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넘어서는 희망 (양 치릴로 신부의 ‘천주교 생사관 강의록’ 유고집) -김훈 소설 「저만치 혼자서」의 모티브가 된 양종인 치릴로 신부의 생사관 강의록 -마흔 살, 세상을 떠난 ‘대희년의 사제’가 남긴 삶과 죽음에 관한 따뜻한 성찰
“인간에게 궁극적인 문제는 ‘어떻게 하면 죽음을 모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양치릴로 신부)
“병고에 시달리던 이 젊은 신부가 죽음이 임박한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보살피는 성무(聖務)로 자기 자신의 죽음을 감당해나가던 마지막 날들을 보여주면서, 삶과 죽음을 장난처럼 가볍게 여겨서 재미없는 놀이를 집어치우듯이 자살하는 세태를 향해서 일상적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다.” (김훈, 소설가)
저자인 양종인 치릴로 신부는 2012년 마흔 살의 나이로 선종했다. 그는 2000년 대희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후 선종할 때까지 12년의 사목 기간 중 7년을 의정부교구 상장례학교를 맡아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들을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는 역할을 맡아왔다. 고등학교 시절 폐결핵을 앓은 이후 평생을 각종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무던하게 자기 일상을 충실히 살았던 양 신부는 세상을 떠난 당일 오전에도 부산에 일정이 있다며 지팡이를 짚고, 사제관을 나섰던 ‘일상의 수호자’였다. 양 치릴로 신부는 짧은 생애 동안 4권의 두꺼운 책자를 남겼다. ‘예비신자 교리교안’ ‘영성사’ ‘성사론 강의록’과 이 책 ‘천주교 생사관 강의록’이다. 앞의 세 책은 철저하게 천주교 신앙서로 천주교 신자가 아니면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반면, 이 책 ‘천주교 생사관 강의록’은 교인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쓰였다는 게 특징이다.
□죽음을 화두로 삶을 이야기하다
이 책은 가톨릭교회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삶과 죽음의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먼저 인간은 왜 체험하지 못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의 이유를 구약의 원죄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즉 죽음이 인간에게 죄에 대한 벌로써 내려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벌이란 두려운 것이므로 인간은 그 막연한 벌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인간은 죽음을 극복하게 되었고, 죽음을 넘어서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적 관점에서 왜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인지를 설명하면서, 그리하여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삶의 태도와 존엄한 죽음을 통해 좋은 죽음에 이르는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인 죽음의 장면을 여는 장으로는 가톨릭교회에서 가장 성스러운 죽음으로 보는 순교자들의 죽음관부터 살핀다. 그러나 이 장은 죽음이 아니라 순교자들의 삶을 그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데에 집중한다. 이후 현대인의 죽음 중 논쟁적인 죽음, 즉 자살·안락사·낙태·뇌사 및 장기기증 등의 각 장면을 살핀다. 특히 가톨릭교회에서 죄로 인정하는 자살·안락사·낙태에 대해서는 죄라는 것을 밝히면서도 그런 죽음의 이면으로 한 발 더 들어간다. 이런 죽음으로 내몰리는 상황과 사람들에 대해서도 다루며 사회적이고 상황적인 측면도 논한다. 또한 그 예방을 위한 제안과 함께 그와 같은 죽음에 관련된 사람들의 영혼을 위한 교회의 포용에 대해서도 사목적 제안을 한다. 사별가족에 대한 배려 편에서는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으로 힘겨운 사람들을 위로하는 방법에 대한 여러 시도와 실험, 그리고 효과 등을 살피며 배려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도 살핀다. 마지막으로 존엄사 편에서는 단순한 연명 치료가 존엄한 죽음을 방해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우리사회가 평화롭고 존엄한 죽음을 맞는 환경을 만드는 데에 힘써야 한다는 점을 역설한다.
전반적으로 문체는 편안하고, 관점은 따뜻해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사색하고 관조하게 하는 힘이 있다. 이 책은 평생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병과 다투지 않고, 자신의 삶과 육체를 소중히 여기며, 죽음의 문제를 관조하고 사색한 젊은 신부의 담담한 기록으로 여타의 가톨릭 생사관과는 다른 차별성이 있다. 또한 가톨릭 교리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어 비종교인이라 하더라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다.
■김훈 소설 '저만치 혼자서'의 모티브가 된 강의록 "나는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을 인간의 영혼 안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삶과 죽음 사이에 다리를 놓고, 그 다리를 건너가서 죽음의 저편에 신생(新生)을 건설하는 젊은 사제의 모습을 떠올렸고, 그 환영을 글로 쓰려는 충동을 느꼈다." (김훈, 소설가)
[천주교 생사학 강의록]은 상장례학교장이었던 치릴로 신부가 교육용으로 썼던 강의록이다. 이 책자는 A4용지로 프린트되어 제본된 책자 형태로 남아 있다. 소설가 김훈 작가는 이 책자를 구해 보고, 치릴로 신부의 생애를 그의 친구를 통해 들으면서 단편소설 '저만치 혼자서'(2014, 문학동네 여름호)를 집필했다고 밝혔다. 치릴로 신부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젊은 사제의 이미지로 채용했다고 한다. 또한 이 책에 서문을 직접 써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