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산업혁명이 지금도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서 어린이들이 그때처럼 밤늦게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면 그걸 방치할 수만 있을까? 미국의 노예제도가 존속되어서 노예의 노동으로부터 부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면 진정 그것은 올바른 일인가? 다수의 우리는 주저함 없이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다행히 서로 존중받아야 하는 차이의 정체성, 개인의 권리, 공존과 균형의 가치를 존중하는 생태적 환경, 그리고 횡포에 저항하는 자유에 관해 우리는 학교 안팎에서 꾸준히 감수성을 키울 수 있었다. 많은 분들이 각자 속한 현장에서 여전히 누군가의 희생과 억압으로부터 뺏긴 자유와 저항을 놓고 치열하게 고민한다.
내가 일하고 연구하는 곳은 (또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현장이다. 나는 언어에 관한 차별과 불평등이 넘치고, 언어에 관한 문제적 상황이 사회구조적으로 재생산되는 관행을 주목한다. 이념화된 언어정책, 커다란 언어시험의 제도로부터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받는 곳을 주목한다.
이 책은 사회구조와 언어사용의 관계를 주목하면서 언어로부터 부여되고 부여하는 정체성 혹은 주체성에 관한 연구물의 모음집이다. 나는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활동하면서 학문후속세대를 양성하는데 공을 들였고 누구든 조금만 관심을 가진다면 가르치고 또 가르치면서 학술연구를 함께 해보자고 제안했다. 정체성은 내가 붙든 핵심 연구주제 중 하나였고 꽤 많은 연구문헌을 학계에 남겼다. 이 책은 그러한 정체성 연구문헌을 다시 바라보며 재편집한 것이다.
이 책에 나온 모든 연구물은 내가 빠짐없이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참여한 것이다. 공저자였던 지도학생이 조금이나마 주도성을 발휘하면 그(녀)가 1저자의 위치성을 갖게 했지만 모든 연구의 초벌 기획은 내 몫이었다. 여러 학술지에 게재하기 위해 만든 초벌 원고를 다시 모아서 해당 분야의 독자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전체 구성과 내용을 유연하게 조정했다. 학술지 원고로 옮겨지면서 가감된 내용으로부터 못내 아쉬운 부분도 있었기 때문에 초벌 원고로 작업을 다시 했다. 함께 일하고 고민한 제자들은 모두 떠났지만 나는 그들을 가르친 바로 그곳에서 함께 만든 문헌을 세상에 다시 보낸다. 코로나 사태 이후의 삶과 세상의 질서를 예측하기 힘들지만 어쩌면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과 대안적 상상력의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연구해온 정체성에 관한 학술문헌의 분량이 풍성했기 때문에 다양한 방식으로 재편집이 가능했다. 예를 들면, 초중등 교실의 학습자 정체성, 대학생 성인 학습자 정체성, 유학생 정체성, 교사 정체성, 학부모 정체성, 다문화가정 구성원/중도입국자녀 정체성으로 구분해도 좋았을 것이고 현장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보여준 구성이 아마도 관련 연구자와 교육자에게 가장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 책은 구조화된 사회의 모순을 정체성의 관점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대안적 혹은 자유주의적 가치를 전할 수 있는 언어정책, 교육법안, 평가활동, 문화 콘텐츠를 어떻게 제안할 것인지에 관해서는 지면을 크게 할애하지 않았다. 분명한 문제의식을 가질 때 대안과 대항의 방법론이 탄력을 받는다. 이 책을 통해 정체성에 관한 사회적 의식이 좀 더 첨예해졌으면 좋겠다.
좌파-우파 나누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흔히 사회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는 학자들을 좌파 지식인으로 부른다. 페다고지에 집중하면서 기존 체제에 보존주의적 입장을 가지는 분을 우파 지식인이라 부른다. 그와 같은 거친 이분법으로 보자면 나는 분명 좌파로도 우파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절충주의자이고 실용주의자이다. 좌와 우를 모두 다녀본 사람만이 진정한 절충주의자가 될 수 있다. 좌도 우도 선명하게 학습하지 않는 중도의 위치성은 그저 무채색의 중립주의일 뿐이다. 나는 언어의 기능적 속성을 믿으며 언어사회의 권력적 속성도 주목한다. 거대한 담론질서에 무력감을 느끼지만 행위적 주체성을 믿기도 한다. 이 책이 그러한 변증법적 상상력의 지적 토대가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