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화와 전문화의 논리에 갇힌 근대적 학문에 대한 반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의 학자들이 나눈 초학제적 대화의 기록
전문성을 얻는 대신 전인성을 상실한다는 것이 근대적 인간의 운명이며, 이것은 근대적 학문의 운명이기도 하다. 근대적 학문은 분과 학문이고, 분과 학문은 사고를 가두는 상자와 같다. 상자 안에 갇힌 학자는 삶의 세계로부터 고립된다. 따라서 근대적 분화 및 전문화의 논리가 드리우는 짙은 그늘을 생각할 때 오늘날 초학제 연구나 융합 학문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융합 학문은 이러한 분화적 사고의 한계를 타파하자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
2012년에 출범한 고등과학원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의 패러다임-독립연구단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대화를 유도하고 가급적 기초적이고 초보적인 수준에서 융합 연구의 길을 개척한다는 과제를 설정했다. 이런 과제를 위해 패러다임-독립연구단은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분리되기 이전으로, 나아가 동양적 사유와 서양적 사유가 분화되기 이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원대한 계획을 세웠다. 동서의 사유 패러다임이 서로 교차, 충돌, 순화되는 기회를 실험하여 새로운 보편성의 유형을 모색한다는 것이다. 이 프로젝트의 주제는 ‘분류-상상-창조’로 집약되었고 이 세 가지 범주 각각을 매년 초학제 연구를 이끌어갈 선도 주제로 삼았다. 2014에 ‘분류’, 2015년에 ‘상상’을 주제로 한 연구 성과를 총 세 권의 책으로 정리해 출간한 데 이어 이번에 출간하는 두 권의 책은 ‘창조’를 화두로 지난 1년 동안 개최한 세미나, 심포지엄, 학술대회의 성과를 보충 정리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넘나드는 다양한 분야의 대표 학자들(김상환, 신정근, 강신익, 이정우, 맹정현, 민주식, 우실하, 심경호 등)이 나눈 초학제적 대화를 담고 있으며, 넓은 관점에서 창조의 문제에 접근한 귀한 사례로서, 향후 국내외 초학제 연구의 밑거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초학제연구인가?
융합 연구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다. 세부 학문 분야 내에서 이루어지는 공동 연구, 다른 학문 분야 사이의 다학제 연구, 융합의 정도가 더 심화된 학제간 연구 등이 있다. 학제간 연구가 성숙하면 물리화학, 생화학, 인지과학, 생물물리학과 같은 새로운 학문 분야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 지향하는 초학제 연구는 이보다 더 넓은 의미의 융합 연구를 지향한다. 초학제 연구는 사고방식마저도 다른 ‘먼’ 학문 분야 사이의 융합 연구를 통하여 새로운 지식, 새로운 학문을 창출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다학제 연구와 학제간 연구의 결과물을 비빔밥이나 샐러드에 비유한다면, 초학제 연구는 음식 재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고 새로운 형태로 태어나는 스프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초학제 연구는 태생적으로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진화하기 전 단계에서 수행되는 활동이어서 기존의 대학 조직이나 연구 지원 체계에서 제도적으로 안착되지 않는 특성이 있다. 협동 과정이나 융합 연구 조직으로도 아직 미흡하다. 국내에서는 대학과 연구 기관들에서 많은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긴 하지만 기존의 시스템 내에서는 연구자들 사이의 구속력이 적어서 프로그램이 효과적이지 못한 한계가 있다. 외국에서는 대학 부설 고등연구원 같은 조직이 일회적인 연구의 한계점을 극복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현재 고등과학원이 초학제 연구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고등과학원은 수개월 단위로 방문하는 국내외 교수와 고등과학원에 채용된 연구원을 중심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장을 지속적으로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그러한 초학제 연구의 결과물이다.
‘창의성’ 개념이 주제화되는 방식을 정리하여 창의성 담론에 필수적인 인문학적 자양을 제공한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창조나 혁신만큼 자주 오르내리는 말도 없을 것이다. 정부와 기업, 그리고 대학의 수장들이 앞장서서 창조와 혁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무한 경쟁이 일반화될 수밖에 없는 세계화 시대에 창조와 혁신 이외의 다른 살길이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창의성에 대한 논의가 기술혁신이나 이윤 추구의 문맥에 함몰되어 근본을 놓치고 있다는 데 있다. 창조 경제나 창의 교육을 주제로 한 수많은 모임이 열리고 있지만 창의적 사고가 무엇인지를 논하는 자리나 창의적 상상력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토론하는 사례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잘 들리지 않는다. 이런 기이한 현상은 우리나라의 인문적 성찰의 수준이 낮은 나머지 그때그때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정황을 떠나 창의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워낙 애매하고 난해한 주제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창조를 정의한다는 것, 창의적 발견의 과정을 논리적으로 해부한다는 것은 그 어떤 학자에게도 처음부터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너무나 많은 우연과 신비한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철학자들이 창조적 발견의 비밀을 푸는 문제를 철학의 영역에서 배제한 이유도 사실 여기에 있다.
사실 창조라는 것을 소수의 특권이나 신비로 가득한 예외적 사건으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보통의 삶과 정상적인 생활 속에서도 얼마든지 창의적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창조적 새로움이란 것은 특정한 아이디어의 내재적 속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아이디어를 평가하는 기준이나 사회-문화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속성이다. 그리고 특정 시대나 지역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저마다 고유한 사상사적 전통에 뿌리내리고 있다. 고등과학원 초학제 패러다임 독립연구단의 3년차 작업인 이 책은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동서 사상과 문화의 전통에서 창의성 개념이 주제화되는 방식을 정리하여 오늘날 널리 퍼지고 있는 창의성 담론에 필수적인 인문학적 자양을 제공할 것이다.
