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두 생애의 융화를 꿈꾸었다”
폭력과 절망 속에서 건져 올린 아름다운 희생과 공감의 메시지
인간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를 수행하는 작가 정찬의 새 소설집
폭력의 문제를 통해 인간의 자유와 행복을 추구하는 인문학의 본질적 주제들에 접근해온 작가 정찬의 새 소설집 『두 생애』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폭력의 의미와 본질, 폭력의 탄생 과정,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폭력의 피해자가 된 사람의 내면세계를 집요하게 해부하고 있는 이번 소설집은 다소 무거울 수 있는 인문학적 주제를 특유의 진지한 문체로 서술하고 있어 작금의 가벼운 즐거움의 추구하는 소설들과 확연히 구분되며, 정찬만의 작품 세계를 일관되고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다.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홍정선은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일종의 의미 있는 형벌을 견디는 자세가 은연중에 요구된다”고 밝히면서 “그의 소설은 즉각적인 즐거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페이지를 차근차근 넘기는 독자들에게 점차 강한 흡입력을 발휘하기 시작하며 끝까지 읽은 사람에게는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는 여운을 선사한다”고 역설한다. “그의 소설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독자들에게 인간에 대한 이해와 성찰이 더욱 깊어지고 높아졌다는 뿌듯함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그가 “정찬의 소설을 인문학으로서의 문학에 충실한 소설, 소설이 인문학에서 차지해야 할 본연의 자리에 걸맞게 인간에 대한 탐구를 본격적으로 수행하는 소설이라” 다시 한 번 힘주어 말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총 7편의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은 폭력에 노출된 인간, 혹은 고통의 기억을 안고 있는 인간이다. 그러나 정찬의 소설은 그들의 절망만을 보여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을 통해 정찬이 진정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작품마다 보석처럼 숨어 반짝이며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그가 폭력과 고통에 빠진 자들의 절망에서 길어 올리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소설집 마지막에 수록된 「폭력의 형식」은 폭력이 한 인간에게 또 다른 폭력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잘 보여준다. 부모를 잃고 의지할 곳 없는 남매에게 가해지는 무자비한 폭력은 내면에 새로운 폭력의 분신을 키우게 하고, 그 폭력은 다시 타자를 향하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해를 하도록 만든다. 작가는 여기서 그들에게 희망이 있었다면 그처럼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지만, 세상은 그 희망마저 기대할 수 없도록 할 만큼 그 남매에게 가혹하기만 하다.
그 희망이 꽃을 피웠을 때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희생」이다. 이 작품은 사회적인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된 1980년대 한국 사회의 젊은이들, 그중에서도 피해자일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의 삶을 편지 형식을 통해 들려준다. 어느 날 들이닥친 경찰들이 자행한 끔찍한 폭력에 시달리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겁탈을 당한 후 임신까지 하고 마는 그녀의 삶은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것이었으나, 그 안에서 희생으로 건져 올린 희망의 메시지는 가슴 먹먹한 아름다움을 전해준다.
표제작인 「두 생애」는 인간의 고통의 의미를 되짚는다. 교황의 생애와 기구한 운명 속에 스러져간 한 소년의 생애, 거기에 어린 시절 신으로부터 외면당한 고통을 간직한 화자의 삶 속에서 고통의 본질은 서로 맞닿아 있으며, 그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사랑을 낳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렇게 서로 정반대에 놓인 듯 보이는 두 생애가 사실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모습은 다른 작품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물 외엔 아무것도 삼킬 수 없는 바비 인형 같은 여자와 100킬로그램이 족히 넘는 거구의 여자가 등장하는 「바비 인형」은 분열된 자아의 모습을 그리고 있고, 여동생과 자신의 아이, 그리고 손주를 차례로 잃은 화자의 이야기 「강의 저쪽」은 죽은 자를 떠올리는 고통을 새 생명의 탄생을 상상하는 것을 통해 치유하는 모습을 담고 있으며, 햄릿 역을 하면서 정말 햄릿이 된 배우가 주인공인 「그는 누구인가」에서는 주인공과 연극 속 인물인 햄릿이 실제로 만나 대화를 나눈다. 이렇듯 서로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거리에 놓인 인물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교감을 하는 데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에겐 잊히지 않는 어린 시절 고통의 기억이 있고, 그것이 현재의 그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그로 인해 여전히 그들은 고통 속에 놓여 있지만, 그럼에도 ‘서로를 간절하게 꿈꾸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그토록 서로를 꿈꾸는 것일까? 그것은 타자를 향한 연민, 자신을 향한 연민, 나아가 세상을 향한 연민 때문일 것이다. 이 연민은 슬픔에서 기인한다. 작가는 「희생」에서 “희생자의 본질은 슬픔”이라고 말한다. “슬픔은 고통과 고통을 불러일으키는 원한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분노를 껴안으면서, 분노를 넘어서는 감정이”자 “분노가 또 다른 폭력으로 치닫지 않게 하는 고귀한 감정”이 정찬이 생각하는 슬픔이다. “세상은 폭력으로 가득 차 있지만 그럼에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슬픔에 감싸여 있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소설 속에서 말하고 있다.
정찬의 새 소설집 『두 생애』가 빛을 발하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그의 소설이 폭력과 고통의 절망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이유는 바로 ‘슬픔’의 정한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슬픔’이 폭력에 사로잡힌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
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과 신의 외면을 받은 인간, 폭력의 가해자와 피해자, 한 인간 안에 분열된 두 자아. 세계의 양면을 집요하게 들어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전혀 다른 두 삶이 만나 조화를 이루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기적을 독자에게 선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