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추구한 ‘우상파괴자’이자 한국 청년들의 ‘사상의 은사’
리영희 선생 10주기 기념 대표선
평생을 ‘우상파괴자’이자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살았고, 한국 젊은이들의 ‘사상의 은사’로 존경받아온 리영희 선생의 타계 10주기 기념 선집 『생각하고 저항하는 이를 위하여』가 출간되었다. 선생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와 시민의 의식화로 자신이 쓴 글들의 수명이 거의 끝나간다고 말했다. 그러나 쓰인 지 수십년이 지난 현재에도 선생의 글들은 강한 울림과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진위를 알 수 없는 정보와 가짜뉴스가 범람하는 소위 ‘탈진실’의 시대에 거짓 권력과 우상의 황혼 속에서 열렬히 진실을 간구했던 선생의 글이 더욱 빛나는 이유다. 이에 리영희재단은 선생의 사유가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길 바라며 선생이 생전에 출간한 저서와 번역서 등 총 20여권, 7,500여면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에 담긴 350여편의 글들 중에서 22편의 ‘대표작’을 엄선해 이 선집을 기획했다. 선별의 기준은 세가지다. 첫째 리영희 사상의 줄기를 더듬어볼 수 있는 명실상부한 대표작, 둘째 발표 당시 엄청난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거나 지적 충격을 안겨주었던 문제작, 셋째 선생의 사유나 실천을 직접 접할 기회가 없었던 청년 세대가 새로이 읽고 공감할 만한 글이라는 기준에 의거했다. ‘리영희 사상’과 호흡하며 한 시대를 살아낸 세대에게는 여전히 그의 생각이 강력한 현실성을 갖는다는 사실을 환기하고, 동시에 질주하는 글로벌 자본주의 세계에서 좌절을 강요당하고 있는 2000년 이후 세대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근거와 부당한 현실에 저항할 자율적이고 비판적인 사고의 토대를 마련해줄 책이다.
사유의 중심에 한반도를 놓고
국제정치를 비평하다
1부에는 냉전의식에 녹아 있는 흑백논리의 선입견에서 깨어나 한반도를 사유의 중심에 놓고 국제정치를 바라본 5편의 글을 수록했다. 「광복 32주년의 반성」에서는 지속되는 일본의 망언을 허용하는 우리의 내적 근거를 적시한다. 해방 이후에도 수구・친일・기득권 세력이 ‘친미반공’이라는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한국현대사를 주도한 결과 “이 사회를 지배해온 유일한 가치관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반공주의”(40면)가 되었다는 지적이다. 1989년 방북 취재 계획을 세웠다는 이유로 구속당했다 풀려난 후 쓴 「국가보안법 없는 90년대를 위하여」에서 선생은 반공반북의 관습적 이데올로기의 폐기를 주장하며 사실상 수구기득권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기여해온 ‘국가보안법 전문(全文)의 대전제’를 날카롭게 검증한다.
「동북아지역의 평화질서 구축을 위한 제언」은 1990년대 초에 이미 북핵 문제가 동아시아 평화질서의 관건임을 간파한 선생의 탁견이 도드라지는 글이다. 이글이 발표된 1992년은 냉전 종식과 더불어 동북아 지역질서에도 변화가 이루어진 해였지만, 한반도에는 여전히 강화된 갈등구조가 존재하고 있었다. 북핵 문제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가 위협받고 있는 오늘날에도 이러한 상황은 현재진행형이다. 갈등을 해결할 한반도의 위치와 역할에 주목하면서 희망을 잃지 않는 한편, “최악에는 더욱 심각한 대결국면의 가능성마저도”(81면) 있다고 경고하는 선생의 냉정한 현실주의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북핵 문제에 대한 선생의 ‘총결산’인 「북한-미국 핵과 미사일 위기의 군사정치학」은 한반도에서 핵·미사일 위협의 역사적 전개를 추적한다. 한국과 해외의 독자에게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난 이성적 태도를 권하는 한편, 미국 대북 정책의 ‘책임불이행’ 문제를 거론하는 이 글의 주요 논점은 2019년 북·미 하노이회담 이후 급냉각된 남북평화 프로세스에서 미국이 보여준 태도를 다시금 성찰케 한다.
「통일의 도덕성」에서 선생은 자신이 희망하는 통일에 대한 전망을 펼친다. 그에게 통일은 물질적 풍요와 높은 도덕성이 함께하는 나라의 건설을 뜻한다. 자본주의를 따르는 남한의 물질적 생산력의 우월성 및 사회주의를 따르는 북한의 인간학적 공동이익 우선주의와 민족문화에 대한 강렬한 긍지를 지혜롭게 배합하는 방식을 선생은 기대한 것이다.
냉전시대의 어둑서니를 헤치고
세계관의 총체적 전환을 일으키다
2부는 한반도 지정학의 핵심 국가인 중국, 미국, 일본 및 베트남전쟁과 관련한 글을 모았다. 「대륙 중국에 대한 시각 조정」은 중공 정권의 정통성 문제, 모택동사상 등 중국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와 실상을 제시하면서 냉전의 흑백논리에서 벗어나 사유의 자유를 연습하자고 권유한 글이다. 중국을 ‘파멸’로 인식하는 냉전적 시각에 길들여진 당시 독자들에겐 세계관의 전환에서 비롯된 충격을 안겼던 글이기도 한 만큼 최근 고조되는 반중감정을 돌아보게 한다.
「베트남 35년전쟁의 총평가」에서도 선생은 베트남 사태에 대한 선입견을 배제하고 베트남 국민의 역사와 입장을 현실적으로 고려하자고 제안한다. 이에 입각해보면 베트남전쟁은 베트남국민의 민족해방과 분단된 민족의 재통일을 의미하며, 무력에 의한 흡수통일이라는 “그 종말의 형태에서보다 남베트남의 내부적 특수성·인과관계에서 더 많은 참된 교훈을 주는 전쟁이었다”(238면)라는 결론이다.
「다시 일본의 ‘교과서 문제’를 생각한다」에서는 일본의 교과서 문제를 일본이 전후세대에 취한 “조직적이고 장기적인 일대 ‘세뇌’정책”(260면)이라 규정한다. 이에 대한 우리의 대응이 극일의 이념과 행동강령을 제시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며, 해법은 남북 동포가 함께 어떻게 민족 주체적으로 평화적 생존양식을 형성할 것인가(272면)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이 글은 조선인 강제징용과 연관해 일본 기업의 자산 압류를 허용한 한국 대법원 판결 이후의 무역갈등으로 한·일 관계가 최악에 이른 현시점에도 참고할 만한 사유를 담고 있다.
미국 사회와 자본주의에 대한 종합 평가라 할 수 있는 「극단적 사유재산제, 광신적 반공주의, 군사국가」에서 선생은 미국이 앓고 있는 질병이 글의 제목에서 언급된 세가지 뿌리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흑인 빈민 비율이 백인의 25배란 수치가 말해주듯 고루 누릴 수 없는 물질적 풍요는 부도덕 내지 죄악이며, 이기주의와 물질 추구로 귀결되는 개인의 자유는 인간소외로 이어짐을 간파한다. 코로나19 사태에 대한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방식 및 조지 플로이드 사망으로 촉발된 반인종주의 시위를 지켜보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는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