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그 삶의 광장에서 펼쳐지는 이민사회의 자화상!
고민과 방황을 견디며, 이제 귀환이 아니라 기꺼이 그 속으로 다가가려는 사람들의 전언!
[옐로스톤의 오후]는 재미교포들의 자화상을 그려낸 작품으로 예리한 관찰력과 탄탄한 내러티브 기술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아온 소설가 이경숙의 첫 번째 창작집이다.
'아메리칸 드림'의 환상이 시들해진 지 오래지만, 미국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꿈과 욕망이 넘치고 있다. 미국에 이민 간 지 30년이 훌쩍 넘은 작가의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13편의 소설. 그 속에 등장하는 인생들은 그다지 화려하지도 즐겁지도 않다. 그렇다고 뒤돌아본 모든 것이 후회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들의 삶을 특유의 힘 있는 필치로 묘사하고 있는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나그네 세월 동안 깨달은 게 있다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 어디에 살든, 근본적으로 생각하는 게 거의 비슷하다는 것이다. 외로움을 타고, 사랑을 갈구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고......."
나그네 같은 이민자들의 삶을 그리는 작가의 글에는 그들에 대한 애정이 담뿍 묻어 있다.
이국의 땅에 깃든 깊은 절망과 외로움의 자화상, 그러나 아름다움
"그대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과 무대를 계속 봐야 한다는 생각이 속에서 뒤엉키는데 무력증에 걸린 사람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환하게 웃으며 엄마에게 풀꽃을 안겨주던 자랑스러운 아들이 게이 클럽에서 춤추는 모습을 본 선미에게 찾아든 삶의 [한기(寒氣)]는, 많은 이민자들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기 유학 온 아이들을 따라 미국에서 살고 있는 성예의 신산한 시간들을 그린 [옐로스톤의 오후]에는 이국땅의 메마름이 가득하다. 하지만 혼자 여행을 떠난 그녀가 옐로스톤 공원에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대한 묘사는, 그 시간들을 새롭게 음미하게 만드는 절묘한 한순간을 선사해준다.
"성예는 우선 그 광활함에 놀랐다. 황금빛과 오렌지빛, 그리고 군데군데 녹색과 코발트색이 어우러진 끝없이 넓은 광야 저편에서 올라오는 하얀 스팀은 지구가 아닌 다른 위성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게 했다. 어디엔가 하얀 프록코트를 입은 어린 왕자가 서 있을 것만 같았다. ......껍질이 다 타버려 때로는 꺼멓게, 때로는 하얗게 장승처럼 서 있는 나무들과 그 밑에서 자라는 작은 나무들에게서 성예는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소위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이곳에 온 자신. 그렇다면 이제는 저 나무들처럼 쓰러질 일만 남은 건가. 과연 우리 아이들이 싱싱하게 새로 자라나고 있는 저 나무들처럼 벌레 먹지 않고 깨끗하게 성장하고 있는가?"
못다 준 사랑을 기억해내는 작가의 섬세한 마음......
작가의 미덕은 어쩌면 팍팍한 생활 속에서도 못다 준 사랑을 기억해내는 마음일 것이다. [다니엘의 발소리]의 주인공은 의료보험이 없어 전전긍긍하는 딸아이와 안쓰러운 손자를 보고 엄마의 마음을 길어 올린다.
"얼른 다니엘을 데려오고 싶은 마음이 불 일듯 일었다. 매일 베이비시터 집 창가에 서서 엄마가 데리러 올 때를 기다리고 있을 아이 생각을 하니 가슴이 저렸다. 그 나이에 아빠를 잃었던 리사를 떼어놓고 일하러 다니면서 맺힌 가슴의 멍을 리사에게 그대로 물려줄 수는 없다. 그때 못다 준 사랑을 이제라도 베풀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
[아이 러브 유]의 선희는 오케스트라 연주회 날, 9·11 때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아이 러브 유'라고 속삭이는 사내아이의 목소리를 듣고 뿌리 깊은 소나무 같은 마음을 불러낸다. "인생의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 섹션이 몽땅 빠져나간다거나 트럼펫이 하나도 안 남아도 연주는 계속되겠지. 비록 기대했던 음악은 연주할 수 없겠지만 어쩌면 더 독특하고 아름다울 수 있을지도 몰라. 내일은 한국 마켓에 가서 배추 한 박스와 무 한 박스를 사야지......." 하면서 말이다.
