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인의 젊은 학자들이 동서양의 공동체 사상에 대해서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다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일고 있다. 환경 공동체, 사이버 공동체 등 시대 변화에 따라 각종 새로운 공동체 실험과 논의들이 분출하고 있다. 그러나 공동체 논의를 주도하는 것은, 무엇보다 근대화의 심화와 더불어 경쟁논리가 전 사회적으로 관철된 결과 우리 사회에서도 출현하게 된 원자적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와 같은 병리적 현상에 주목하면서 그에 대한 치료제로서 공동체 원리와 덕목을 강조하는 흐름이다. 이런 시점에서 각기 동서양의 철학을 공부한 5인의 젊은 학자들이 과거 동양과 서양에서 '연대적' 삶의 형식으로서의 공동체를 어떤 것으로 생각했으며 앞으로 그것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라는 점에 주목하면서 <동서양의 공동체 사상>을 함께 연구하고, 함께 토론하여 이 책 {공동체란 무엇인가}를 세상에 내놓는다.
이러한 공동 연구를 통해 이 책은 전통적인 가족 공동체가 위계적 조직으로서의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교환의 동등한 조건의 질서 또한 내포하고 있음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유가 전통의 공동체관에서는 인격에 대한 상호 존중과 배려의 질서로부터 출발하는 연대적 삶의 여러 가지 풍부한 가능성들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전통적인 공동체 개념을 대신할 수 있는 민주적 형태의 공동체 모형을 다양하게 제시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공동체의 모델들을 체계화할 수 있는 가능성의 근거도 찾아내고 있다.
새로운 형식 실험: 연구-토론-종합토론
한편 이 책은 특별한 형식 실험을 포함하고 있다. 개별 연구들이 제기하는 주제를 공동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논하는 토의의 기록이 그것이다. 즉 학자들의 논쟁이 늘 시간과 지면에 쫓겨 흐지부지 끝나 버리고 마는 현실을 타개할 방법으로 각각의 글에 대한 토론과 '공동체란 무엇인가'라는 대주제에 대한 토론을 녹취해서 함께 실은 것이다. 저자들 사이에서 오가는 팽팽한 긴장감과 입말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설전은 독자들에게 학문의 생동감이 어떠한 것인지를 느끼게 해 줄 것이며, 욕설과 고성을 내지르는 살풍경을 연출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의 주장을 공박하는 논전의 묘미를 안겨 줄 것이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는 이러한 새로운 방법은, 단지 형식 실험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식에 담길 내용까지도 색다르게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 개별 연구들에 대한 그리고 연구 전체를 총괄적으로 평가하는 토의의 기록들은 개별 연구로서는 미처 포착하기 어려운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내실 있게 실험하는 기회의 자리를 보여주리라 기대한다.
이 책의 주요 내용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의 공동체주의 자유주의 논쟁은 윤리적인 측면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공동체와 개인, 어디에 우선순위를 매길 것이냐로 대개의 논쟁이 결말을 맺었다. {공동체란 무엇인가}는 다섯 명의 학자들이 그 협소한 논쟁의 틀과 내용물을 새로이 짜고, 채운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공동체란 무엇인가}의 저자들은 공동체의 역사와 역사적인 공동체주의의 본연의 임무였던 이상적인 미래상의 제시를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지에 대해 글과 말을 쏟아 놓는다.
중국 사상을 대표하는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는 도가(道家)와 유가(儒家)에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문제를 적용한 김수중 교수는 전통 사회의 기본 단위였던 가족과 국가에 대한 각각의 윤리가 충돌되는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어느 것을 우선시하는가는 그 사회상의 반영이라고 말한다. 그는 명말의 신유학자였던 하심은이 기획한 공동체 '취화당'을 예로 들어 사심(私心)을 극복하고 공공성(公共性)을 실현하는 것이 유가 전통의 근본적 과제였음을 밝히며, 유가 전통에서 혈연 중시의 성격을 탈색시킨다면 전통 공동체는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줄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아시아의 공동체주의가 가부장적이고 온정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맞서고자 하는 이동희 박사는 중국과 동아시아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는 가족 공동체에서 인륜의 원리를 밝히고, 그 공동체들이 '미성숙'했으며 '주종의 관계'로 점철되어 있다고 한 헤겔의 비판은 인륜 개념이 갖는 '자발성'과 '상호 소통의 관계'를 고찰하지 못한 결과이며, 우리 자신도 그동안 부정적으로 생각해 왔던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재고가 절실하게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다.
공동체의 개념과 성격, 그 지향점을 논하는 자리에 과학이 개입한다? 과학과 공동체를 인식론적 관점에서 연계시킨 이봉재 교수는 근대 과학의 출현은 바로 바람직한 공동체의 원형이 존재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한다. 객관적인 지식의 총합인 과학이 어느 한 사람의 천재에 의해서만은 이룩할 수 없는 진보를 지속적으로 해 왔다는 사실은 과학 공동체 내에서의 의견 개진과 그에 대한 승인이 민주적으로 행해졌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그는 기억과 감정에 의해 유지되는 혈연 공동체의 문제점을 과학 공동체의 합리성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근대를 전통적 공동체의 와해 과정으로 고찰한 한승완 박사는 근대의 태생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맑스와 듀이의 공동체론을 비교한다. 그는 경제적 조건만을 고려한 맑스의 공동체론과 듀이 공동체론의 의사소통을 통한 의미 공유와 상보적 관계를 맺어 '공동체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으며, 에치오니의 '좋은 사회' 이론이 그러한 예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유로운 개인에 의해 구축된다는 근대 시장 경제 체제와 국가적 관료 행정이 개인의 일상을 지배하는 은밀한 폭력이라고 본 권용혁 교수는 자유주의의 보완으로서만 공동체주의를 말하는 서구 공동체주의자들의 한계를 지적하고, 철학적 정당성을 획득할 수 있는 공동체상으로 특정 공동체에서만 통용되는 폐쇄성이 아닌 개방성을 지닌 '의사소통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는 '의사소통 공동체'의 구성으로 자유주의의 세계화 전략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다.
{공동체란 무엇인가}에 실린 글들은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가 길항의 관계를 끝내고 사이좋게 공존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일단의 해답을 곳곳에 숨겨 놓고 있다. 눈 밝은 독자라면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는 순간의 희열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