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80년 만에 발굴된 최초의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 평전
광복 70주년을 맞아 항일투쟁가 부부의 평전이 나왔다. 한국인 남편 김찬(1911~1939)과 중국인 아내 도개손(1910~1939) 부부의 평전이다. 부부가 나란히 평전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세계적으로도『주은래 부부평전』 등 몇 건 뿐이다.
부부가 나란히 평전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두 사람의 항일투쟁이 대등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부인의 역량이 더 높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과 항일투쟁은 물론, 무엇보다 마지막 죽음까지 함께했기 때문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부부가 항일투쟁에 헌신한 경우는 많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같이한 경우는 없었다. 역사학자 이덕일도 “김찬·도개손의 삶이 다른 사회주의 혁명가 부부와 달랐던 점은 죽음까지 함께했다는 점”이라고 평가했다.
이 책에는 이들 부부뿐 아니라, 김찬의 여동생이자 또 다른 한·중 항일혁명가 부부인 김순경 부부(남편 장문열은 중국인 항일혁명가)와 ‘만주 항일투쟁사의 신화’로 불리던 항일혁명가 양림·이추악 부부도 함께 소개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항일 여(女) 영웅’으로 불리던 이추악 역시 일제의 고문과 악형에도 굴복하지 않자 결국 총살되었다. 특히 이 책에서는 김찬의 여동생 부부 김순경·장문열 역시 강생의 모략으로 모스크바에서 누명을 쓰고 함께 처형된 사실도 새롭게 밝혀냈다.
한국과 중국이 사랑으로 손 맞잡고 이뤄낸 새로운 항일운동의 역사
이 부부 평전의 또 다른 특징은 김찬은 조선인, 부인 도개손은 중국인이라는 점이다. 김찬은 평안북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이주했으나 혁명적 노동운동을 통해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다시 조선에 들어왔다. 1930년대 조선에서 노동운동가로서 그의 역할은 컸다. 하지만 일제에 검거돼 조봉암 등과 함께 신의주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김찬은 출감 후 중국인 부인 도개손을 만나 결혼했다. 부인 도개손은 중국 명문가 집안 출신으로 1930년대 북경대 최초의 이과계 여학생일 정도로 재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무명의 조선인 노동운동가를 사랑했다. 도개손은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아들(김연상)과 딸(소나)을 낳았다. 도개손은 조선인 남편을 버리면 살려주겠다는 마지막 제안을 망설임 없이 거부하고 남편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 중앙당교에서 도개손과 함께 학교를 다닌 강청(모택동의 부인)과 북경대 재학 시절 절친한 후배였던 탁림(등소평의 부인)을 비롯, 당시 연안에 살던 300명 가량의 중국 명문대 출신 엘리트 여성들은 후에 대부분 중국공산당 지도자들과 결혼했다. 그리고 모두 큰 영화를 누렸다. 오직 조선인 남자와 결혼했던 도개손만이 비극적이고 참혹한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 김찬·도개손 평전의 제목이『사랑할 때와 죽을 때』라고 정해진 것도 그 때문이다. 원래「사랑할 때와 죽을 때」는『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유명한 독일 태생의 반전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장편소설 이름이다. 출판사측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치열했던 러시아 전선을 배경으로 이뤄진 슬프고 아름다운 운명적 사랑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장편소설「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서 이 평전의 제목을 따왔다”고 설명했다.
김찬· 도개손 부부가 처형된 후 이들이 남긴 자녀들의 삶은 어떻게 흘러갔을까. 부모님의 생애를 글로 남기는 작업을 하며 이 책의 자료 다수를 제공한 아들 김연상은 역시 중국 땅에서 터전을 잡은 김찬의 둘째 형수, 이석경의 손에 맡겨져 십대가 될 때까지 큰어머니를 친어머니로 알고 자랐다. 딸 소나는 도개손의 큰언니 도위손의 손에 자랐다. 김찬·도개손 부부의 자녀들도 조선인과 중국인으로 헤어져 자란 것이다.
일제 하 [동아일보]에 연일 사진과 기사가 오르내리며 혁명적 노동운동을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한 김찬
현재 한국과 중국, 일본을 둘러싼 국제상황은 김찬, 도개손이 활동하던 1930년대 상황과 비슷하다. 지금도 일본 제국주의는 계속 부활을 노리고 있고, 한국과 중국은 이에 맞서고 있다. 김찬은 조국 조선의 독립을 위해, 도개손도 조국 중국을 지키기 위해 일본에 맞서 싸웠다. 80년 전 동북아 국제상황이 지금과 비슷하다는 것은 ‘역사는 바로 현재’라는 명제와 맞아 떨어진다.
