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죽었다. 신도 죽었다. 인생은 의미 없는 삶의 존속일 뿐이며, 인간은 거대한 조직의 일개 부품일 뿐이다. 유일한 탈출의 길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체험, 약물, 부조리, 광기와 같은 비이성적, 비합리적 판타지 세계에 있다.” 이와 같은 현대인의 참담한 결론은 어떻게 해서 내려지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 절망의 상태에서 기독교 신앙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프랜시스 쉐퍼는 포스트모던 정신에 대한 놀라운 선경지명으로 비극적 결말에 처한 20세기의 정신이 등장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고 현시대와 다가오는 미래를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올바른 목적과 희망이 어디에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현대인의 절망은 삶의 의미와 기준에 대한 통일된 해답을 포기한 데서 온다. 그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은 인간이 자신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음을 말해 주는 유일무이한 준거인 성경으로의 회귀이다.
자율적인 반항을 고집하였으나 지식과 인생에 대한 답을 발견하는 데 실패한 인간은 결국 비합리적 비약을 시도하였고 그마저 좌절함으로써 이제까지 인간이 갈망하던 것이 전혀 가능성이 없다는 절망에 처하게 되었다. 그 해답 없는 비이성 영역으로의 도피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혼란 없는 자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인간에게 말씀해 주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불변의 참된 진리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중세로부터 현대에 이르는 서구 문예와 철학 사상을
분석하여 진단한 현대인의 절망의 원인과 해법
20세기 복음주의 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세계적 지성, 프랜시스 쉐퍼는 <이성에서의 도피>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은총과 자연에 대한 논의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으로부터 격리되는 과정을 예리하게 파헤침으로써 현대의 불안과 목적 없는 공허함의 근본적인 원인을 밝히고 있다.
인간은 이분법적 관점으로 자율을 추구하면서 절대적 준거점과 통일된 세계관을 상실하였고 다양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지식과 인생에 대한 답을 구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에는 이성과 지식으로부터 단절된 진리를 얻기 위해 비합리적 비약을 하는 헛된 노력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그마저도 허사가 되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도 답해 주지 않는 상황에 떨어지면서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비참한 상태에 대해 쉐퍼가 제시한 해답은 현대인들이 손놓아 버린 인생과 세계에 대한 통일된 답을 최종 권위인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전인적 존재이기에 유한한 창조 세계와 역사에 관한 진리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고 그것을 근거 삼아 삶에 대한 통일된 해답을 찾고 합리성을 회복할 수 있다.
기독교는 검증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의 도약’에 근거하는, 일단의 전달 불가능한 모호한 체험이 아니다. 신자로서의 삶이 시작되는 회심도 성화의 과정에서 성장하는 영성도 결코 도약이 아니다. 이 두 경험 모두 살아 계신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절대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 거기서 인간은 마땅히 스스로 해야 할 일, 자기 자신에게서 시작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으며 인생과 세상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해 놓으신 하나님과 세상과 역사에 대한 참된 진리로 돌아가 거기에 순복함으로써 인간은 부조리와 절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므로 절망의 위기에 처한 현대인들은 모든 사고와 사물에 대하여 참된 것을 말해 주는 성경 말씀으로 복귀하여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거기에 나타난 가치관을 총체적으로 수긍하고 시인하며, 그 기독교적 절대 기준을 따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한다.
쉐퍼의 <이성에서의 도피>는 성경으로의 회귀가 우리가 가야 할 유일한 길임을 시대별 문예 사조와 문화 현상을 통해 흥미로우면서도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20세기를 지나 여전히 상대주의적인 세계관의 지배 아래 있는 우리에게 변하는 세계에서도 불변의 진리를 따라 살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보여준다.
화보목록
『예수님의 세례』, 얀 반 에이크 作.
『재상 롤랭의 마돈나』, 얀 반 에이크 作.
산타마리아델카르미네 성당 브란카치 예배당의 왼쪽 벽면 프레스코화.
산타마리아델카르미네 성당 브란카치 예배당의 오른쪽 벽면 프레스코화.
『두 천사와 함께 있는 성모자』, 프라 필리포 리피 作.
『아테네 학당』, 라파엘로 作.
『성체에 관한 논의』, 라파엘로 作.
칼빈의 『기독교 강요』 1536년판 속표지.
칼빈의 『기독교 강요』 1559년 결정판 속표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죽음』,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作.
『베아트리체와 마주친 단테』, 헨리 홀리데이 作.
기호 논리학의 대가, 앨프레드 로스 화이트헤드.
원자폭탄 개발 계획에 참여했던 이론 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의 신기관』 1645년판 속표지.
프랜시스 베이컨의 『학문의 신기관』 1762년판 속표지.
『프랜시스 베이컨』, 파울루스 반 소머 作.
『장-자크 루소』, 앨런 램지 作.
‘사디즘’이라는 용어를 낳은 프랑스의 작가이자 사상가, 사드 후작.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야코프 슐레징어 作.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제창한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장-폴 사르트르.
독일 실존 철학의 대표자, 카를 야스퍼스.
실존주의적 존재론을 전개한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불린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 앙드레 말로.
피카소의 첫 번째 부인, 올가 코클로바.
『안락의자에 앉은 올가』, 파블로 피카소 作.
1963년에 발매된 『교향곡 3번, 카디시』의 커버.
레너드 번스타인, 1964년 『교향곡 3번, 카디시』 미국 초연 사진.
『침묵』 촬영장에서 아역 배우 요르겐 린드스트룀과 한때를 보내는 잉마르 베리만 감독.
1963년 영화 『침묵』의 스웨덴 첫 상영일 풍경.
‘불가지론’이라는 말을 만들어 낸 영국의 생물학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
『정의는 백성을 영화롭게 한다』, 폴 로버트 作.
『사도 바울의 회심』,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