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기이한 위기극복 스토리, 어린왕자!
어린왕자를 통해 당신이 처한 모든 위기를 극복한다!
당신 안에 살고 있을 어린왕자를 만나라!
“아이들을 위한 동화가 아닙니다. 아이의 마음을 잃은 어른들을 위한 책이지요.”
위기 극복의 상상력 하나, 내가 길들인 사람들을 향한 책임감
위기 극복의 상상력 둘, 절망하는 자신을 비웃을 수 있는 힘, 긍정의 힘
[진형준 교수를 만나, 《위기를 비웃어라》를 듣다]
#1. 위기극복의 상상력의 원전으로 『어린왕자』를 선택한 이유는?
내가 대학에서 어린왕자를 강의해온 지가 20년이 넘었다. 20년이 넘었으니 매너리즘에 빠질 만도 하지만 어린왕자 강의 시간은 예나 지금이나 늘 새롭다. 어린왕자 강의를 위해 강의실로 들어설 때면 언제나 마음이 상쾌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린왕자가 그만큼 좋은 작품이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가? 작품에 들어 있는 내용을 파악하고 나면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다면 좋은 작품이 아니다. 그렇다고 매번 새로운 의미를 파악하느라 골머리를 앓게만 한다면 그 또한 대단히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좋은 작품이란 더 없이 친숙하게 여겨지면서도 늘 그 의미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작품이다. 전에 읽었을 때나 지금 읽으나 그렇게 크게 다른 것 같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의미가 솟아나오는 작품이다. 바로 『어린왕자』가 그런 작품이다. 나는 강의실에 들어가 강의를 할 때마다 그런 새로움을 학생들과 나눈다.
1943년에 세상에 나온 『어린왕자』는 전 세계에서 1억 부 이상의 출간 기록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성서 다음으로 많이 팔리고 읽힌 책이다. 아니다. 판매기간까지 감안한다면 성서 이상의 베스트, 스테디셀러이다. 그만큼 누구에게나 쉽게 읽힌다. 그래서 누구나 아주 쉬운 책이라고 생각한다. 사실이다. 『어린왕자』는 아주 쉽게 읽히는 책이다. 그리고 그 가독성이 『어린왕자』를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만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어디 쉽게 읽히는 책이 어린왕자 뿐일까? 어린왕자가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그 책이 읽기 쉬우면서도 그 무언가 깊은 뜻을 많은 사람에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그 무언가 많은 울림을 사람들에게 주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강의를 해왔으니 이제는 『어린왕자』를 순전히 내 식으로 읽는 훈련을 어지간히 해온 셈이다. 그리고 어린 왕자를 그렇게 내 식으로 읽다보니 조금은 아쉬움과 욕심도 생긴 셈이다. 『어린왕자』에 대한 애정에서 생긴 아쉬움과 욕심 때문이다.
#2. 교수님이 보기에 『어린왕자』는 어떤 책이고, 우리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어린왕자’를 순수성의 화신으로 본다. 순수하기 그지없는 어린왕자라는 존재를 통해 이 세상을 향해 그 무언가 비판의 메시지를 던지는 책으로 읽는 데 아주 익숙해 있다. 그래서 『어린왕자』를 어린왕자-어른의 대립 구도로 읽는 데 익숙해 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금방 순수한 어린왕자가 된다. 그리고 어린왕자와 함께 순수하지 못한 어른세계, 타락한 세상을 비판한다. 그렇게 읽어도 나쁠 것은 없다. 한 번 어린왕자의 순순한 눈을 가져보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정신은 어느 정도 순화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간단한 독법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어린왕자가 될 수 있겠는가? 어른들만 사는 세상에서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어린왕자가 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아쉬움이 생긴다.
『어린왕자』는 어린왕자 입장에서 어른들의 세계를 바라본 이야기가 아니다. 또한 어린왕자 또래의 아이들을 위한 동화도 아니다. 『어린왕자』는 자기 속의 어린왕자를 잃어버린 어른들을 위한 책이다. 우리들 속의 어린왕자를 일깨우는 책이다. 우리들 속의 어린왕자를 일깨워, 지금의 우리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의 삶 전체를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우리가 다시 새롭게 깨어나는 길을 우리에게 인도하는 책이다. 그 길의 끝에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을 향한 긍정의 힘과, 지금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책이다.
#3. 『어린왕자』에서 발견한 비급은 무엇인가?
공자는 『논어』 옹야 18편에서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라고 말씀하셨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아서 하는 게 중요하다는 충고를 할 때에 가끔 써먹히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그리 만만치 않다. 어찌 보면『어린왕자』라는 작품이 전하는 속 깊은 메시지가 그 말씀 하나에 모두 압축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세상 살면서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는 것, 아주 중요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아무 것도 모르고 지내다 보면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찾아보지도 않고 그냥 되는대로 세상 살다보면 삶이 너무 무미건조해진다. 그런데 공자는 그 모든 것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고 말씀하신다. 무슨 뜻인가?