김찬은 1930년대 혁명적 노동운동을 통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던 인물이다. 그는 코민테른 국제선 김단야와 함께 마지막까지 조선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김찬은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완전히 잊혀진 존재였다. 김찬이 활동 무대를 중국으로 옮긴 이유도 있지만 얄궂은 동명이인(김찬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본명 김락준)의 변절 때문이다.
김찬은 45일간 일제 경찰의 혹독한 고문을 견뎌냈다. 박헌영은 일제 경찰의 잔혹한 고문을 피해 미친 척을 했다. 제2차 공산당 사건의 강달영은 5일간 고문을 견디다 못해 자백하고 실제로 미쳐 버렸다. 조봉암은 손가락 마디를 잃어가며 20여 일 고문을 견뎠다.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은 17일 간 일제 고문을 견디다 못해 순국했다.
그러나 김찬은 일제 경찰의 고문을 무려 45일간 이겨냈다. 김찬을 고문했던 일제 경찰이 “다수의 사상범 중 검거 후 45일까지 범행을 부인한 인물은 김찬 외에는 유례가 없다”고 수기로 남길 정도였다.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 밝혀내지 못한 역사를 담다
이 평전에는 님 웨일즈의『아리랑』이 소화하지 못한 대목을 보충하는 의미도 있다. 사실 [아리랑]은 장지락의 구술만으로 저술된 것으로 적잖은 오류가 있다. 이후 많은 수정이 이뤄졌고, 후속 취재와 저술도 나왔지만 장지락의 최후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러나 이번 김찬·도개손 평전에서는 당시 연안의 상황과 강성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과정이 생생히 재연되고 있다. 특히 이 책을 통해 그들이 처형된 곳이 연안 정풍운동으로 지금의 옌안 북동쪽 안새현(安寨縣) 진무동(眞武洞) 마가구(馬家?) 계곡이라는 점이 처음 밝혀졌다.
10여 년간 계속된 저자의 꼼꼼한 취재를 통해 1930년대 조선 진남포와 경성, 그리고 중국 상해와 북경, 하얼빈을 넘나드는 모습과 상황이 생생히 그려진다. 광복 70주년을 80년 전 동북아 정세에 비추어 딱 맞아 떨어지는 책이다.
이 책은 1994년『민족일보 사장 조용수 평전』을 저술한 저자의 두 번째 평전이다. 조선과 중국 두 곳에서 자료를 수집한 저자는 ‘역사의 염장이’가 되는 심정으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저자는 “김찬의 기록을 찾는 작업은 마치 팔은 중국에, 다리는 조선에 떨어져 있던 김찬의 시신을 하나로 맞추는 심정이었다”면서 “이 평전이 그동안 중국과 조선에서 각자 떠돌던 김찬의 영혼이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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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으로 노예의 삶을 거부하고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되어 국내는 물론 중국 각지를 전전하며 일제에 맞섰던 삶이 어찌 허무하겠는가? 인생이란 한 사람이 추구했던 가치, 그리고 그 가치에 충실했던 삶의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북경대(北京大) 최초의 여성 이과대학생으로서 명가 후예였던 도개손이 수많은 중국 청년 대신 식민지의 청년 망명객을 인생의 반려자로 결정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비극의 길을 끝까지 함께 걸어갔던 것이 아니겠는가?
김찬이 걸었던 여정은 그야말로 대하소설로도 부족할 정도로 파란만장하다. 그리고 열정적 삶을 살았던 혁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랑도 있었다. 김찬·도개손의 삶이 다른 사회주의 혁명가 부부와 달랐던 점은 죽음까지도 함께 했다는 점이다. 그런 특이한 삶이었건만 지금까지 완벽하게 지워져 있었다. 어찌 김찬·도개손 뿐이겠는가? 그러나 김산이 연안에서 님 웨일스를 만났던 것이 행운의 신이 내밀었던 생전의 마지막 호의였다면 원희복 기자가 우연히 김찬·도개손 부부의 삶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역사의 신이 베푼 사후의 호의가 아닐까? 이렇게 김찬·도개손 부부의 삶은 우리 곁에 돌아왔다. 대지를 사랑했으되 대지에 버림받고, 이념을 사랑했으되 그 이념에 버림받았던, 그런 일생을 후인들이 다시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야 말로 그 어느 것도 버리지 않는 역사의 선물이 아니겠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 냉혹했던 시대를 온몸으로 맞서야 했던 김찬·도개손 부부의 삶에 위로를 보낸다.
_이덕일(역사학자,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