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말을 듣는 것조차 싫다면, 차라리 이혼해줘요.”
“안 돼.”
이혼은 그에게 그저 귀찮은 일일뿐이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아내라는 꼭두각시를 하나 곁에 두는 일일뿐.
그녀는 그제야 그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할 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한걸음 앞으로 내딛는 용기조차 가질 수 없었던 그 때,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신으로부터의 도피였다.
“애석하네요.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었다니.”
[본문 중에서]
“차라리.”
재인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는 결심한 듯 눈을 떠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우리 이혼해요.”
순간 영무의 어깨가 더 딱딱하게 굳었다.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녀를 빤히 보았다. 그의 입매는 더 날카롭게 다물려 있었다.
“이혼 해줘요.”
체념이었다.
“안 돼.”
단호했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표정으로 척척 옷을 걸쳤다.
“부탁이에요. 이혼 해줘요, 제발.”
이혼 하지 않을 거면 내 말이라도 들어줘.
차마 말을 하진 못했지만 재인은 비참했다. 어떻게 해야 할 지, 어떻게 이 난국을 돌파해야 하는지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옆에 있다면, 그랬다면 좀 나을까.
그러나 그녀 옆에는 지금 아무도 없었다. 이 세상에 뚝 떨어진 외딴섬만양 혼자였다. 그런 재인에게 믿고 의지할 사람은 세상에 단 두 명이었다. 한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했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외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은 도피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디로 숨을 수만 있다면, 이런 상황을 회피할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그러고 싶었다. 그러나 눈을 뜨면 또 하루가 시작되고 날이 저물었다. 그 사이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똑 같은 어제와 오늘처럼.
“저에게 왜 이래요?”
“…….”
“그럼, 차라리 화를 내요.”
그래야 말을 할 수도 있을 테니까.
“화를 내란 말이야!”
재인은 소리쳤다. 발작적으로 감정이 범람하더니 울음이 났다. 그를 만나 감정적인 소용돌이에 휘말린 순간부터 지금까지 신경은 쉬지 못했다. 그에게 근접한 사람이 되고자 필사적이 되어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신경이 너덜너덜 걸레조각이 되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영무가 격앙 되어 가는 그녀의 젖은 얼굴을 심드렁한 표정으로 굽어보았다. 진저리가 났다. 견고한 바위 같은 그에게 끊임없이 부딪쳐야만 하는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를 만나기 이전으로 돌아갔으면, 그리 된다면 소용돌이를 만드는 반경 100 미터 이내에는 발도 들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화를 내요.”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그가 등을 돌렸다. 그리고 뚜벅뚜벅 침실에서 걸어 나갔다. 영원히 안 올 것처럼.
“제발…….”
재인은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문이 쿵 닫혔다. 그녀의 어깨가 움찔 떨었다.
이대로는 안 돼.
심장이 비명을 질렀다.
더는 견딜 수 없어.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때, 다리 사이에서 뭉클 정액이 흘러내렸다. 마치 비웃듯이.
정말 이대로는!
재인은 젖은 얼굴을 번쩍 치켜들었다. 끝을 내야만 했다. 이대로, 이렇게 지옥에 혼자 버려져 있을 이유가 없었다.
도망갈 수 없다면, 회피할 수 없다면 부딪치리라.
재인은 결심한 듯 이불을 걷어냈다. 화인이 찍힌 나신에, 실크가운을 걸쳤다. 그리고 영무를 찾아 나섰다.
이혼 할 수 없고, 화를 내기도 싫다면 말이라도 들어달라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듣고 나서 판단은 그의 몫이었다. 그 판단에 따라 추후의 거취를 정해도 정할 것이라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재인은 위층으로 길을 잡아 나갔다. 이 집에 있는 한은 그가 서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달빛에 의존해 계단을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밟았다. 듣지 않겠다면 놔줄 수밖에 없을 거라는 비장한 각오로 마음을 다 잡고서.
서재가 있는 삼층에 올랐다. 문이 조금 열려 있는지, 삼층 복도에 불빛이 길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재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마지막 계단을 올라갔다. 서재 문 앞까지 단 몇 발자국만 떼면 되는데, 이상하게 심장이 널을 뛰었다.
겁이 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또 그냥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에 이미 좌절을 겪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재인은 침을 꿀꺽 삼키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문 앞에 섰다.
문을 밀었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역시 그곳에 있었다. 영무가 소파에 앉아 위스키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혼도 싫고, 화도 내기 싫다면…….”
“꼭 오늘이어야 해?”
그녀의 말을 자르고 영무가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
한 동안 말문이 막혔다. 그가 갑자기 늙어버린 사람처럼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이어야 하냐고.”
“…….”
“할 말 있다면 어서 끝내.”
그러다가 귀찮아 쳐내는 말투. 차가운 음성이 심장을 두 동강 내었다. 순간 재인은 알아버렸다. 그런 오해가 아니었다고 해도 이런 결과는 당연했을 거라는 사실을. 원래 하이틴 로맨스는 여자들만의 파라다이스였다.
그리고…… 파라다이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영무가 그런 걸 목도하고도 화를 내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이혼은 그에게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아내라는 꼭두각시 하나 곁에 두는 일일뿐. 그러고 보니 그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레 짐작했을 뿐이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까?
재인은 그와 자신 사이에 할 말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 공황상태에 돌입했다. 머리가 텅 비었고, 심장은 펌프질을 멈추었다. 현기증이 나고 약간의 구역질도 났다. 무엇보다도 왜 이렇게 그를 찾아 뒤쫓아 왔는지조차 까마득해졌다.
“아, 아니에요…….”
재인은 간신히 몸을 돌렸다.
“아무 것도.”
그리고 중얼거리듯 말하며 서재에서 나왔다. 한 발 한 발 떼는 발걸음이 몽롱했다. 발밑이 무너져버린 재인의 걸음은 흐느적거리기만 했다. 그리고 뭐가 먼저인지 모른다. 의식을 놔 버린 것, 아니면 계단 아래로 구른 것.
‘숨고 싶어.’
떠오르는 건 단 한 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