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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서전 상세페이지

그의 자서전작품 소개

<그의 자서전> 이광수의 자전적 장편소설이다.

우리 집은 삼각산이 멀리 바라보이는 어떤 농촌이다. 지금 내 눈에 조선이라는 것이 한 점으로 밖에 아니 보이기 때문에 무슨 도, 무슨 군이라고 밝힐 필요를 느끼지 아니한다.
그뿐더러 내가 아직도 살아 있는 사람이요, 내게 관계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내 집의 위치를 밝히는 것이 불편한 점도 없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내 자서전을 읽는 여러분은, 제목에는 「그」라고 하고 본문에는 내라고 하는 이 사람이 당신네 동네, 당신 이웃에 사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면 그만일 것이다. 사람의 생활이란 어느 곳에를 가거나 대개 비슷한 것이니까 내 생활이 곧 당신의 생활이 아닐까. 이것이 실례되는 말이면 용서 하라.
조선 사람의 조상들이 다 그러하였던 모양으로, 내 조상도 뒤에 산 있고 앞에 갈아 먹을 들이 있고 개천이 있고, 그리고 사방이 폭 싸인 곳에다가 터를 잡았었다. 그리고 뒷산에 는 선영이 있고 솔밭이 있고 밤나무가 있고, 울안과 집 근처에는 사오 명절과 제사에 쓰기 위한 배나무, 대추나무, 앵두나무며 아이들이 먹기 위한 살구나무, 복숭아나무가 있었다. 내가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난 집도 그러한 집이었다.
내 집의 호주는 조부였으나, 그는 과거도 보려 아니하고 젊어서부터 시와 글씨와 술을 좋아하고, 중년에는 기생첩을 얻어 가지고 관도 다 벗어 버리고 주막을 내고 술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풍신이 좋기로, 기운이 좋기로, 풍류 남아로 필객으로, 주객으로 인근 읍에까지 소문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학행이 있다는 선비로 효자 정려를 받은이요, 그의 숙부는 문과로 시간을 지내고 그의 당숙은 문과로 승지 를 지내고, 그의 조부는 문과로 장령, 이러므로 그도 통덕랑으로 정오품이어서 남행으로 가더라도 원한 자리쯤 할 수 있는 문지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도무지 벼슬이나 재물에 욕심이 없었다. 다만 술 먹고 친구들과 유쾌하게 노는 것이 소원인 듯하였다. 그가 주막을 내인 것도 이러한 동기에서였다.
내 아버지는 기품에 있어서 조부보다 훨씬 졸한 사람이었다. 그는 초시는 하였으나 대소과에 다 실패하고 역시 술먹기로 일을 삼았다. 나는 어렸을 때라 잘은 모르지마는, 내 집 재산이 날로 기울어진 것도 아마 이 술 값 때문이 아니었는가 한다. 내 삼촌, 당숙들, 재당숙들도 모두 술 즐기는 패였다. 그리고 내 어머니를 비롯하여 내 모든 숙모들도 다 술 빛기에는 선수였고, 일생의 대부분을 술상 보아 내기에 허비하지 않았는가 한다. 한 집도 한 사람도 돈벌이, 농사, 이런 일에는 마음을 쓰는 이가 없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저자 소개

이광수(李光洙)
1892년 2월 1일 ~ 1950년 10월 25일
문학가·언론인·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춘원(春園).
1892년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생.
1899년 향리의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였다.
1905년 8월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1906년 3월 다이세중학[大城中學]에 입학.
190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였다.
『백금학보(白金學報)』 에 일본어로 쓴 「사랑인가」를 발표하며 문학 활동을 시작.
1910년 『소년』에 신체시 「우리 영웅」을 발표하였고, 『대한흥학보(大韓興學報)』에 평론 「문학의 가치」와 단편소설 「무정」을 발표하였다.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의 교원 생활, 백혜순(白惠順)과 혼인하였다
1915년 9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하였다.
1917년 『매일신보』에 장편소설 「무정」을 연재,「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 등의 단편 소설을 『청춘』에 발표하였다.
1917년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였으나 1918년 폐병이 재발하였다.
1921년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1922년 5월 『개벽』에「민족개조론」을 발표하였다.
1926년 『동아일보』에 1924년 「재생」, 1927년 「마의태자」, 1928년 「단종애사」, 1930년 「혁명가의 아내」, 1931년 「이순신」, 1932년 「흙」 등을 연재하였다.
1937년 6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安昌浩 )와 함께 투옥, 1938년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전향을 선언하였다.
1947년 5월 『도산 안창호』, 6월 『꿈』을 출간하였다.
1949년 12월에는 일제강점기 자신의 행적을 밝힌 『나의 고백』을 출간.
1949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7월 납북되었다가 10월 25일 사망하였다.

목차

판권
그의 자서전
어린적
소년시대
교원생활
방랑의 길
북간도
대학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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