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한 고증, 충실한 풀어쓰기”
인문학적으로 다시 읽는 『장화홍련전』
열네 살에 다시 보는 우리 고전 두 번째 책은 치밀한 고증과 충실한 풀어쓰기로 완성된 『장화홍련전』입니다. 각색 동화나 교과서 부분 인용에 익숙한 청소년 및 성인 독자를 위해 필사본과 연활자본을 현대 우리말로 풀어 문학작품 특유의 명징한 비유, 상징을 품은 장면들까지도 아름답게 복원시킨 이 새로운 독본에서 독자들은 고전의 참 멋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새롭게 느껴지는 것은 동아시아 한문 고전 연구자이자 출판 및 강연 기획자로 활동해 온 저자가, 인문학이라는 반성적 렌즈로 우리 옛 소설을 다시 읽어 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야기의 사회·역사·문화적 배경을 다양한 기록과 문헌을 통해 조사하고 찰진 입담으로 풀어낸 장별 부록 ‘이야기 너머’를 읽다 보면 가부장 권력의 모순, 국가 권력의 무능, 가족 로망스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되고, 우리의 둔감함이 미처 감각하지 못했던 진짜 ‘공포’가 덮쳐 옵니다. 오늘의 독자가 보다 감각적이고 입체적으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림, 지도, 사진 자료를 더하고 있습니다.
1651년의 잔혹한 실화에 바탕한 기묘한 소설,
가부장 권력에 물음표를 던지다!
1651년, 가뭄과 기근에 시달리던 평안도 철산에서 자매 살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미궁에 빠진 사건으로 민심은 점점 더 흉흉해지는데, 뛰어난 무인 ‘전동흘’이 철산 부사로 부임해 진실을 밝혀냅니다. 전동흘의 후손이 『가재사실록』에 기록한 이 사건은 시간이 흘러 소설·판소리·창극·드라마·영화로까지 새롭게 각색됩니다. 얼마 전에는 할리우드까지 나서서 이 이야기를 모티프로 영화를 만들었지요.
그렇다면 『장화홍련전』의 그 끈질긴 생명력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단순히 권선징악이나 인과응보 같은 주제를 다룬 작품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우리가 혹시 바로 그 선입견 때문에 오랫동안 이 작품을 오해해 오지는 않았나 묻습니다.
『아버지의 세계에서 쫓겨난 자들-장화홍련전』은 풀린 듯, 안 풀린 듯 알쏭달쏭한 결말로부터 이 작품을 거꾸로 다시 읽어 들어갑니다. 즉, ‘장화와 홍련의 한은 정말 풀렸을까?’라고 질문하면, ‘글쎄?’라는 애매한 답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장화에게 누명을 씌운 계모 허씨와 큰아들 장쇠는 사형당하고, 장화에게 죽음을 명했던 최고결정권자 - 아버지 배무룡은 사면됩니다. 그 후 자매는 세 번째 부인을 얻은 아버지의 딸로 다시금 환생합니다.
귀신이 되어서도 벗어날 수 없는, 영원토록 반복되는 ‘아버지 집’으로의 회귀, 저자는 여기에 이 작품의 진짜 공포와 슬픔이 깃들어 있다고 봅니다. “한 겹 두 겹 풀수록, 행간을 파고들수록 새로운 발견을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억울함이 풀린 듯 안 풀린 듯 알쏭달쏭한 결말, 두 자매가 억지로 웃고 있을 것만 같은 설정도 해석의 길을 여러 갈래로 냅니다.”(본문에서)
그 소설은 픽션일까 논픽션일까
이 가족은 울타리일까 장막일까
피해자의 이름부터 사건 양상까지 실제 사건과 소설은 쌍둥이처럼 닮은꼴. 저자는 논픽션(1651년의 실제 사건)과 픽션(소설 『장화홍련전』) 사이에서 수사 파일을 작성하듯 치밀한 대조와 논증 과정을 통해 소설 속 각 인물의 행위가 지닌 의미, 각 장면의 메시지를 이해할 때 필요한 배경지식을 디테일하게 되짚어 봅니다. ‘이야기 너머’라는 부록 아홉 개에 담긴 흥미로운 소설 뒷이야기, 소설을 통해 본 시대와 세상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계모형 소설’ 속에 담긴 인간 보편의 심리에서 우리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은 아닌지, 강자에게 너그럽고 약자에게 모진 형사 제도는 어떻게 작동했는지 조목조목 살펴봅니다. 철산의 인문지리, 국가가 펴낸 윤리 교과서 『오륜행실도』, 프로이트의 ‘가족 로망스’, 조선 명탐정 정약용 등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연계 지식은 맥락의 깊이를 더해 주며 <오륜행실도> 민손 삽화, <동여도>의 철산 지도 등 귀한 시각 자료 또한 작품을 보다 감각적이고 입체적으로 감상하게 해 줍니다.
탁월한 ‘호러’ 작품은 언제나 시대를 반영하고 현실을 비틀어 왔습니다. 이를 염두에 둔다면 원한 많은 처녀귀신 이야기 정도로 들어 넘겼던 『장화홍련전』에서 보다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저자는 행간에 파고든 가부장 권력의 모순과 무능을 읽어 내며 우리가 무심코 지나친 서늘한 풍경을 복기합니다.
추천의 글
오늘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고전古典을 읽는 일은 따분하고 재미없는 ‘괴로운 싸움苦戰’일 뿐이다. 착하고 온순한 주인공은 죽거나 다치고, 사악하고 남 괴롭히기를 밥 먹듯 하는 인물은 영화를 누리는 듯하다가 마지막에는 확 뒤집어져서 착한 주인공은 보답을 받고, 악한 인물은 벌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아무리 반전이 주는 재미가 좋다고 하지만, 이런 뻔한 결말은 날마다 언론과 영화, 만화에 등장하는 끝을 알 수 없는 잔혹한 고통과 죽음의 이어달리기 소식들에 견주어 너무나 ‘리얼’하지 않다. 무엇보다 공감이 가지 않는 설화·전설·민담을 그저 시험을 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외워야만 하다니!
고전 읽기를 그저 그런 내용을 담은 고장 난 테이프를 반복해서 듣는 일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다시 살아 있는 이야기로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자면 고전을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고, 시대를 건너 이어지는 맥락을 잡아내어 생동감 있는 이야기로 다시 풀어내야 한다. 등장인물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역사 환경을 맛깔나게 정리한 정보 꼭지도 필요하다.
여기서 만나는 장화와 홍련 이야기는 재미있고 흥미롭다. ‘계모가 전 부인의 딸을 무참하게 죽이고 벌을 받은 이야기’에서 나아가 ‘장화’,
‘홍련’, ‘배무룡’, ‘허씨’, ‘정동우’ 같은 인물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에 ‘디테일’이 살아 있다. 부사 앞에 원혼으로 나타난 홍련이 원통함을 하소연하는 장면에서, 관아에 끌려나온 배무룡과 허씨가 사실을 실토하고 벌을 받는 장면에서 더 많은 상상으로 이끄는 힘도 있다. 글쓴이가 수행한 치밀한 고증과 충실한 풀어쓰기 덕분이리라. 이 이야기를 읽는 청소년들이 권선징악, 인과응보를 넘어서는 공감과 연민의 미덕을 넉넉하게 맛볼 수 있기를 빈다. _박종호(서울 신도림고등학교 국어교사, 청소년문화연대킥킥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