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역사, 그 원초적 심연 속으로 빠져드는 꿈
소외로부터 회복을 꿈꾸는 관계 가족에 대한 본질적 탐색
한국 문학사의 탁월한 비판적 리얼리스트 현길언
현실의 중심부를 꿰뚫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한국문학사의 탁월한 비판적 리얼리스트라는 찬사를 받는 소설가 현길언. 그의 새 소설집 『나의 집을 떠나며』가 2009년 7월, 문학과지성사를 통해 발간되었다. 그동안 꾸준히 발표해온 「관계」 연작, 그중에서도 ‘가족의 내적 의미’에 대한 성찰과 허위를 고발한 4편의 단편과 1편의 중편 소설 들을 모았다. 주로 제주와 관련된 정치·사상적 현안과 종교적인 의미에서의 구원과 용서의 문제 등 거시적 문제를 객관적 시각으로 들여다보았던 그간의 작품들과는 달리, 좀더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미시적인 접근’이란 말로, 이번 소설집을 요약할 수 있다. 여전히 냉철하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그가 찾아내는 가족 간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생각보다 잔인하고 그러나 따뜻하다. 오랜 고민을 통해 출간된 이번 소설집 『나의 집을 떠나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그리고 곧 다시 떠날 소설가 현길언의 자기 고백이며, 동시에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가족’이란 관계에 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현길언)의 소설은 무엇보다 우리 현실의 중심부를 꿰뚫는다. 그 중심부란 작가가 부딪히고 있는 동시대의 현실 한가운데를 지칭한다. ─김주연 (「명분주의의 비극─현길언 론」, 『문학과사회』 2008년 겨울호)
평론가 김주연의 말처럼 현길언의 소설은 “동시대의 현실”에 대한 관심과 비판적 시각으로 씌어왔다. 고향인 제주도의 전래 설화, 4·3사건으로 시작한 그의 소설사는 군부 독재, 교육 현장의 문제, 신앙과 구원, 인간 도덕의 문제 등 다양한 스펙트럼 속, 거시적 담론을 제시해왔다. “한국문학사의 탁월한 비판적 리얼리스트”라는 찬사 어린 평을 받는 그의 소설들은, 민감하여 다루기 어려운 현실의 문제를 소설로 끌어와 냉철한 시각으로 미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스스로 몸담고 있는 현장, 현실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균형과 깊은 사유가 없이는 결코 성립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현길언과 그의 소설이 한국문학사 안에 ‘특별한’ 자리에 놓여 있는 까닭은 바로 이 예민하고 어려운 작업을 통해 자신의 소설 세계를 확장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집을 떠나며』는 지금껏 현길언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었던 주제 의식과도 또 일련의 행보와도 조금 떨어져 있다. 오랫동안 이어오고 있는 「관계」 연작의 일부에 속하는 작품들로 꾸려진 이번 소설집의 테마는 ‘가족’이다. 그런데, 일견 현길언이란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이 ‘소박한’ 키워드로 이번 소설집을 판단한다면 오판하기 쉽다. 현길언의 예민하면서도 거대한 필력은 개개인의 가족사 속을 거침없이 헤집으며 ‘또 다른 의미’의 거대 서사를 이룩한다.
작가가 이 소설집을 통해 보여주려고 한 것이 가족과 사회 내에서의 중층적 관계를 살아내는 것이라면 그것은 실존에 대한 긍정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선이 인간과 그 인간의 삶의 심층에 자리하고 있는 진실의 문제를 끊임없이 드러내려고 하는 것도 지나온 과거나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 삶에 대한 반성적인 거리를 확보하여 보다 나은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이다. ─이재복, 해설「관계의 숙명과 평화의 역사」에서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평론가 이재복의 말처럼, 가족은 실존의 시작점이며 모든 관계의 핵심이다. 현길언의 소설들이 모두 사회 속의 진실의 문제에 주목한다면, 가족은 그 담론의 시작점이다. 『나의 집을 떠나며』는 여기서 출발한다. ‘지금-여기’에 대한 냉철한, 반성적 시선은 언제나 ‘나의 집을 떠나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천착하고 있는 문제들의 모든 기원은 결국 ‘가족’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족’은 근래 부쩍 문학 담론으로 제기되고 있는 ‘가족’의 개념과 거리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 자신의 본류를 증명하고자 하는 그의 노력은 그가 평생을 통해 구축해온 자신의 소설 세계의 기원이다. 그의 소설과 함께 해온 독자라면 이번 소설집을 그의 소설들 중 제일 앞에 꽂아두게 될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그러므로, 원초적인 인물들이다. 극적인 결핍과 구체적인 욕망을 거슬러 올라간다. 오이디푸스적 욕망과 엘렉트라적 욕망의 충돌은 한 개인사의 문제가 아닌 인간적인 고뇌와 번민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매 소설의 결말은 둥글게 원을 그리던 선이 자신의 가슴을 향해 다가오는 모양을 띤다.