공자의 말씀을 좀 쉽게 이해하기 위해 ‘아는 것’,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 앞에 ‘삶’이라는 목적어를 갖다 놓아보자. 그렇다면 ‘사는 게 뭔지 아는 것’, ‘삶을 좋아하는 것’, ‘삶을 즐기는 것’이 된다. 그렇게 써놓으니 뭔가 조금 명확해지지 않는가?
『어린왕자』작품 속 어린 시절의 ‘나’, 정글의 삶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보아 구렁이 그림 1호와 2호를 그린 ‘나’는 삶을 ‘좋아하는 나’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 외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나’이다. 그렇게 사는 ‘나’를 ‘사는 게 뭔지 아는 나’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리게 만든 것이 바로 어른들이다. 세상 살면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만 찾다가는 쪽박 차기 십상이니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충고한 것이 바로 어른들이다. 베짱이처럼 놀기만 하면 어떻게 하느냐, 개미처럼 부지런히 공부를 하라고 충고한 것이 바로 어른들이다.
그런데 공자는 거꾸로 말씀하신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과연 산다는 게 뭔지 알려고 하는 것 보다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열심히 찾아 노는 게 더 낫다고 말씀하신다. 개미보다 베짱이가 더 낫다고 말씀하신다. 좋아하는 것만 눈에 들어오는 어린아이가 철이 든 어른보다 낫다고 말씀하신다. 왜 그런가? 그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이 세상을 즐기는 길에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무언가를 정확히 알려면 머리를 써야 한다. 냉정해져야 한다. 대상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반대로 그 무언가를 좋아하려면 감성, 감정에 호소해야 한다. 대상과 거리를 줄여야 한다. 그렇지만 공통점도 있다. 그 무언가를 알려고 하건 그 무언가를 좋아하려고 하건 여전히 중심은 자기 자신이다. 그 무언가를 알려면 내가 중심이 되어 냉정하게 대상을 바라보고 분석해야 한다. 그 무언가를 좋아하려면 자기 자신의 주관적 감성과 감정을 대상에 이입해야 한다. 머리는 냉정하고 감정은 변덕이 심하다. 모두 자기중심적이다.
그런데 즐기는 것은 다르다. 그 무언가를 진정으로 즐기려면 마음을 써야 한다. 마음은 대상에 몰입한다. 대상과 하나가 된다. 삶을 즐기려면 삶과 거리가 없어진다. 내가 삶의 주체가 되면서 동시에 삶과 하나가 된다. 삶의 즐거움, 고통과 함께 한다. 머리에서 감정으로 감정에서 마음으로 옮아갈수록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진다.
#4. 『어린왕자』를 통해 상상력을 발휘하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어떻게 가능한가?
『어린왕자』에서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인다는 것은 서로 한 몸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진정으로 삶을 즐기는 방법을 가르쳐준 셈이다. 이어서 여우는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밖에 볼 수 없음을 가르쳐준다. 삶을 즐기려면 마음으로 세상을 보아야 함을 가르쳐준 셈이다. 사람들은 분명 자신이 무지한 것을 가장 부끄러워한다. 하지만 좋아하는 것이 없음이 무지함보다 더 큰 결함이다. 좋아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아예 대상과 만날 준비가 안 되었다고 보면 된다. 공자가 누누이 강조한 것이 좋아하는 것이 있어야 알고 싶은 욕망도 생긴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것 자체, 그것이 그 무언가를 알고 싶은 태도를 낳는다. 하지만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큰 결함은 함께 괴로워하고 즐거워할 대상이나 사람이 없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어린왕자가 세상에 나가 배운 것이 바로 삶을 즐기는 법이다. 삶을 진정으로 즐기는 법을 배우고 나니, 삶을 앎의 대상으로만 알아왔던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세상을 앎의 대상으로만 보고서 중요시해오던 것들이 갑자기 우스워진다. 그러니 ‘위기를 비웃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위기를 비웃으라는 뜻이 아니다. 머리로만, 감정으로만 보았던 세상을 마음으로 보라는 이야기이다. 마음으로 세상을 볼 줄 알게 된다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기 혁신의 길이다. 마음으로 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게 된다. 나와 남들과, 세상이, 하나로 어우러져 있음을 알게 된다! 함께 동고동락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어찌 이보다 더 큰 위안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위안 속에서 내가 위기로만 알고 있던 것이 하찮게 여겨진다! 자기중심적으로 세상을 보아왔던 자신이 정말 하찮게 여겨진다! 나를 그렇게 하찮게 보면서 나는 더 크게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최소한 다른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러니 위기를 맞을수록 그 위기에 더 몰입하지 말고 그 위기를 한껏 비웃어라! 그 위기에 빠져 절망하고 있는 나를 한껏 비웃어라! 당신 안에서 새로운 에너지가 생기는 것을 곧 경험하게 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