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와 영국에서 있었던 두 건의 결투 사례를 수록했다. 먼저 14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자크 르 그리와 장 드 카루주의 결투는 승자의 주장을 정의로 결정하는 결투 재판이었다. 장 드 카루주는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성폭행 당하는 일을 겪는다. 범인은 친구이자 같은 주군을 모시는 자크 르 그리, 그러나 그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하고, 재판은 양측의 팽팽한 공방으로 장기간 난항을 겪는다. 결국 진실은 결투를 통한 재판으로 가리는 것으로 결정된다. 이 사건은 프랑스의 마지막 결투 재판으로 알려져 있다. 두번째 호키 중위와 시튼 대령의 결투는 재판이 아닌 개인간 결정으로 이루어진 결과다. 호키 중위는 자신의 아내와 시튼 대령이 불륜 관계라는 소문을 듣고 시튼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이 역시 영국의 마지막 결투라는 의미가 있는데, 사실 사적인 결투는 법으로 금지된 이후에도 암암리에 자행되어 마지막을 특정하기가 어렵다. 다만 호키 중위와 시튼 대령의 결투는 영국에서 영국인끼리 벌인 마지막 결투로 알려져 있고, 이를 계기로 결투를 금지하는 법안이 논의됐다고 한다.
<책 속에서>
이 무렵 프랑스에선 파리에서 예정된 생사를 건 결투에 대해 많은 얘기가 오갔다. 이 결투는 일년 간 계속돼온 재판 즉 피에르 달랑송 백작의 봉신으로서 백작의 신의를 받고 있던 두 인물, 자크 르 그리와 장 드 카루주 간에 벌어진 재판에 따라 파리 의회가 결정한 것이다. 다만 백작은 자크 르 그리를 누구보다 아꼈고, 전적으로 신뢰했다. 이 결투가 워낙 떠들썩해서 멀리서도 소식을 듣고 구경하기 위해 파리로 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당시 알려진 이 일의 원인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자크 르 그리 vs 장 드 카루주」 중에서
그러나 포츠머스 일대의 명사와 미인들이 모여서 악단의 연주를 음미하면서 입욕을 하고 스캔들과 패션에 대해 대화를 나누며 신문을 읽던 곳은 해변에 자리잡은 비좁고 갑갑한 사교장이었다.
1845년경 이런 사교장의 단조로운 흐름을 깬 것은 알렉산더 시튼 대령의 도착이었다. 시튼은 제11용기병대 소속이었고, 당시는 해군, 해병대, 전열보병연대의 장교들이 사교장의 단골을 이루고 있었다. 이중에서 건장하고 부유한 28세의 잘생긴 기병 장교의 출현은 일대 사건이었다. 유부남이면서도 이 용감한 기병은 사랑꾼임을 입증했고, 거듭되는 무도회에서 연달아 성공을 거두었다.
시튼 대령은 자신의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는 많은 기회를 얻었다. 그에게 가장 강한 인상을 준 여성은 호키 부인 그러니까 “최고 매력남”으로 일컬어지던 해병대 소속 호키 중위의 아내였다. 「호키 중위 vs 시튼 대령」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