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성찰하는 새로운 관점
“‘확신’보다는 ‘지식’에 근거한 소통을 시도해보자”
왜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겪어야 하는가?
전 국민을 비탄과 분노로 몰아간 ‘세월호 참사’는 한국인에게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국이 ‘통곡의 대한민국’으로 변한 가운데, 화장을 지운 대한민국의 민낯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언론은 보도와 논평을 통해 그 이유를 소상히 밝혀주겠다고 나섰지만, 여론은 언론의 무책임성과 선정성을 비판하며 언론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나눠져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런데 우리는 ‘세월호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일까? 강준만 교수는 ‘세월호 참사’가 한국 사회에 던진 근본적인 화두는 성찰이라고 말하면서 다양한 이론과 한국의 특수성을 결합해 ‘세월호 참사’를 통해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을 분석한다.
왜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이게 나라인가?”라는 말이 나오는가?
인간 세계에선 속된 말로 ‘나와바리 전쟁’으로 부르는 현상인데, 특히 관료 집단에서 심하게 나타난다. 기업에서 나타나는 NIH 증후군은 그 기업의 손해로 끝나고 말지만, 공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나와바리 근성은 매우 심대하고 악성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이게 나라인가?”라거나 “이건 나라가 아니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수많은 나와바리의 할거(割據) 체제를 가리켜 어찌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동물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다리를 들고 오줌을 싸 자기들의 영역을 표시하는 걸 보여주는 동물 다큐는 동물 다큐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인간 다큐가 아닐까?
왜 세월호 참사를 ‘몸의 문제’라고 하는가?
세월호 선원들은 비상 상황과 관련한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는데도 두 달 전 해양경찰 점검에선 ‘양호’ 판정을 받았으며, 여객선 1척당 점검 시간이 고작 13분일 정도로 해양경찰청?해양수산부의 안전 점검은 엉터리였다. 몸으로 기억하거나 생각하기 위한 최소한의 훈련도 받지 않은 엉터리 무자격자들, 그리고 그들을 그대로 방치하는 직무유기를 범한 관계 당국의 엉터리 행정이 낳은 세월호 참사를 ‘몸의 문제’로도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 대한민국은 졸지에 ‘삼류 국가’가 되었는가?
대한민국이 어떤 면에선 ‘일류 국가’라면, 그것은 세월호 참사가 입증해준 ‘삼류 국가’와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다. 그건 동전의 양면처럼 앞뒤로 붙어 있는 것이며,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이런 현상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압축 성장이다.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이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겠느냐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새로운 국민적 정체성을 놓고 고민해야 하는 건 아닐까?
왜 한국의 하드웨어는 일류, 소프트웨어는 삼류인가?
한국은 전근대?근대?탈근대적 요소가 동시에 공존하는 나라다. 어느 나라에서든 이런 현상은 일어나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을 이룬 나라인지라 이게 유독 심하다. 한국은 ‘문화 지체’에 ‘역사 지체’까지 가세했다. 앞서 말한 ‘압축 성장’과 더불어 강력한 독재 체제가 인위적으로 특정 부문(정치)은 억누르고 특정 부문(경제)은 키웠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어도 발생했을 ‘문화 지체’가 훨씬 더 증폭된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왜 ‘국민은 배곯아 죽고 공무원은 배 터져 죽는 사회’란 말이 나오나?
공무원을 가리켜 공복(公僕), 즉 ‘국가나 사회의 심부름꾼’이라고 하는데, 이는 과연 진실인가? 오히려 그들은 상전이 아닌가? ‘세월호 참사’는 대리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극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었다. 페이스북에는 이런 글이 올라왔다. “원칙을 지키면 죽는다는 걸, 원칙을 깨는 세상은 알지만 그걸 모르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이렇게 희생된다.” 그런 악습은 도처에 널려 있다. 청해진해운이 2013년 선원 안전 교육에 쓴 비용은 1인당 4,100원으로, 총 54만 원이었던 반면 접대비는 6,057만 원에달했다. 세월호에 대한 안전 운항 관리를 청해진해운 등 해운업체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한국해운조합이 해온데다, 한국해운조합의 이사장은 해양수산 분야 고위 퇴직 관료가 차지해 “‘해수부 마피아’와 업계가 유착한 공생 관계 속에서 여객선 안전 관리는 뒷전으로 밀렸다”.
왜 장관들은 물러날 때쯤에서야 업무를 파악하게 되는가?