문득,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앉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날개 부러진 새처럼 외로움이 몰려왔다.
이제 나를 낳아주신 어머니는 이 땅 위에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언제 빗물이 되어 혹 그 바다에서 만난다면 서로 알아볼 수나 있을까.
모든 작품에서 ‘화자=관찰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이번 소설집은 냉철한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등장인물 간 인간적 이해와 동의(감정이입)를 얻어낸다. 개인사의 비참한 결과에 대한 작가의 동정은 아니다. 이는 모든 관계 즉, ‘나-너-우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욕망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 관계의 시작에 대한 이야기라면, 적어도 사회의 구성원인 누군가라면 결코 피해갈 수 없는 이야기이다. 소설 속 이야기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집이 독자의 마음에 환하고 뜨거운 불을 지핀다면 바로 이러한 지점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소설은 지극히 ‘현길언적’이다. 현길언은 가족을 다루면서도 결코 그 냉철한 시각을 거두지 않는다. 가족에 대해서마저도 ‘메스’를 거두지 않는 그의 냉철함에 놀라기에 앞서, 먼저 우리가 ‘가족’이라는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얼마나 쉽게 용인하고 포기했는가, 알 수 있다.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자신의 종교를 내세우는(「우리 빗물이 되어 바다에서 만난다면」), 암에 걸린 아버지의 고통을 괴로워하다가 아버지의 입과 코를 막아버리는(「나의 집을 떠나며」), 나의 행복 때문에 남편의 행복을 간과해버리는(「안과 밖」) 이야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이기를 위하여, 또는 가족이라는 명분 아래서 서로를 얼마나 무시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그뿐 아니라, 그 문제가 확대되어 이 사회로 직결되어 우리가 ‘서로’란 실존을 얼마나 ‘깡그리’ 짓밟고 무시해왔는가라는 질문으로 확대된다.
모든 도덕의 문제에 앞서는 ‘존재’와 개개인이 만들어낸 윤리 속에서 삶은 핍진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현길언은, 이 너덜너덜한 현실 속에 독자를 내버려두지 않는다. 보여주고, 들려주기만 할 뿐 적극적 개입을 하지 않는 그는 다른 방식으로 가족이란 ‘공동체’에 대한, 하여 ‘사회 공동체’로까지 연결되는 이 집단에게 개인의 서사가 사실은 얼마나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지, 하여 그 모두가 모였을 때 역사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에 대해 보여준다. 대미를 장식하는 「숲 이야기」는 개인의 서사가 얼마나 아름답고 웅장하게 확장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여기서 현길언은 나무의 역사-숲의 역사와 개인의 역사-가족의 역사(인간의 역사)를 환유적으로 연결한다. 가족의 가능성과 죽음과 삶의 기묘한 연결성, 그 누구도 그러므로 죽지 않을 미묘한 가능성에 대한, 어쩌면 종교적인 이 소설에서 우리는 커다란 가능성과 가슴 아린 슬픔을 맛볼 수 있다.
이러한 가족 서사는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은 지점에서 고집스러운 빛을 낸다. 인간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편견 없는 지성,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가슴을 치는 감성의 ‘삼위일체’는 너무나 소설적인 불가능성을 가능으로 꿈꾸게 만드는 힘을 지닌다. 이는 속임수나 눈속임이 아니다. 그게 거리를 두고 냉철하게 관찰한 현실만큼이나, 실제성을 가진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총 네 편의 단편 소설과 한 편의 중편 소설이 엮어내는 가족-관계에 대한 이야기는 이렇게 보편성을 확보한다. 현길언의 다른 소설들의 목적과 같은 지점, 현실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를 통한 끌어안기라는 불가능성을 가능하게 하는 어떤 지점을 찾아낸다. 한편으로 『나의 집을 떠나며』가 보여주는 기존과의 유다름은 이것이 모든 것의 시발점이라는 데 있다. 이 대작가는 다시 가족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그렇듯 가족은 종착지이면서, 새로운 출발을 준비하는 곳(지점)이다. 그리고 그의 귀환은 의미심장하다. 다시, 나의 집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또 그의 앞에 새로운 세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