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있다. 예컨대 휴대폰 외판원에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떠오른 폴 포츠라는 인물이 있다. 보통 사람들 중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을 선발하는 영국의 텔레비전 프로그램 ‘브리튼스 갓 탤런트’에서 폴 포츠는 아리아 ‘공주는 잠 못 이루고(네순도르마·Nessun Dorma:아무도 잠들지 말라)’ 아리아를 열창, 인상 깊은 가창력으로 감동의 드라마를 선사했기 때문이다. 폴 포츠는 ‘내순도르마’ 단 한 곡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됐다. 흥미롭게도 이후 세계적으로 이런 ‘브리튼스 갓 탤런트’류와 유사한 오디션 프로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우리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체널마다 오디션프로' 현재 상종가를 치고 있는 방송가에서 수 많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등장은 이 시기와 맞물려 있다고 봐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단순히 보조 프로그램의 역할이었지만 이제는 메인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이 되어 대중들에게 존재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 첫 단추가 아마 '나는 가수다'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기억 된다. 작금의 '나는 ~다'류의 신조어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흐름 역시 이와 무관치 않다. 최근 정치적인 이슈와 맞물려 풍자와 해학성을 가미한 패러디물의 등장도 그 연장선에 있다. 알다시피 '나는 꼼수다'라는 신조어 역시 '나는 가수다'의 패러디물이다.
사실 '나는 ~다' 했을 때 언뜻보면 신념있고 당당해 보인다. 조선시대 4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심금을 울리는 명문을 썼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선생의 한시에 신념과 지조에 관련된 이런 구절이 있다. ‘동천년노 항장곡(桐千年老 恒藏曲)이요, 매일생한 불매향(梅一生寒 不賣香)이라. 월도천휴 여본질(月到千虧 餘本質)이요, 유경백별 우신지(柳經百別 又新枝)라’라는 한시가 그것이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되어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 있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버드나무는 100번 꺾여도 새 가지가 올라 온다’는 뜻이다.
선비정신이 묻어나 있다. 현실을 어떠한가? 권력과 재물의 크기에 따라 재단되고 있는 보편적인 가치들이 사멸되어 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눈으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고 하는 것들에 대한 선(善)과 악(惡), 시(是)와 비(非), 정(正)과 부(不)의 구별이 점점 모호해져가는 세상이다. 지도자급의 도덕과 양심, 정치인의 정의, 법률가들의 공정이라는 가면 뒤에는 이기심에 가득찬 위선들이 넘실거리고 있다. 선행기언(先行基言) 이후종지(而後從之) 보다는 오로지 정치적인 입신양명을 위한 꼼수 뿐이다. 심지어 그들의 목적을 위해 국가 정통성과 정체성까지 농단시키는 작태까지 드러내고 있는 실정이다.
글은 선비정신의 숨은그림이 있어야 한다. '글'은 '긁다'와 그 뿌리를 같이 한다는 말도 있다. 시대가 변하여 손편지 등과 같은 글쓰기 낭만도 변해가고 컴퓨터기계 자판기를 두드릴 망정 글을 쓸 때는 그것이 ‘긁는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마치 여인들이 바가지를 긁듯이 문사(文士)들도 문자로써 긁는 것이다. 가려운데를 긁어주어야 한다. 부정(不正)이나 불의(不義)를 박박 긁어야 시원한 글이 되는 것이다. 논객이란 옳고 그름을 적절히 논하고 그런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비록 볼품없었지만 강산도 변한다는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사라질 때 사라질 망정 한번 외쳐나 볼련다. '나는 논객이다'
책 속으로
-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는 모택동식 홍위병 노림수다 -
모택동(毛澤東)에 의해 공산화가 된 중국의 경우 1966년부터 76년까지는 격심한 정치적 혼란의 연속이었다. 일반적으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정당들이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전개하는 대립은 대부분 공개적인 정책대립의 양상을 띠고 있으며 이것은 국민의 선거를 통해 승패가 결정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장치가 결여되어 있는 일당체제(一黨體制)의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당내부의 정책대립이 비공개화되고 있다. 중국에서 60년대 초반에 지속된 급진파와 온건파의 대립은 당내부의 조정에 의해 해결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처럼 선거로 권력쟁취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도 아니었다. 중국 공산당은 이 과정에서 지도층 인물이 민중(民衆)을 직접 동원하여 반대파를 제거하는 과정에 참여시킨 특이한 형태의 권력투쟁이 발생했다. 모택동은 3년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으나 '문화혁명'이라는 미명 아래 청소년, 특히 학생들을 동원하여 69년까지 온건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모택동의 이른바 '문화혁명(文化革命)'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이론에서 노동자계층과 농민계층은 그 중심에 있다. 특히 모택동은 농민계층을 중시했지만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의 실패로 인해 피해자로 전락된 농민계층은 모택동의 급진정책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학생계층은 경제적 이익보다 이상주의적 선호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때문에 학생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참여하도록 하는 선동에 용이했다. 당시 중국의 학생들은 공산주의 교육만을 받았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악(惡)이며 공산주의는 선(善)이라는 흑백논리적 관념이 우세했다. 이 틈새를 이용하여 모택동은 특권층의 관료주의적인 병폐와 특권계급화, 여기에 사회적인 모든 부조리를 자본주의의 부활이라고 규정하고 그 원인을 '資本主義的 當權派'라고 매도하고 선동함으로써 학생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었다. 따라서 주자파(走資派) 또는 '소련 수정주의의 대리인'으로 지칭된 온건파를 제거하는 것은 곧 악의 제거를 의미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온건파는 모든 악의 원천으로 학생들에게 부각되었다.
