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문화, 정치철학, 문화이론을 넘나드는 영역에서 돋보이는 시각과 무게감 있는 연구를 선보여온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김항 교수의 신작 연구서 『어떤 패배의 기록: 전후 일본의 비평, 민주주의, 혁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15년에 나온 『제국일본의 사상』의 후속으로, 전후 일본 사상사를 ‘비평’ ‘민주주의’ ‘혁명’ 세가지로 분절하여 해석한 연구성과를 모은 것이다. 각각의 키워드를 통해 저자가 탐색하는 전후 일본의 모습은 ‘패배’라는 말로 요약된다. 전후민주주의 체제가 표면적으로 추구해온 보편주의는 2차대전 패전 이전의 식민주의를 극복하지 못한 한계 내에 머물렀다는 것이 요지다. 전후 80년간 일본 문화의 현상과 기저를 탐색해온 비평가들도, 일본을 동아시아의 평화국가로 만들고자 했던 평화주의자들도, 누구보다 급진적으로 일본을 바꿔놓으려 했던 혁명가들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보편주의와 식민주의의 미로에서 길을 잃었다. 2011년 도호쿠 대지진 이후 좌우를 막론하고 ‘하나의 일본’을 만들고자 나서는 움직임은 강화되었지만 그럴수록 사회에 내재한 식민주의는 은폐되어가고, 보편적 가치를 내세우는 목소리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역부족인 상태에 머물렀다. 그것이 개헌을 저지하고 평화를 만들어내는 데 천황제가 동원되어야만 하는, 일본 정치에 있어서 일종의 패배를 불러왔다고 저자는 보는 것이다. 전후 일본에 내재한 식민주의를 감지하지 못하다 고바야시 히데오와 가라타니 고진의 비평 1부 ‘비평’에 묶인 두편의 글은 전후를 대표하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비평 작업을 비판적으로 고찰했다. 패전 이전에 주로 활동한 ‘근대 일본 문학비평계의 전설’ 고바야시 히데오는 일본의 정체성을 문화적 전통이 아니라 일상의 생활 수행 속에서 찾았다. 그리고 전쟁 시기 임박한 죽음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생활자에게서 궁극의 일본인을 발견했다. 그러나 고바야시의 시선은 역설적으로 일본 본토가 아니라 변방으로 향했다. 식민지와 변방에서 임박한 죽음을 절대적 사실로 묵묵히 받아들이는 궁극의 일본인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죽음의 정치적 의미는 끝내 추궁하지 못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즉, 강요된 죽음을 수긍하는 것만이 정치적 실존의 유일한 길로 만들었던 식민주의의 비밀에는 끝내 다가갈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패전과 함께 모든 것은 망각의 늪으로 빠져버렸다. 전후 일본은 이렇게 시작했다. 2장은 오늘날 가장 잘 알려진 일본 비평가이자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의 1970년대 연재작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을 실마리 삼아 전후 일본 비평의 임계점을 고찰한다. 가라타니 고진은 일본 신좌파가 ‘연합적군 사건’(1972)으로 몰락한 후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고 평가받은 바로 그 시점에 마르크스론 연재를 시작했다. 그의 의도는 마르크스 읽기의 가치가 끝나지 않았음을 말하는 동시에 기존 일본 마르크스주의의 마르크스 독해가 교조적이었음을 비판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것이 전후 일본 비평의 한 정점이자 일본 비평을 근본적으로 성찰한 성과였다고 평가하면서도, 가라타니의 기획 역시 청산되지 못한 식민주의라는 한계 내에 머물렀다고 비판한다. 식민주의에 대한 성찰은 있을지언정 보편주의와 연루한 식민주의를 내재했던 전후민주주의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