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 한국사상선 제3권 『김시습·서경덕: 조선사상의 새 지평』은 조선 초기 성리학의 두 대가 김시습과 서경덕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책이다. 세간에 ‘조선의 신동’ ‘『금오신화』의 작가’로 언급되는 김시습은 비단 탁월한 작가로서만이 아니라 당대의 문제적 사상가로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호사가들로부터 ‘황진이의 스승’으로 불리거나 ‘칩거한 천재’로만 분류되곤 하는 서경덕은 사실 자연철학에서 일가를 이루며 조선사상사의 새 지평을 연 철학자였다. 김시습, 서경덕은 서로 닮은꼴이다. 둘 다 무인 집안 출신에 “평생 벼슬을 하지 않았고 가난했으며 물욕이 없었다”.(14면) 다만 김시습이 떠돌아다니며 살았던 것에 비해 서경덕은 개성의 화담에서만 지냈다. 이 같은 정주(定住)와 비정주(非定住)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일까. 김시습이 불교와 유교를 넘나들었다면 서경덕은 일생 내내 기(氣)철학에 몰두했다. 두 인물의 닮은 듯하면서 판이한 면모를 비교해가며 읽는다면 이 책의 묘미가 한층 더해질 것이다. 종횡무진 사상의 경계를 넓혀간 두 사람의 천재, 김시습과 서경덕
김시습이 어린 시절 신동으로 회자된 것은 유명하다. 당시의 국왕 세종이 그 소문을 듣고 승정원 승지를 시켜 김시습의 글쓰기 재능을 시험해봤다. 역시나 세종 또한 그 재능에 탄복해 찬사를 보내는데, 이때의 경험을 통해 김시습은 여생 내내 “세종에 대한 의리”(16면)를 품고 산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왕위에서 끌어내리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격렬히 통곡하고 이후 8년간 방랑의 길을 떠난 이유도 그런 세종의 은혜를 되새겼기 때문이다. 8년간의 방랑기 동안 김시습은 백성들의 처참한 현실을 목격한다. 이는 그가 국가와 인민에 대한 정치사상에 관한 글을 쓰고 민본적 철학을 개진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민본적 철저성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래의 김시습의 실존에서 기인한다.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 이후 체제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체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체제의 안과 밖 사이의 ‘경계’에서 체제를 비판적으로 조망했다. 그 결과 인민과 군주와 국가에 대한 이런 통찰이 나올 수 있었다.”(20면) 또한 김시습은 유교뿐 아니라 불교와 도교에 관해서도 탐독하며 종횡무진 자기 사상의 경계를 넓혀갔다. 그러고는 경주 금오산으로 가서 8년간 지낸 뒤(『금오신화』를 지은 것도 이때의 일이다) 서울 수락산 기슭에서 지내며 『십현담요해』 『화엄석제』 등 불교 관련 책을 짓고 그 뒤로는 관동(강원도 양양 등지)에 가서 남은 생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