암묵지가 중요하지만, 암묵지에 대해선 너무 무관심하다. 국정 운영의 방법은 명시지가 아니라 암묵지다. 그 방법을 다룬 책이 있을 리 없다. 그건 인터넷에도 없다. 국정 운영을 담당했던 사람들에게서 직접 전수받아야 할 지식이다. 적어도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그건 꼭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정권들은 이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시도하기에만 바쁘다. 앞선 정권의 경험조차 제대로 탐구되지 않는다. 과거와의 ‘단절’을 내세우면서 자신을 새 시대의 원조(元祖)로 부각시키고 싶은 욕심을 앞세우는 탓이다. 과거의 모든 걸 부정하고 완전히 새로 태어났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 새로운 실험에만 몰두하느라 엄청난 사회비용과 기회비용을 유발한다. 그 비용에 대해선 ‘과도기적 진통’이라는 편리한 변명이 늘 준비되어 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확신은 왜 위험한가?
우리는 일상적 삶과 관련된 수많은 의문에 대해서 모두 다 그 이유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런 확신에 오류는 없는 것일까? 확신이 사실에 근접한 것일지라도, 모든 사람의 생각이 다 같진 않을 것이다. 생각이 다를 땐 상호 소통을 통해 생각의 차이를 줄여 나가는 것이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 어떤 확신으로 무장한 사람과의 소통은 기대하기 어렵다. 과거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던 시절에는 확신은 물론 ‘광신(狂信)’마저 투쟁의 동력으로 필요했고 긍정 평가할 수 있었겠지만,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체제하에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확신이다.
지금처럼 사회적 갈등과 분열이 극심한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확신은 나의 확신을 공유하지 못하는 사람을 적(敵)으로 돌리는 ‘잔인한 사고방식’이기 때문이다. 나의 확신과 너의 확신이 만나면 ‘충돌’ 이외에 달리 할 일이 없다. 나는 왜 확신하며 너는 왜 확신하는가? 스스로 ‘왜?’라는 물음에 답해보면 충돌은 피할 수 없을망정 그 강도를 낮출 순 있겠건만, 우리는 확신에 빠져 한사코 ‘왜?’를 멀리 하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확신에 대한 검증, 아니 도전이 싫기 때문이다.
강준만 교수는 한국 사회의 소통을 위해 확신에 대한 성찰을 촉구한다.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에 대해 ‘확신’보다는 ‘지식’에 근거한 소통을 시도해보자는 것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 모두 자신을 지배하고 있는 그 어떤 ‘확신’에서 벗어나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을 새삼 낯선 듯이 관찰하고 음미해보는 재미와 의미를 누려보자. 우리가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상황을 견뎌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황을 바꾸는 긍정적인 변화의 바람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확신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왜 이론이 중요한가?
이 책은 2013년 12월에 출간된 『감정독재: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의 속편이다. 『감정독재』와 마찬가지로 50개의 “왜?”라는 질문을 다양하게 던지고 여러 분야의 수많은 학자에 의해 논의된 이론과 유사 이론을 끌어들여 답을 하고 있다. “왜?”라는 질문의 전부는 아닐망정 상당 부분은 이론이 있을 때에 더 쉽고 정확하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다. 이론은 사실상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에서부터 개인의 심리 문제에까지, 이론을 알거나 이론을 찾으려고 노력하면 도움되는 게 많다. 특히 사실과 정보의 홍수 또는 폭발이 일어나고 있는 디지털 시대에 이론의 필요성은 더욱 커졌다. 사실과 정보의 홍수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론 만능주의’를 주장하려는 건 아니다. 이론으로 모든 걸 설명하려는 시도는 위험할 수도 있다. 이론은 사고를 그 어떤 틀에 갇혀버리게 만드는 족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은 바로 이게 문제다. 사람들이 이론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모두 다 나름의 이론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 어떤 이론이든 이론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는 일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이론에 대해서도 끊이없이 “왜?”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게 열린 자세로 이론을 이용해 좀더 긴 시야와 깊은 안목을 갖고 세상을 이해하고 꿰뚫어보려는 노력을 해보자는 것이다.
책속으로 추가
나이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흐르는 건 ‘시간 압축 효과’ 때문이라지만, 국민적 차원에서 보자면 우리가 이룩한 세계 초유의 압축 성장이 비슷한 효과를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세상을 너무 빠른 속도로 살아온 탓에 안전을 돌볼 겨를도 없었고, 그래서 세월호 참사와 같은 비극적 사태를 맞이하게 된 건 아닐까? 뒤늦게나마 여기저기서 ‘느리게 살기’의 장점을 예찬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오는 건 반가운 일이다. 그렇지만, 그간 누려온 물질주의적 삶을 어느 정도 포기하겠다는 각오조차 없이 느리게 살겠다는 건 심리적 수명을 연장하려는 또 다른 탐욕은 아닌지 모르겠다. (「왜 나이 들수록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