문화혁명(文化革命), 모택동이 스스로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론'이라고 부른 온건파와의 권력투쟁은 1966년 중반부터 1969년까지 약 3년간 진행되었다. 66년 5월 모택동은 당중앙위원회 확대회의를 개최하고 '516通知'를 체택했다. 이것은 온건파가 주도한 학술적 차원의 문화혁명을 부인하고 부르조아와 프롤레타리아간의 권력투쟁적 차원의 문화혁명으로 변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북경시장 팽진(澎眞), 당 선전부장 육정일(陸定一), 군 참모장 나서경(羅瑞卿) 등 온건파의 중진급 인물을 숙청시켜 버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후일 이른바 '4인방(4人幇)'으로 불리워지는 강청(江靑),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 왕홍문(王洪文) 등이 참여한 문화혁명소조(文化革命小組)를 설치한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이후 5월말경부터 북경방송과 인민일보 등의 언론 매체는 학생들로 하여금 부르조아적 잔재가 남아 있는 학교당국을 공격하도록 선동하였다. 이로 인해 북경대학을 위시하여 전국의 고등교육기관(대학)은 대혼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시기 온건파는 공작대(工作隊)를 파견하여 사태를 수습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선동의 강도를 높였다. 모택동은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나의 대자보(大字報)-사령부를 포격하라'를 발표하였으며 '프롤레타리아 문화혁명에 관한 결정'을 통과 시켰다. 이것은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홍위병(紅衛兵)을 조직하여 당과 국가기관을 파괴하는 행동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실제로 모택동은 그해(66년) 8월부터 11월에 이르기까지 8회에 걸쳐 스스로 홍위병 완장을 두르고 학생들을 대면하였으며 '조반유리(造反有理), 혁명무죄(革命無罪)-모든 반항과 반란에는 나름대로 정당한 도리와 이유가 있다)라는 구호를 외치며 홍위병과 학생들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이에 고무된 학생들은 '모택동 어록(語錄)'을 손에 들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사구(四舊)-구사상(舊思想), 구문화(舊文化), 구풍속(舊風俗), 구습관(舊習慣)'를 타파한다는 명분 아래 옛 유물이나 역사적 유물을 파괴했다. 또한 당정(黨政)간부들에게 삼각뿔 모자를 씌워 거리를 끌고 다니기도 했다.
이렇듯 홍위병의 활약으로 온건파의 제거라는 모택동의 정치적 목적이 달성되었다. 하지만 급속도로 확대된 홍위병운동이 난동과 내부분열의 양상을 띠며 홍위병과 농민, 노동자간에는 유혈충돌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당시 북경대학에서는 3개의 홍위병파로 나뉘어져 폭력사태를 유발할 정도로 내분은 심각했다. 이렇게 되자 모택동은 권력투쟁을 위한 학생들의 이용 가치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모택동은 67년 1월 공식결정을 통해 홍위병의 조반운동(造反運動) 중지를 지시하기에 이른다. 어쨌든 모택동은 홍위병을 위시한 민중을 동원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국가기구에 충격을 가해 남아있는 정적(政敵) 유소기(劉少奇)까지 제거시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그 시작은 '대자보(大字報)'를 이용한 민중선동이었다. 최근 대학가에 정부 비판을 핑계로 반정부적인 이른바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대학가라는 점도 그렇고 정보화시대에 대자보라는 수단을 이용한 것 자체가 모택동의 대자보를 연상시켜 소름이 돋는다.
실제로 모택동사상을 텍스트화한 김일성이 남긴 피의 유산은 비단 체제수호를 위한 숙청과 세습, 인권문제 등만이 아니다. 이른바 김일성장학금으로 명명된 의식화, 고정화, 조직화된 행동강령 추종세력 때문이다.1961년 김일성이 지하혁명당을 조직하라는 지령에 따라 조선노동당 통일전선 소속 대남 선전조직인 반제민전(반제국주의민족민주전선)이 조직되었다. 반제민전은 통혁당(통일혁명당)을 낳았고 통혁당은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준비위원회)을 낳았고 남민전은 1983년 전국 대학에 침투해 주체사상으로 선동하여 386세대를 잉태시켰다. 그들은 철저하게 단선연계형이나 복선포치형으로 조직을 확대시켜 민주화운동이라는 명분을 붙여 전국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의식화 교육을 통해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386세대를 고정화시켰다. 그 386세대와 전대협출신들이 성장하여 은밀히 지하에서 암약했지만 최근에는 노골적으로 들어 내놓고 북한사상을 추종하며 전파하고 있다. 그 연장선에서 보면 일부 대학생들의 대자보, “안녕들하십니까” 확산은 모택동식 홍위병의 한 방법으로 조직화된 노림수일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