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문화의 변방을 비척거리던 좀비가 뱀파이어와 늑대인간으로 대표되는 언데드 계의 강자들을 물리치고 문학, 영화, 만화, 게임 등 문화 콘텐츠를 장악하고 있다. 좀비가 이렇게 약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언제나 떼로 몰려다니는―개체를 구별하기도 힘들고 애써 그러고 싶지도 않은―이 무뇌의 존재들이 뱀파이어의 “차가운 도도함”이나 늑대인간의 “야성적 터프함”을 압도할 만큼 매력적인가? "좀비 연대기"는 이런 질문에서 출발한다. 좀비의 새벽을 여는 초기 단편들과 고전 중에서 이 언데드의 흥미로운 자취를 짚어본다. 뱀파이어, 늑대인간, 부활한 미라가 현실이 아니라 판타지 세계의 거주자라는데 이견을 제기하거나 고민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좀비의 고향 아이티(Haiti)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아이티 정부에서 오랜 기간 수집한 방대한 파일에도 좀비의 실제 사례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아이티 형법(249조)에는 좀비로 만드는 “좀비화”를 살인 행위로 간주하고 금지하는 조항이 있을 정도다. 그렇다보니 좀비는 아이티에서 판타지가 아니라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다. 좀비 연대기를 시작하는 작품으로 아이티를 배경으로 한 「수수 밭에서 일하는 시체들」과 「투셀의 창백한 신부」만한 작품이 없을 것이다. 두 단편은 독립적인 작품이 아니라 윌리엄 시브룩의 『마법의 섬The Magic Island』(1929) 일부인데, 좀비 관련 선집이나 역사를 말할 때 빈번하게 수록되고 있다. 이 책은 영어권에 “좀비zombie”라는 단어를 들여온 최초의 작품일 뿐 아니라 역시 최초의 본격 좀비 영화라고 할 수 있는 「화이트 좀비White Zombie」(1932)에 영감을 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수수 밭에서 일하는 시체들」에서 화자는 아이티를 방문하고 알게 된 플리니스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다. 늑대인간, 뱀파이어를 주제로 하다가 불현듯 화자는 아이티에서 처음 접한 단어 "좀비"에 대해 물어본다. 뜻밖에도 지적이고 총명한 폴리니스는 좀비가 실생활에 존재한다고 말하고 그 일례를 소개한다. 그래도 믿지 못하는 화자. 그런데 그 자신이 직접 좀비들을 목격하는 상황에 처하고... <책 속에서> 아리따운 혼혈인 줄리는 마리안을 침대에 눕혔다. 콩스탕 폴리니스와 나는 그의 집 문 앞에 늦게까지 앉아서 불 마녀와 악마, 늑대인간과 뱀파이어를 화제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천히 떠오르는 보름달이 폴리니스의 경사진 목화밭과 그 너머 어두운 언덕을 환히 비추었다. 폴리니스는 아이티의 농부였지만, 평범한 밀림의 촌부는 아니었다. 그가 살고 있는 고나브 섬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는 아이티 본토에 가는 일이 거의 없으면서도 포르토프랭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훤히 꿰고 있었다. 그래서 때때로 그곳에 준비 중이라는 라디오 방송을 화제에 올리기도 했다. 폴리니스는 농부로 태어나고 자란 시골사람이라, 산간지역과 평지에 전해지는 온갖 미신에 익숙했지만 그런 것을 곧이곧대로 믿기에는 퍽 지적인 사람이었다. 적어도 내가 그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했을 때는 그렇다.
미국의 탐험가, 여행가, 오컬티스트, 저널리스트. 1차 세계대전 참전 이후 《뉴욕 타임스》 리포터로 활동하기도 했고, 저술 활동을 하면서 《코스모폴리탄》, 《리더스 다이제스트 》, 《배너티 페어》 등의 유명 잡지에 글을 썼다. 1924년 아라비아를 여행하고 쓴 『아라비아 모험』의 성공에 힘입어 1927년에는 아이티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아이티 부두교에 큰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결과로 ‘좀비’ 개념을 서구에 소개한 최초의 영어권 저서 『마법의 섬The Magic Island』을 출간했다. 1930년에는 서아프리카를 다녀오고 여행서 『정글의 길』을 발표하는데, 여기서 어느 식인 부족을 만나 식인 경험을 했다고 밝혀 그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세 번의 결혼과 이혼에 이어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으로 힘겹게 생활했다고 한다. 1945년에 뉴욕에서 약물과다복용으로 자살했다. 또 다른 저서로 『마법: 오늘날의 그 영향력』, 『닥터 우드: 실험실의 현대적 마법사』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