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정신의 깊숙한 곳에 아름다운 무늬를 만드는 옛시 읽기의 즐거움!
중국, 고려, 조선시대의 옛시들을 17개의 주제어로 분류, 정리한 한시 에세이 「옛시에 매혹되다」가 도서출판 푸르메에서 출간되었다. 30년 가까이 옛시를 읽고 공부해온 강원대 김풍기 교수는 자신이 처음 옛시에 매혹당한 순간은 물론, 옛 지식인들이 시와 함께 울고 웃으며 살아온 사유의 기록들을 간결하면서도 감성적인 문체로 담아냈다. 「옛시 읽기의 즐거움」, 「삼라만상을 열치다」 등 인간미 넘치는 한시 에세이로 한시의 대중화를 이끌어 온 저자가 「옛시에 매혹되다」를 통하여 풀어낸 옛시 이야기는 전작만큼 따뜻하면서 선현들의 풍류의 향기는 한층 더 물씬 풍긴다. 젊은 날 방랑길에서부터 무심코 흰머리를 발견하는 현재까지 때로는 위로와 격려로, 때로는 시대를 바라보는 창으로, 때로는 성찰과 수행의 지침으로 저자 곁에 있어준 옛시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줄 것이다.
한시, 선현들의 일상을 투영하다
옛 지식인들에게 한시란 어떤 의미였을까? 계절이 오고 가는 때, 차를 끓이고 마실 때, 정인情人과 아픈 이별을 했을 때, 피고 지는 꽃을 볼 때, 질병이 몸에 찾아 왔을 때, 유배를 떠나거나 여행을 할 때, 늦은 밤 비가 내릴 때, 번우한 세상사를 피해 숨어 살 때에도 옛 지식인들은 시를 짓고 읽었다. 다산 정약용은 무더운 여름,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방법으로 「더위를 없애는 여덟 가지 일」이라는 시를 지은 바 있다.
?藪?諧度?炎구수의 우스개로 장마와 무더위 지내니
美人顔色隔重簾미인의 얼굴빛이 두터운 주렴으로 막혀 있다.
唯知競病全依律어려운 운자로 시 짓는 일 온전히 율격에 의지한 것 누가 알랴
忽訝戈波半露尖홀연 글자 획의 끝부분을 반쯤 드러내는 것 놀라워라.
思路望窮千里目생각의 길에서는 천 리의 눈을 다해 바라보고
疑山撚斷數莖髥의심의 산에서는 몇 가닥 수염 꼬아 끊는다.
不如自作詩千首내 스스로 천 수 시 짓느니만 못하니
難字還宜信手拈어려운 글자 손 가는 대로 집어내 본다.
-정약용,「더위를 없애는 여덟 가지 일(소서팔사消暑八事)」중 제7수, '다산시문집' 권6
송단호시(松壇弧矢, 송단에서 활쏘기), 괴음추천(槐陰?遷, 홰나무 그늘에서 그네뛰기), 허각투호(虛閣投壺, 텅 빈 누각에서 투호놀이), 청점혁기(淸?奕棋, 맑은 댓자리에서 바둑 두기), 서지상하(西池賞荷, 서쪽 못에서 연꽃 감상), 동림청선(東林聽蟬, 동쪽 숲에서 매미 소리 듣기), 월야탁족(月夜濯足, 달밤에 탁족하기)에 우일사운(雨日射韻, 비오는 날 시 짓기)이 거기에 해당한다. 사람도 오지 않고 찾아갈 사람도 없는 무료한 장마철, 지루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일부러 어려운 글자를 넣어 시를 짓는 선비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다. 장대 같은 빗줄기를 바라보며 시를 짓는 선비의 모습, 이 얼마나 풍류 넘치는 광경인가.
꽃을 사람에 빗대어 표현한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 또한 명편이다.
