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다섯 작가의 다섯 가지 시선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세계
우리가 듣고 싶은 이야기
젊은 독자들이 사랑하는 작가 5인의 시선을 담은 앤솔러지 『들어본 이야기』가 미디어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촘촘한 문장으로 단단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구축하는 구병모부터 한국문학의 묵직한 무게중심 권여선, 독창적인 색깔을 지닌 탁월한 이야기꾼 듀나, 세대와 시대를 사유하며 독자들을 늘 새로운 곳으로 이끄는 박솔뫼, 독보적인 한국소설의 최전선 한유주에 이르기까지 지금, 가장 주목받는 다섯 작가의 신작 소설이 수록되었다.
몸이라 불리는 기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세계
‘나’는 하나의 정체성에 고정되어 있는 존재인가. 나의 ‘몸’은 온전히 나의 것인가. 구병모, 권여선, 듀나, 박솔뫼, 한유주 다섯 명의 작가는 『들어본 이야기』를 통해 묻는다. ‘몸’을 구성하는 물리적·신체적 조건이 과연 ‘나’의 위치를 결정하고 대표할 수 있을지 작가들은 작품 속 여러 인물로 견고하게 그려낸다.
「소여」에는 나무와 태엽을 잘 엮어서 만든 ‘가라쿠리’라는 기계가 등장한다. 어느 날 서커스 단장이 가라쿠리 ‘소여’를 데려와 무대 위에 올린다. 외줄 위에서 위험한 곡예를 가뿐히 해내는 이 인조인간은 “한 번만 시범을 보여주어 입력을 가하면 허공에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최적의 값을 스스로 찾고 정확한 출력을 내놓는 몸”을 가진 반면 ‘나’는 한때 화려한 기량을 뽐냈으나 사고로 다리가 마비된 후 서커스단을 떠나지 못하고 공연 외의 살림을 도맡아 하는 사람이다. 무한한 몸이 보여주는 오차 없는 움직임과 결함 있는 몸이 가진 불안전한 욕망 사이에서 기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펄럭이는 종이 스기마쓰 성서」의 ‘나’는 “언젠가 했던 결심 같은 것이 몸이라는 기계 어딘가에 입력이 돼서 어떤 식의 작용으로 머릿속에 울리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며 몸의 경고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나’는 “밥을 드세요, 수영을 하세요”나 “저 사람을 피해 얼른 뛰어가, 너는 울면 안 돼”와 같이 위험을 알리는 신체적 시그널을 직시하며 일상을 보존해왔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의 대학원생 ‘오익’ 또한 입·출력이 가능한 몸에 작동 오류라도 발생한 듯 어느 날 갑자기 환청에 시달리게 된다. 오빠와 자신을 차별한 어머니를 비난하고, 오빠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며 오익을 책망하던 동생 오숙에게 급기야 의절을 당한 그는 “자신이 가까운 이에게 그런 분노를 심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며 “차라리 자신이 딸이었다면, 모든 걸 희생하고 차별받고 살아온 그런 존재였다면” 하고 억울해한다. 어떤 환청은 걱정과 연민, 환대로 느슨하게 연결되는가 하면(「펄럭이는 종이 스기마쓰 성서」) 어떤 환청은 분열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며 다음 페이지로 숨죽여 이동하게 한다(「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
일정 코드만 입력하면 연습 없이 인간을 능가하는 최첨단 노동력을 출력하는 로봇에 대한 모순된 시선도 불안과 강박이라는 옷을 입고도 끝없이 타인과의 연대를 시도하는 것도, 과거와 현재를 잇는 거대한 세계를 들여다보겠다는 익숙하고도 낯선 도전이자 변주다. 그건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 같기도 하고,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멋진 신세계 같기도 하다.
여성, 로봇……
다양한 존재 방식에 접속하고, ‘나’를 확장하기까지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타인을 접하고 여러 사회적 맥락을 통과한다. 그 과정에서 ‘나’를 나타내주는 기표들을 맞닥뜨리기도 하는데, 그때 우리는 여성과 남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비장애인과 장애인, 이성애와 동성애 등 어느 하나로 정의될 수 없다. 각기 다른 삶의 모습과 가치에 대한 존중과 이해를 요구하는 동시에 다양하게 존재하는 방식을 그려볼 수 있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어머니는 잠 못 이루고」에서 주인공의 어머니를 통해 전해지는 동생 오숙의 목소리는 강요된 노동 착취와 규제로 내적 분열을 일으키는 여성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가부장적 권력과 이성애 중심의 사회 구조에서 여성 문제는 환청과 같은 신체 이상 증세로 드러나면서 불안감과 불쾌감을 느끼게 된다.
「헤엄치는 밤」의 ‘우리’는 한밤중에 어둠을 뚫고 차를 운전해 카지노에 가고 생존 수영 강습을 받으려 하는 사람들이지만 언제고 몸의 제한속도를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우리에게서 멀어져 있던 신체”를 되찾기도 하지만 끝끝내 “각자의 신체와 멀어지”는 그들은 “삶을 필사적으로 유의미한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피로감에서 탈출한다. ‘우리’는 “신체의 속박에서 풀려났는지도” 모르고 지독한 삶의 “논리와 슬픔”으로부터 해방된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에서 구체적인 이름이 아닌, ‘우리’라는 호칭으로 개개인을 대신하는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대화하며 자신을 쓰고 지운다.
「돼지 먹이」는 존 매키트릭이 사건 의뢰를 받고 사라진 다이아몬드를 찾기 위해 종횡무진하는 이야기를 담은 사립 탐정물이다. 그는 전직 콘티넨털 뚱보 탐정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듯싶었으나 호텔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을 맞닥뜨린다. 숨 쉴 틈 없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사건사고들을 사립 탐정 존 매키트릭은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인간의 다양한 존재 방식이 ‘몸’에 어떻게 접속하고 확장하는지를 그려낸 『들어본 이야기』를 읽다 보면 문득 깨닫게 된다. 고유하고 보편적인 몸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의 몸은 현실에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끊임없이 분해되고 조립되고 해체되었다가 재구성되면서 지금의 ‘나’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우리 주변의 낯선 존재들, 내 안의 낯선 나. 그들이 온몸으로 발산하는 이야기들은 언제까지고 낯선 이야기여서는 안 된다. 관계의 접점을 기다리고 있는 이야기, 그리하여 이제는 ‘들어본 이야기’여야 한다. 듣고 읽는 하이브리드 소설 『들어본 이야기』는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었던 것들의 반대편에 있는 또 하나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줄 것이다. 새로운 세계에 첫발을 내디딘 우리에게 끝내 ‘들어본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오디오콘텐츠 플랫폼 팟빵에서 소설가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으로도 만날 수 있으니 책을 ‘읽고’ ‘듣는’ 기쁨을 함께 맛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