[버스 안의 아이들]은 학교 버스를 운전하는 여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아이들의 상처를 다루고 있는데, 이 작품을 읽고 난 독자들의 마음에 "미스 카이저 같은 사람이 있는 한 블루 크리스마스를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해준다.
서로 교감하는 사람들의 오래된 시간과 만나다
오랜 미국생활 끝에, "돌아가야지. 그 생각이 들자 굴속같이 컴컴하던 마음에 한 줄기 빛이 비쳐 드는 것 같았다."고 읊조리는 [장상구 씨 이야기]. 삼일절 날 교회에서 막이 오른 공연, 사물놀이패 속에서 발견한 아들녀석 모습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며 삼십 년 전 고향마을 느티나무 밑 공터의 풍경을 떠올리는 장상구 씨의 마음이 찡하다. 아니 도대체 저 녀석이 언제.......
유학 온 큰누님의 손자 성호와 며칠 같이 지내면서 6·25 전쟁 무렵 가족들과 자신의 삶을 떠올리게 된 [노인과 소년]의 정식 씨는, 문득, 말이 유학이지 중학생 성호가 피난 온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매사에 툴툴대다가도 "학교에서 다시 받아줄까요?" 하고 걱정하는 아이의 마음에 슬그머니 공감하고 만다.
생활의 고통조차 지루함으로 굳어져버린 일상, 파문이 일다
느닷없이 찾아온 생의 파문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여자들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가의 솜씨 또한 일품이다.
[재수 없는 여자]의 주인공 혜수는 생의 후반부를 새롭게 꿈꿔 볼까 마음먹었지만, 자신을 재수 없는 여자라 의심하는 남자와 만나고 만다. 하지만 활주로 위를 천천히 굴러가던 비행기가 로드러너처럼 미친 듯이 달려가기 시작하는 순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그 순간, 마음도 부웅 같이 떠오르며 이렇게 생각해버린다. '재수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가을 산이 참 아름답습니다. 한번 오세요." 가발가게의 나른함과 흔들리는 남편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재희 앞에 느닷없이 나타난 남자, [콜로라도에서 생긴 일]. 웅장한 록키산맥 같은 삶의 파문은 어떻게 이어질까.
[인터넷 생일]-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자격지심으로 남은 지선은 생명보험 증서를 내미는 남자를 만난 지 두 달 만에 미국행 비행기를 탔다. 성실한 듯 무심한 남편과 다가오지 않는 딸 사이에서 지내던 어느 날, 누군가 그녀의 메일함을 두드린다. "혹시 오늘 생일 아니십니까?"
작은 위로와 치유의 길을 찾아서
"한국을 떠나 39년째 미국에서 살고 있는 나는 여기서 산 세월이 부모 밑에서 산 세월보다 훨씬 길다. 그렇기는 하지만 아들이 감옥에 있다거나 딸이 카페에서 춤추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을 보면 여전히 적응이 안 된다. 우리 같으면 남이 알세라 쉬쉬할 얘기를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들. 우리보다 솔직해서일까, 아니면 문화 차이인 걸까. 그러다 문득, 이것이 어쩌면 치유의 한 방법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가운 웃음을 띤 채 엄마가 창녀라고 말하던 제니도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치유가 되면 좋으련만....... 그동안 발표했던 단편들을 모아 책으로 묶으면서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중서부의 작은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독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더 큰 바람이 없을 것 같다(작가의 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