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군 송화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남. 아버지와 어머니의이름 등 가계에 대해 조사된 바 없음. 그의 아버지는 창 장년 시절의 거의 전부를 지주집 머슴살이로 보냈으며 늘그막에 겨우 얼마간의 땅을 얻어 가정을 이루었다고함.
1909년 겨울, 아버지 사망.
1910년 아버지 사망 후 어머니는 호구지책을 찾아 시누이 집으로 갔으나 궁핍을 벗어나지못한 끝에 황해도 장연군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들어가게 되었고, 강경애도 어머니를 따라 장연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음. 최도감은 환갑을 지난 늙은이였고 거기다가 불구자였다고 함. 의붓아버지와 전처 소생의 아들과 딸이 강경애를 몹시 구박함.
1913년 의붓아버지 최도감이 보다가 둔 《춘향전》에서 한글을 깨쳐 구소설을 다 읽어내자 동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데려다 과자를 사 먹이고 소설을 읽혔다고 함.‘도토리 소설장이’라는 별명이 붙음.
1915년 열 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여자청년학교를 거쳐 장연소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으나 궁핍하여 월사금, 학용품 값이 없어 도둑질을 생각할 정도였음.
1921년 형부(의붓언니의 남편인 듯)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 역시 가난한 여학생으로 궁핍한 학교생활을 함. 가난으로 친구도 사귀지 못해 외로움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밤마다 기숙사 강당에 가서 목을 놓고 울면서 기도하였다고 함.
1923년 봄, 장연에서 장연 태생의 동경 유학생이던 양주동을 만남. 강연회장에서 만난 양주동을 집으로 찾아가 문학이야기와 영어이야기에 열중한 나머지 밤을 꼬박 새움. 숭의여학교 3학년인 이때 10월경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관련, 퇴학을 당함. 이 동맹 휴학은 1923년 10월 15일 ‘심한 간섭과 기숙사 안에서의 규칙 제일주의의 생활에 반기를 들고’ 감행한 것임. 그해 추석날 한 학생이 세상을 떠난 학교 친구의 묘에 성묘를 가자는 권유를 하여 기숙사생 몇 사람이 사감 선생(나진경)에게 외출 허가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한 데서 학생들이 학교 창립 기념일을 앞둔 10월 15일에 일제히 동맹휴학에 돌입하게 된 것. 이 사건의 주모자로 퇴학당한 강경애는 장연으로 와서 양주동을 다시 만나게 되는데 양주동의 글을 보면 강경애는 십리나 떨어진 양주동의 누님 집으로 어둔 밤에 걸어와서 며칠을 묵으면서 양주동으로부터 시와 문학사상과 인생론을 배웠다고 한다.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 누님네 애기를 업고 부엌에 나가, 불도 때고 돼지죽을 쑤어주고, 저녁에는 방아를 찧고 맷돌을 돌리는 등 수업료를 노동으로 때우는 모습도 나와있다. 강경애의 배움에의 열정을 읽게되는 대목이다. 이후 양주동과 함께 서울로 와서 청진동 72번지 금성사에서 동거하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공부하기도 했다.
1924년 5월,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 권〉이라는 시를 발표함. 9월 초, ‘뜻 아니한 불행한 일로’ 양주동과 헤어져 언니가 경영하는 장연 서선여관에서 지냄. 이들의 헤어진 원인을 사상에 대한 불일치로 보는 견해가 있음. 최정희의 증언에 의하면 강경애가 양주동을 찼다고 하며 고일신의 증언에 의하면 가난으로 두 사람이 결혼을 할 수 없었다고 함. 학비를 댔던 형부가 서울로 출분했다가 돌아온 데 대해 분노하여 뺨을 때린 것이 잘못되어 중이염을 앓게 됨.
1925년 11월, 《조선문단》에 〈가을〉이란 시를 발표함. 이후 1929년까지 강경애의 행적을 알리는 자료가 없음. 고일신의 증언에 의하면 양주동과의 연애사건으로 장연에서 비난의 여론이 일자 고향을 떠나야했던 것 같으며 이 때 간도 용정 일대를 방랑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박화성의 증언에 의하면 역시 양주동과의 연애관계로 고향을 떠나야했는데 이 방랑기간 강경애는 가난으로 ‘이루 말할 수 없이’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용정일대에서 교육기관의 강사노릇도 하였다고 하나 이 기간에 병을 얻어 늘 고통을 받게 되며 고향으로 돌아와 만난 장하일은 강경애의 병을 고쳐주려고 많은 애를 썼다고 한다. 연변 쪽 자료에 의하면 1920년대 후반 강경애는 주로 장연에 거주하면서 문학공부를 하는 한편으로 굶주린 무산 아동을 위한 ‘흥풍야학교’를 개설하고 직접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하며 1930년 1월 24일 있었던 김좌진장군 암살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설도 제기되고 있다.
