르인들은 왜, 1,200개의 사원들을 그토록 거대한 규모로 열광적으로 지었는가?
- 왜, 사원 건축에 쓰인 돌이란 돌엔 남김없이 조각의 칼을 들이 댔는가?
- 무엇을 말하고 싶어 교교한 신들과 춤추는 무희들을 부조의 파노라마로 아로새겼는가?
- 불가사의한 종교건축의 기술과 미적 양식, 그 구조에 숨은 비밀은 또 무어란 말인가?
- 도대체, 낯설고 생소한 수많은 힌두 신들과 크메르인들의 미적 상상력은 어떤 관계인가?
앙코르 문명 유적을 마주하며 느끼는 우리들의 궁금증이 대개 이러하다면 이 책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분명한 답을 제시한다. 필자는 웅장하고, 세세하며, 종교건축의 위대한 인류유산인 앙코르 사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힌두신화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앙코르 문명은 힌두사상의 동남아에서의 토착화 과정의 산물이며, 힌두신화의 지상에의 재현이며, 신의 코드에 따른 종교건축과 돌의 예술(Rock Art)의 극치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은 현재의 신화 관련 서적의 붐과 연결되기도 한다. 그러나 좀더 솔직하고, 좀더 정확히 말하면 문화적?Α痔? 시원으로서의 신화의 세계가 후대의 문명 창조의 영역에서 어떻게 원용되고, 당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상상력의 세례를 주었고, 그것이 또 어떻게 구체적으로 양식화되었느냐에 관심을 두는 책이다. 특히 앙코르 시대의 사원건축이라는 국가적 과업 속에 신화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이었는가를 설명하는 신화와 문명의 긴밀한 관계를 밝힌 책이라 할 수 있다.
필자가 책의 제4부 '앙코르 와트 상징해독'에 서 시도하는 세밀한 상징 분석은 건축의 단위, 배치, 구성, 부조의 장엄한 파노라마를 이해하는데 분명한 안목을 제시한다. 더 나아가 종교건축, 미적 양식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에 신화의 매혹적인 숨결을 더해 문명 읽기의 새로운 체험을 선보여 주고 있다.
* 힌두 대서사시를 읽는 뿌듯한 재미
<신화가 만든 문명, 앙코르 와트>에는 책 속의 또 하나의 책으로 힌두신화의 영원한 두 고전 <라마야나>와 <마하바라타>를 간추린 초록이 실려 있다. 힌두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긴 힌두 서사문학의 영원한 고전인 이 두 편의 대서사시는 힌두문화의 전통을 가진 인도와 동남아 지역의 문화유산을 이해하기 위해서 필독해야 하는 텍스트이다. 그러나 인류 최장의 대서사시로 칭송되는 <마하바라타>의 경우, 이 서사시의 온전한 번역본은 무려 1,000여 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분량으로 일반 독자들에게 그리 녹녹한 텍스트는 아니다.
필자는 앙코르 문명의 온전한 이해와 앙코르 와트의 회랑에 부조된 작품들을 만끽하며 감상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을 북돋우기 위해 두 편의 서사시를 단편 소설처럼 읽을 수 있도록 잘 간추려 번역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필자의 노력으로 앙코르 문명의 문화적 원류인 힌두신화의 풍부한 맛과 독특한 스토리가 한결 손쉽게 다가오고 있다. 신화적 상상력으로 지상에 1,200여개의 사원을 건축한 크메르인들의 역사의식과 미적 감수성의 원천이 되었던 이 두 편의 힌두 대서사시에 대한 일독은 서구 신화, 그것도 영웅담에 경도된 우리들의 신화열풍에 자못 진지한 자극을 던져 줄 것이다.
* 13세기 앙코르 견문록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책 속의 또 하나는 책, 그 두 번째 선물은 필자가 앙코르 지역을 탐사할 때 베트남에 10년째 거주하며 앙코르 유적 가이드로 일하고 있던 분이 꼭 읽어보고 싶어 했다던 책, <진랍풍토기(眞臘風土記)>를 번역하여 제3부에 소개하고 있다.
<진랍풍토기>는 앙코르 문명의 유적지 복원과 역사 연대기의 재구성 과정에서 앙코르 유적지의 각종 비문과 함께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던 원나라 사절단 주달관의 견문록으로 앙코르 문명 관련 최고의 사료적 가치를 지닌 문헌이다. 이 견문록은 그 분량에서나, 내용에서나 복잡한 사전지식을 요구하지 않아 시엠렙 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편안히 읽을 수 있을 만큼 흥미롭고 부담이 없다. 필자의 지극한 인문학적 탐구열로 전문 번역된 이 견문록은 동남아 역사연구의 자료적 가치 또한 매우 높아 학계 관련자들의 손길도 기대되는 문헌이다.
1296년에 씌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진랍풍토기>는 현대인의 감각으로 읽어도 매우 간결하고 정갈한 견문록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진랍풍토기>를 통해 우리는 역사적 유산으로 만나는 과거 문명의 추체험을 넘어 당대의 현장 속으로 생동감 있는 시간여행을 경험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