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를 위한 장미 : 윌리엄 포크너 고딕 소설 단편선 | 아라한 호러 서클 125 : 윌리엄 포크너 고딕 소설 단편선 | 아라한 호러 서클 125
작품 정보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모더니즘의 핵심 작가이자 미국 현대 문학에 큰 족적을 남긴 문호다. 특히 미국 고유의 남부 고딕에서도 대표적인 작가로 통한다. 남부 고딕은 미국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시작된 남부 상류층의 몰락상과 고딕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장르다. 몰락과 퇴락의 길에서도 남부 백인 귀족들이 집착하는 붕괴된 이상과 가치를 통해 인종, 계급, 젠더 차별과 폭력 등 사회․문화적인 문제가 부각되는 반면에 고딕 소설의 일반적인 서스펜스와 공포는 희석되는 특징이 있다. 이번 『윌리엄 포크너 고딕소설 단편선』에 수록된 세편 「에밀리를 위한 장미」, 「사냥개」, 「가문 9월」은 포크너의 남부 고딕을 잘 반영하는 동시에 고딕 소설의 공포와 서스펜스까지 상당부분 유지하는 단편들이다. 「에밀리를 위한 장미」(1930)는 포크너에게 작가적 명성을 안겨주고 지금까지 많은 앤솔러지에 수록되고 있는 대표 단편 중에 하나다. 배경은 포크너가 창조한 가상공간 요크나파토파 카운티(Yoknapatawpha County)의 행정중심지인 제퍼슨. 1920년대 남부의 몰락한 “그리어슨” 가문의 에밀리는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아버지의 사망 이후 마을의 “전통이고 의무고 근심”으로 존재한다. 이런 에밀리가 마을 사람들의 눈에 결혼을 앞둔 시점부터 은둔자처럼 집에서 두문불출한다. 에밀리가 죽고 난 후에야 이 금단의 집에 은폐된 엄청난 비밀이 밝혀지는데……. 감추는 방식으로 드러내는 “살인”과 “네크로필리아”는 독자에게 고딕 소설 특유의 충격적인 자각을 선사한다. <책 속에서> 미스 에밀리 그리어슨이 죽었을 때, 우리 마을 사람 모두가 그녀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남자들은 무너진 기념물에 대한 경의어린 애정 같은 감정을, 여자들은 대부분 호기심 그러니까 정원사 겸 요리사를 겸한 늙은 남자 하인을 제외하곤 적어도 10년 동안은 아무도 들어가 보지 못한 그 집의 내부를 보고픈 호기심을 품었다. 그 집은 한때 흰색이었던 크고 정사각형에 가까운 목조 주택인데, 1870년대의 아주 우아한 양식으로 둥근 지붕이며 첨탑이며 소용돌이무늬의 발코니를 꾸며 예전에는 가장 세련됐던 상류층 거리에 세워졌다. 그러나 차량 정비소와 조면기들이 이웃의 존엄한 이름들마저 침해하고 지워버렸다. 오로지 미스 에밀리의 주택만이 면화를 운반하는 마차와 가솔린펌프 위로 완고하고도 교태 섞인 퇴락의 모습을 치켜들고 남아 있으니 흉물도 이런 흉물이 없었다. 이제 미스 에밀리도 제퍼슨(포크너가 창조한 가상공간인 요크나파토파 카운티의 행정중심지―옮긴이) 전투에서 전사한 뒤 늘어선 북군과 남군 무명 병사들의 무덤 사이, 삼나무로 물든 묘지에 누워 있는 그 존엄한 이름들의 대표자로 합류하게 됐다. 생전에 미스 에밀리는 전통이었고 의무였으며 근심이었다. 1894년 시장이었던 사토리스 대령―흑인 여자는 앞치마를 두르지 않으면 거리에 나올 수 없다는 조례를 발의한 인물―이 그녀의 부친이 사망한 날로부터 영구적으로 효력을 지닌 특별허가를 통해 그녀의 세금을 감면한 날로부터 이 마을에 전해져 내려오는 의무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고 미스 에밀리가 그런 특혜를 선뜻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사토리스 대령은 미스 에밀리의 부친이 마을에 사업상 돈을 빌려주었다는 취지의 얘기를 날조해냈고, 그런 방식으로 마을의 부채를 상환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사토리스 대령과 같은 세대, 같은 생각을 지닌 사람들만이 그런 얘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고 여자들만이 그런 얘기를 믿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