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세상의 빛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진다
과연 당신은 어떻게 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착한 사람은 비록 어두운 충동 속에서도 올바른 길을 찾게 된다.”는 신神의 자신만만한 발언(『파우스트』, 괴테)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결국 선善이 승리한다.’는 구절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며 살아간다. 수많은 대중과 매체가 인정하고 인류 역사상 진리로 받아들여져 온 이 명제가 분명한 사실이라면 선의 반대 개념인 악惡, 그 ‘어두운 충동’의 존재 역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한다. 문제는 거기에 있다. 물질과 속도와 욕망의 시대, 현대사회. 과연 당신은 어떤 게 선이고 어떤 게 악인지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가?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 믿었던 모든 것이 눈앞에서, 손안에서 산산이 부서진다면 어떻게 이 삶을 견뎌야 할까?
소설 『흑광』은 국내외에서 수많은 기독교 관련 서적과 논문을 발표해 온 저자의 ‘사상적 요체’이다. 사회적 지위에만 매달리며 무엇이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주인공 ‘박혜자’의 파멸 과정을 통해, 어떤 게 이 세상을 밝히는 진짜 빛이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통렬하게 보여준다.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는 박혜자의 삶은 극단적인 경우이겠지만 독자는 세속적 욕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그의 모습과 묘하게 겹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손사래 치며 아무리 부정을 하지만 스스로가 물질의, 욕망의 노예가 아님을 완전히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저자는 많은 이를 현혹시키는 ‘어두운 빛’에서 벗어나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길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종교적 가치관(장벽)을 넘어서는 설득력을 제시한다. 이것이 소설 『흑광』의 최대 매력이다.
‘선과 악의 실체’ 그리고 ‘구원을 향한 삶’이라는 철학적 고민이 누구에게나 필요한 시기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가치가 있다. 이 시대의 요구에 의해 등장한 소설 『흑광』을 통해, 세상을 가득 메운 어두운 빛을 가르는 한 줄기 희망과 같은 진실의 빛에 다가가 보자.
과연 무엇이 ‘빛’인가
어둠이 완전히 깔리기도 전에 세상은 스스로 빛을 발한다. 거리를 가득 메운 네온사인 속으로 사람들은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이 밝은 빛 아래에서, 돈(물질)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 심지어 ‘구원’마저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누구나 떠드는 세상. 하지만 그런 삶의 끝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지 당신은 생각해 보았는가.
‘돈(물질)의 힘’
주인공 ‘박혜자’에게는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돈이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부러움과 대접을 받는다. 누가 보더라도 더없이 행복할 것만 같은 삶을 산다. 물론 그중 누구도 그녀의 삶, 이면을 들여다본 적은 없다.
사실 박혜자는 무척 피곤하다. 아니, 피곤을 넘어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겹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멸시하던 깜둥이(흑인)를 며느리로 삼게 되었고 마약과 색욕에 찌든 둘째 아들은 찾을 수조차 없다. 하버드 출신 사위를 얻게 됐다고 좋아했지만 수십 억 돈만 날리고 말았다. 외도를 하다가 친구에게 들켜 협박을 당한다면 그 누가 맘 편히 살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을 철저히 숨길 수 있게 해준 것이 ‘돈의 힘’이다. 삶이 아무리 피폐해지더라도 사람의 얼굴에 가면을 씌우고 견딜 수 있게 하는 것이 돈이다. 그렇게 물질에 의존해 허영과 욕망을 채우고 사회적 지위를 높여 대접을 받는 사람을 우리는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이를 지켜보는 많은 이들은 무언가 잘못됐다며 욕을 하지만 내심 부러워하는 게 실상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삶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왜 그토록 물질을 넘어서는 ‘가치’에 대해 인간은 고민을 하는지를.
진정한 삶은 과연 무엇인가
결국 ‘박혜자’는 “가문의 영광!”을 외치며 차가운 바다에 몸을 던진다. 빛이 너무 많아 어떤 것이 빛인지 분간하지 못한 자의 처절한 결말이다. 소설 『흑광』은 주인공이 파멸해 가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전개하며 ‘어두운 빛을 벗어나 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해답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진정한 삶의 추구’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물론이거니와 여타 종교인, 비종교인에게도 이 논리는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이는 요새 사회적으로도 자주 언급되는 ‘잘못된 기독교인의 자세’를 비판함과 동시에 타 종교인에게도 충분히 공감을 살 수 있는 ‘열린 자세’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최종적으로, 진정한 영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좁은 마음’과 ‘넓은 마음’을 동시에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그 누구라도 이 대목에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까닭은 그만큼 우리가 ‘박혜자’나 ‘거짓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며 자위하는 자’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분명 이 시대, 이 세상은 물질과 사회적 지위가 지배하는 세상이 맞다. 이는 그 어느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몇 번의 고비를 거듭하면서도 인류는 번영하였고 현재에 이르렀다. 단 하나의 진정한 영성을 추구하는 ‘착한 마음’과 그 어떤 어두운 충동도 물리칠 수 있는 ‘구원을 향한 의지’가 모든 인간의 마음 한구석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