1926년 8월 《조선일보》에 시 〈다림불〉발표.
1929년 10월, 근우회 장연 지회로 소속을 밝히고 《조선일보》에 독자투고로 〈염상섭씨의 논설 ‘명일의길’을 읽고〉를 발표함. 이 글에서 강경애는 소박한 형태로나마 맑스주의적인 관점을 드러내 보임. 이 시기에 고향에 돌아와 언니가 경영하는 서선여관과 최문려의 사랑방에서 자취를 하면서 〈파금〉〈어머니와 딸〉을 집필하였을 것으로 보임. 이 시기를 전후하여 수원 농림학교 출신인 장연군청의 서기 장하일과 결혼한 것으로 보임.
1930년 11월, 《조선일보》에 〈조선 여성의 밟을 길〉이란 시론을 부인문예란에 투고로 발표함.
1931년 1월, 《조선일보》 부인문예란에 〈파금〉이란 단편소설을 투고로 발표함. 이 작품은 한 지식인이 이념적인 번민 속에서 집안의 파산을 계기로 만주로 이주하여 사상 운동을 펼치게 된다는 줄거리를 가지고 있음. 그러나 관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는 작가의 태도가 뚜렷이 나타남. 2월, 역시 《조선일보》에 강악설이란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이라는 양주동 비판문을 씀. 양주동에 대한 상당히 격한 감정이 드러나 있음. 장하일과 인천을 거쳐 이해 6월에 간도 용정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됨. 장하일은 용정 동흥중학교 교사로 근무. 이후 간혹 서울이나 장연을 왕래. 8월부터 1932년 12월까지 《혜성》지에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연재.
1932년 1월 《신여성》에 〈커다란 문제 하나〉발표. 6월경, 중이염 때문에 용정을 떠나서 1933년 9월 이전까지 서울과 장연에서 머무름. 이 때 장하일과 함께 있지 않음. 8월과 10월 《동광》지에 발표한 수필 〈간도를 등지면서〉〈간도야 잘 있거라〉에 이 때 간도를 떠나던 감회를 피력함. 9월, 《삼천리》에 단편 〈그 여자〉를 발표함.
1933년 3월, 《제일선》에 단편 〈부자〉를 발표하는 외에도 수필을 거의 매달 한 편씩 발표함. 9월경, 다시 용정으로 감. 단편 〈채전〉(《신가정》 9월), 〈축구전〉(《신가정》 12월)발표.
1934년 단편 〈유무〉(《신가정》 2월), 간도에 이주한 조선농민의 처절한 삶과 모성과 노동의 갈등을 첨예하게 그린 중편 〈소금〉(《신가정》 5~10월) 발표. 단편 〈동정〉(《청년조선》 10월) 발표. 8월부터 12월까지 《동아일보》에 그의 대표작이자 식민지 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인간문제》를 연재함. 이 작품은 이후 1949년(평양) 북한에서 단행본이 출간되었으며, 1978년(서울) 삼성출판사에서 《한국문학전집》 12에 수록되었다. 1988년, 1992년(서울)에는 단행본으로도 출간되었고, 소련에서도 1955년 러시아어로 번역되었다고 함.
1935년 단편 〈모자〉(《개벽》1월), 〈원고료 이백 원〉(《신가정》 2월), 〈해고〉(《신동아》 3월), 〈번뇌〉(《신가정》 6~7월) 발표.
1936년 간도 용정에서 안수길, 박영준 등과 함께 ‘북향’의 동인으로 가담했으나 건강 사정 때문에 적극적 활동은 못함. 3월 《조선일보》에 빈궁소설의 극치를 보여주는 단편 〈지하촌〉을 발표. 8월 《신동아》에 단편 〈산남〉발표. 이 해에 황해도 몽금포의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인 노동자와 식민지 조선노동자의 연대 문제를 일본어로 쓴 소설 <장산곶>을 일본의 오사까마이니찌 신문에 발표.
1937년 《여성》 1~2월 호에 간도지방에서 있었던 ‘제4차 간도 공산당사건’의 관련자 18명이 1936년 6월 사형 당한 사건을 소설화 한 단편 〈어둠〉을 발표. 11월 호에 실직 후 고민을 이기다못해 아편을 입에 대고 중독자가 되고 만 간도이민자가 아내를 청인에게 팔았으나 아내가 도망치다 죽어 살인자로 잡혀가는 간도이민의 비참한 삶을 그린 단편 〈마약〉 발표.
1938년 〈검둥이〉(《삼천리》 5월, 미완) 발표.
1939년 《조선일보》 간도 지국장 역임. 신병이 악화, 남편과 함께 고향인 장연으로 돌아옴.
1940년 2월에는 상경하여 경성제대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도 하고 삼방약수터에도 감.
1944년 4월 26일 병이 악화되어 귀가 먹고 앞조차 보지 못하게 되어 한 달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부르면서 숨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