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이어 신문에 오르내리는 대통령 친인척들의 정치 개입과 비리 사건은,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들의 권력 지향성과 권력자 주변의 수준을 알 수 있게 하는 일들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일들이 유독 이 정권에서만 벌어진 일은 것이다. 잠깐만 되돌아보아도 김영삼 정권의 김현철, 노태우 정권의 박철언, 금진호, 전두환 정권의 전씨 형제들과 처남들의 정치 개입과 비리 사건을 우리는 금세 기억해낼 수 있다. 역사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교훈을 주고 있었지만, 그러나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도 달라진 것 없이 비리와 부패는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우리 역사가 우리에게는 거울이 되지 못하고, 길이 되지 못하는 것일까?
그래서 젊은 역사학자 이덕일은 이 책에서 우리 역사에서 끊임없이 문젯거리가 되는 사건들을 우리 역사의 거울을 통해 바라보면서 그 해답의 일단을 구해보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잘못된 우리 국사 교과서의 문제
둘째, 시청자를 호도하는 사관 부재의 역사 드라마
셋째, 최고 권력자 친인척의 정치 개입과 비리 연루, 정권 창출 공신들의 전횡, 부정부패와 정경 유착 등 우리 역사를 망친 주요 코드들
넷째, 이러한 것들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 역사가 해 온 일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 민족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읽기
1453년 10월. 수양대군은 한명회·홍윤성 등을 주축으로 자신의 사병들을 앞세워, 김종서·황보인 등을 주살하고, 나아가 3년 뒤 단종의 왕위까지 가로채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 1979년 12월 12일. 이 날을 기점으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은 나라의 중요 권력을 무력으로 차지하고, 새로운 군사 독재 정권의 탄생을 눈앞에 두게 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 5월에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과 전두환의 12.12 쿠데타는 여러 가지 점에서 '우연의 일치'를 보인다. 수양의 주장과는 달리 김종서가 모반했다는 증거가 없는 것처럼 정승화 계엄 사령관이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증거도 없다. 수양은 계유정난 후 영의정과 이조, 병조판서, 중외병마도통사 등의 관직을 홀로 독차지했는데 이는 임금이란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 임금과 다름없었다. 이 또한 12·12쿠데타 후 보안사령관과 중정부장(현 국정원장)을 겸직해 온 나라의 정보를 독점하고 나아가 초헌법적인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은 전두환의 경우와도 같다. [……] 이런 것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시대의 고금을 떠나 정변으로 헌정 질서를 파괴한 정치 집단이 걷는 일반적인 길일 따름이다. 더 큰 문제는 헌정 파괴는 어김없이 특권층 형성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임금이 될 수 없는 사람이 임금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됐으니 공신 책봉이 없을 수 없었다. [……] 수양대군이 즉위한 후 46명의 좌익공신들이 책봉되고 이들이 요직을 차지하는데, 이 또한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한 후 노태우, 정호용 등의 공신들이 주요 공직을 나누어 가진 것과 유사하다. (이 책, 2장 「역사 드라마가 그리는 역사와 실제 역사」 중에서)
우리 역사는 고려 광종 때부터 종친들의 정사 관여를 금해 왔고, 교육 기관을 두어 종친들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그렇지만 임금의 친인척들이 정치에 휘말려드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몇 번이나 거친 혼란과 핏빛 살육전이 반복되곤 했었다. 임금의 종친, 즉 오늘날의 대통령 친인척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우리 조상들이 남긴 교훈들을 어느새 잊고 있음을 본다. 그래서 또다시 똑같은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종친에게 권력은 불가근불가원의 태양과 같은 존재였다. 너무 멀어지면 얼어죽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화상을 입는 그런 존재가 권력이었다. 궁중의 권력 투쟁에 종친들이 희생양이 되는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그 친인척들의 비리 연루가 끊이지 않는 우리나라는 역사의 비극이 때로는 반복되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 3장 「우리 역사를 망친 것들」 중에서)
역사는 여러 가지 사건과 상황들이 중첩되어 끊임없이 이어지며, 역사적 사실들은 단순한 과거의 화석이 아니라 현재를 읽게 하고 미래의 길을 열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역사는 일종의 시간을 초월한 대화의 장(場)이다. 그 장 안에서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순환한다. 우리 역사는 그 험난한 질곡 속에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겪어 왔으며, 그것들은 때론 묻히고, 때로는 심하게 왜곡된 채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런 우리나라의 오늘날의 모습은, 권력층의 각종 부정부패와 안팎으로 일어나는 각종 범죄 사건, 불안정한 국제 정세 등, 말 그대로 내우외환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현재와 미래를 살아갈 우리들이 올바른 방향을 읽어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시 한번 역사의 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곳에서 올바른 해답의 키워드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역사들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그리고 그 역사들이 일깨워 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냉정하게 검토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덕일의 이 책은, 이러한 역사의 역할과 그 전제되어야 하는 기본적 환경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역사,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였나?
지금은 무척이나 혼란한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이라 한다. IMF가 지나갔다고 떠들어도 우리의 삶의 질은 근본적으로 나아진 것도 없고, 연이은 비리와 정쟁에 사회는 몸살을 앓는다. 개혁, 개혁 하고 아무리 외쳐도 정작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렇게 정체되어 있기만 한다면 우리 역사는 퇴보할 뿐이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 제기와 현실적이고 제도적인 개혁 방안이 마련되어야 사회적 개혁이 그 실효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과거 역사의 장으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을 거쳐 온 만큼 그 역사 속에서 위기 돌파의 방법의 일단이라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우리 역사에서의 위기 극복의 문제들과 관련하여 '고려 말의 100년에 걸친 개혁 과정', '청문 제도의 문제', '인재 등용의 문제', '권력자와 언로(言路)의 문제', 그리고 '사헌부와 같은 감찰 기관의 역할' 등을 다루고 있다.
현재의 개혁은 고통을 받아야 할 사람들과 위안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서로 뒤바뀌어 있는 상황이다. [……] 이것이 대다수 민중들이 느끼고 있는 개혁의 실체다. (이 책, 4장 「우리 역사,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였나」 중에서)
국청은 사안의 중요성에 따라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흐지부지 넘어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어떤 외압도 불가능했다. [……] 국청은 지금의 사법부와 마찬가지로 증거주의로 진행됐는데 [……] 서로 말이 틀릴 경우에는 대질 심문도 했다. 기존의 청문회에서 우리는 증인들 사이에서 말이 달랐던 무수한 사례를 봐왔는데 이런 대질 심문도 우리의 청문회가 따라야 하는 제도적 장점일 것이다. (이 책, 4장 「우리 역사,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였나」 중에서)
사헌부는 직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불법이나 월권 사실이 발견되면 거침없이 탄핵했다. 이들은 원칙에 관한 한 어느 누구와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결코 물러서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국왕조차 탄핵했다. (이 책, 4장 「우리 역사, 어떻게 위기를 돌파하였나」 중에서)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자긍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선조들은, 그들의 인생을 겹쳐 쌓아 우리에게 역사라는 거대한 통로를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그들과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더 나은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역사의 가치이자, 우리가 역사를 사랑하는 방법이다. 이 책은 우리를 그 길로 안내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