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의 천재 철학자 솔로비요프
그가 펼쳐 보이는 ‘악'의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설명
19세기 러시아 철학자 블라디미르 솔로비요프의 『악에 관한 세 편의 대화』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의 84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솔로비요프는 우리에게는 처음 소개되지만, 실증주의·힌두교·중세철학·종교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뛰어난 학문적 업적으로 러시아와 서유럽 문화지성사에는 이미 널리 알려진 철학자이자 시인, 정치·사회 비평가이다.
악은 실제적인 형이상학적 힘의 존재인가,
아니면 인류의 이성적 선의의 결핍과 부재로 인한 현상인가.
이번에 출간된 『악에 관한 세 편의 대화』는 솔로비요프가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해에 출판한 저술로, 솔로비요프의 철학적 사유의 과정과 예술적인 참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솔로비요프는 이 책을 통해 인류의 삶과 역사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그 실제를 드러내는 ‘악’의 존재에 대해 형이상학적인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법을 훈련한 독자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솔로비요프는 이 형이상학적인 문제를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여러 정치?사회적 사건과 에피소드를 통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 전개함으로써 일반 독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작성하였다. 이는 서구 철학의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성격과는 달리, 실제적인 삶과 문화, 나아가 정치와도 직접 연결되는 실천적 경향을 띠는 러시아 철학의 특징과 연결된다.
또한 독자들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플라톤의 대화의 방식을 취해 작품을 구성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백전노장의 장군, 상당한 정치적 지위를 갖고 활동하고 있는 정치가, 출판업자이자 도덕주의자인 젊은 공작, 비중 있는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소개되는 Z 씨, 또 사회 각 분야에 두루 관심을 갖고 있는 중년 여성 등 다섯 사람이 프랑스 칸 근교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갖추고 있어 쉽게 읽을 수 있다. 이들은 ‘전쟁’ ‘진보’ ‘세계 역사의 종말’에 관한 주제를 그들의 경험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 사건과 당시 러시아 사회의 시사적인 사건들과 더불어 논하지만, 궁극적으로 이들이 이끄는 세 편의 대화의 핵심은 ‘악’의 존재에 대한 상이한 관점에서의 역사적?형이상학적 설명이다.
유럽 문명과 동양 문명의 충돌과 종말론적 요소
작품이 발표된 지 이미 1백 년도 넘게 지났지만, 21세기를 살고 있는 한국 독자들의 흥미를 끌 만한 몇 가지 요소를 갖추고 있다. 첫째, 작품 속의 소설인 「적그리스도에 관한 짧은 소설」에 포함되어 있는 20세기 세계사에 대한 종말론적 예언, 특히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범몽골주의'의 유럽의 지배, 그것을 벗어난 유럽의 통합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예언적 요소이다. 솔로비요프는 생애의 마지막에 ‘유럽과 중국, 두 문화 세계’이 충돌하여 그 결과로 발생할 유럽 문명의 파멸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말년의 그는 유럽과 러시아의 문명이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간주했다. 그래서 일본과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자세히 연구했고, 극동에서의 러시아 정책을 주의 깊게 주시하기도 했다.
솔로비요프가 읽고 해석한 새로운 러시아 요한계시록
둘째, 세계 문학사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들 정도로 생생한 적그리스도 형상화를 들 수 있다. 세번째 대화편에 포함되어 작품의 대단원을 이루는 「적그리스도에 관한 짧은 소설」은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에 대한 새로운 예술적 해석으로, 적그리스도의 출생과 성장, 그의 정치적?사회적 활동 과정, 종교 통합과 적그리스도의 변화 과정 등이 성서에 토대하면서도 성서의 과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리고 예술적으로 그리고 있다. 즉, 이 작품은 심리적?예술적?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요한계시록, 그 가운데서도 특히 ‘적그리스도’에 관한 부분의 보충이자 새로운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적그리스도’가 워낙 흥미로운 주제라 이 작품은 기독교 신앙인뿐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큰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악’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인류의 출현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궁금증의 하나일 것이다. 독자들은 이 작품을 통해 다시 한 번 이 궁금증을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러시아 철학자의 사유를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옮긴이 박종소 교수가 석?박사 학위 논문을 비롯해 오랫동안 솔로비요프를 깊이 연구해온 학자인 만큼 정확한 번역과 자세하고 친절한 주석이 돋보인다.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적그리스도에 관한 짧은 소설」을 포함한 전쟁, 진보, 전 세계 역사의 종말에 관한 세 편의 대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