5권 『동서의 문화와 창조: 새로움이란 무엇인가?』
- 미학과 예술 분야와 관련한 창조의 문제,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이 바라보는 창조를 다룬다.
이 책은 서론 격의 글과 두 개의 부로 이루어져 있다. 제1부 ‘예술과 창조’에서는 미학과 예술 분야와 관련하여 창조의 문제를 다룬다. 제2부 ‘마음과 창조’에서는 심리학을 비롯한 사회과학이 바라보는 창조에 관한 글을 모았다.
서론에 해당하는 유헌식 교수의 「‘새로운 것의 출현’을 설명하기 위한 철학의 조건」에서는 헤겔까지의 서양철학에서는 중심 주제가 아니었으나 현대 철학에서 관심 대상이 된 ‘새로운 것’을 철학에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철학이 방법론적으로 어떤 성격을 지녀야 새로운 것의 출현을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답한다.
제1부를 여는 「한국 전통 미학을 통해 본 새로움의 문제」에서 민주식 교수는 여러 가지 풍부한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 전통 미학에서 논의된 새로움의 의미를 청신(淸新)함과 신선(新鮮)함으로 규정하고, 한국의 미학 사상 속에서 창조성이 특히 ‘융합적 사고’와 ‘대립적 변이’를 통해 발휘되어왔음을 밝힌다.
「천재냐 발상이냐?: 존 듀이의 미적 철학으로 본 창의성 개념의 기원」에서 김연희 박사는 현대적 창의성 개념의 기원을 존 듀이의 미학에서 찾고, 존 듀이의 ‘질적 사고’라는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아 창의성을 논의해나간다.
황유경 교수의 「재형성과 이해 증진」은 넬슨 굿맨과 캐서린 엘긴에서 출발하여 예시, 은유, 허구를 중심으로 재형성이 이해를 증진하는 면면을 살펴본다.
「시대사와 창조적 영감(靈感): 괴테의 경우」에서 김임구 교수는 인간적 주체의 외부로부터 연유하는 영감의 중요성에 주목하면서 괴테의 예술관을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창조적 직관과 시대적 환경이 관계하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박기순 교수의 「인게니움(ingenium) 개념과 사유에 대한 새로운 사유: 비코와 랑시에르를 중심으로」는 근대 시학에 대한 독창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랑시에르의 논의를 소개한다.
「서사적 사유와 과학적 사유 그리고 세계: 밤의 창조성」에서 최용호 교수는 과학적 사유와 서사적 사유는 각각의 한계에 대해 집요하게 물음을 제기하여 창조력을 발휘해왔으며, 학문의 역사는 그 한계에서 구축과 탈구축이 지속적으로 되풀이되는 긴장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들뢰즈와 불레즈, 음악에서의 창조에 관하여」에서 피에르 몽테벨로 교수는 음악과 철학의 접점을 시간과 공간의 문제에서 발견한다. 들뢰즈는 리토르넬로라는 개념을 매개로 불레즈의 음악에 접근하여 시공간의 주요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이끌어내며 들뢰즈에게 시간과 공간은 그 본질에 있어 음악적이라는 것이다.
제2부의 첫 글인 맹정현 박사의 「창의력의 세 가지 원천」은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창의력의 문제를 다룬다. 유아에게 창의력이 출현하는 세 가지 계기는 충동, 상징, 분리(욕망)이며, 결국 창의력의 핵심은 새로운 것을 욕망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에 있다.
김선욱 교수의 「정치판단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한나 아렌트의 정치철학을 토대로 정치판단의 창조적 측면을 설명한다.
「자기생산과 세계 창출: 자기생산체계 이론에 비추어 본 창조의 문제」에서 최호영 박사는 마투라나와 바렐라가 발전시킨 자기생산체계(autopoietic system) 이론의 관점에서 창조 또는 새로움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한다.
「사회학의 관점에서 본 분류와 창발의 문제」에서 이재혁 교수는 새로움은 기존 분류 체계들이 서로 뒤섞이고 혼융되어 보다 포괄적인 분류 체계가 탄생하는 덕분에 산출된다는 것을 보인다.
「‘3수 분화의 세계관(1-3-9-81)’에서 변화와 창조의 논리」에서 우실하 교수는 동북아시아 북방 민족의 기본 사유 구조인 ‘3수 분화의 세계관’을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3수 분화의 세계관’에서 새로움, 창조의 논리를 설명한다.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에서 르노 바르바라스 교수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정치하게 분석하여 새로운 것으로서의 새로움, 소생으로서의 새로움, 탄생으로서의 새로움이라는 세 가지 의미로 구분하고, 탄생으로서의 새로움만이 근본적인 새로움이라 평가할 수 있다고 결론짓는다.
고등과학원 초학제연구총서
KIAS Transdisciplinary Research Library
고등과학원은 기존 학문 제도와 과학적 방법론의 한계를 넘어서는 보다 창조적인 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각 학문 분야의 연구 주제 및 방법 간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과학 연구와 과학 문화의 지평을 확장하고자 초학제 연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고등과학원 초학제연구총서는 기초이론과학과 인문사회예술 등 다양한 분야 사이의 1차적이고 수준 높은 대화를 모색하는 초학제 연구의 성과를 공유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발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