모란牧丹은 화중왕花中王이요 향일화向日花는 충효忠孝로다
매화梅花는 은일사隱逸士요 행화杏花는 소인小人이요 연화蓮花는 부녀婦女요 국화菊花는 군자君子요 동백화冬栢花는 한사寒士요 박꽃은 노인이요 석죽화石竹花는 소년이요 해당화는 갓나희로다
이 중에 이화梨花는 시객詩客이요 홍도벽도삼색도紅桃碧桃三色桃는 풍류랑風流郞인가 하노라.
-작자 미상의 사설 시조
옛 지식인들은 당나라 황제들이 궁궐에 심어두고 즐겼다 하여 모란을 부귀의 의미로 읽었고, 한겨울에 피어난 매화는 절개와 지조를 상징한다 하여 욕망으로 물들었던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상징으로 삼았다. 지는 날까지 태양만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를 뜻하는 향일화는 임금과 부모를 향한 충효의 마음과 닮았다 여겼고, 흰머리의 노인을 밤에만 하얗게 피는 박꽃에 비유했다. 석죽화와 해당화를 각각 어린 소년과 소녀로 빗대어 표현한 것도 재치 있다. 꽃 하나에도 깊은 의미를 담았던 선현들의 탐미적인 사유가 매력적이다.
이밖에 기대승이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를 하면서 지은 시 「글을 읽으며」나 재기 넘치는 여인이 살아가기에는 너무도 각박한 조선의 현실을 변방에서 나라를 지키는 남성에 빗대어 노래한 허난설헌의 「새하곡」과 같은 한시는 선현들의 삶을 투영시키는 대상이자 우아한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길이었다. 옛 지식인들의 삶과 생각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옛시 읽기는 이렇듯 즐겁고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절제된 언어로 천 가지 감정을 전하다
감정이 짙어질수록 말은 짧아지고, 짧은 말에 함축된 깊은 의미를 깨달을 때 감동은 더 커진다. 은유의 미학을 잃어버린 거친 말, 미사여구에 둘러싸인 장황한 말, 자신의 이익만을 주장하는 배려 없는 말들이 범람하는 오늘날 「옛시에 매혹되다」는 절제된 언어 예술인 시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절절히 울릴 수 있음을 보여준다.
我兄顔髮曾誰似우리 형님 얼굴은 누구와 비슷했나
每憶先君看我兄선친 생각날 때마다 형님을 보았었지.
今日思兄何處見이제 형님 생각나면 어디서 뵈올까,
自將巾袂映溪行의관을 갖춰 입고 냇물에 비춰봐야겠지.
-박지원,「연암에서 돌아가신 형님을 그리워하며燕巖憶先兄」
박지원의 이 작품은, 죽음이 가져온 이별을 담담하면서도 가슴 깊은 울림으로 잘 전해준다. 형님의 죽음이 슬프다거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하다거나, 그립다는 등 일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단어는 거의 이용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 작품을 읽는 순간 형님에 대한 박지원의 애정과 그리움을 가슴 뭉클하게 느낄 수 있다.
방황하는 이여 옛시를 읽으라!
방황 없는 청춘이 어디 있으랴만, 내 젊은 시절의 방랑길에 오랫동안 함께 했던 벗은 한시를 비롯한 수많은 옛시였다. 낯선 도시에서 나는 옛 지식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방랑길의 굽이들을 같이 넘었다. 힘든 줄 모르고 삶의 고비를 지났다면 상당 부분 옛시를 읽으며 지냈던 세월 탓이다. - 들어가는 말에서
방황하는 이가 어디 청춘뿐이랴. 무엇을 해야 할지 막연한 사람, 가고 있는 길이 자신이 그리던 길인지, 옳은 길인지 알 수 없어 괴로운 사람, 앞만 보고 달리다 문득 인생의 허무함을 느낀 사람 모두 길을 잃은 방랑자일 것이다. 방황의 시간을 걷는 우리에게 차 한 잔을 즐길 줄 아는 여유를 가지고, 병에 걸리면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로 삼으며,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덕을 지키며 뜻한 바를 위해 노력하면 길이 열릴 것이라는 저자와 선현들의 격려는 메마른 마음을 촉촉하게 적시는 단비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