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고향은 주문진이다. 강릉시 옥천동에서 태어나 주문진에서 자랐다. 주문진읍은 조선조 말경까지 새말(新里)이라 불렸다. 새로 만들어진 마을이라는 뜻이다. 1940년 11월 1일 주문진읍으로 승격된 이후 1995년 1월 1일 강릉시로 통합되기 전까지 명주군 수부도시 역할을 담당했다. 백두대간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주문진은 아름다운 파도가 눈부신 동해안의 대표적 항구도시이다. 예로부터 주문진 하면 오징어, 오징어 하면 주문진을 떠올릴 정도로 오징어는 주문진의 대표적인 특산물이다. 주문진 사람들은 동해에서 솟구치는 태양과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땅거미가 짙어 갈 무렵 수평선에서 반짝이는 오징어잡이 배를 바라보며 하루를 정리한다.
이곳에서 필자는 주문초등학교, 주문진중학교, 주문진수산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여느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주문진 사람들의 마음의 고향인 ‘신리천’에서 여름철에는 멱을 감고, 겨울철에는 썰매를 지치며 뛰어 놀았다. 큰 축항, 작은 축항을 오가며 해수욕을 즐겼다. 향호 호수에서 잡은 ‘꾹저구’로 매운탕을 끓여 먹던 기억과 신리천 제방을 걸으며 남의 눈에 띌까 두근두근하는 마음으로 데이트를 즐기던 그 시절의 추억이 아스라하다. 대학은 가지 못했다. 초등 시절부터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까지 소변을 가리지 못했던 탓에 혼자서 객지 생활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29살, 비교적 늦은 나이에 경찰관이 됐다. 경찰을 택하게 된 특별한 소신이나 포부는 없었다. 군대를 다녀온 후 형제들이 하던 사업의 부도로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서둘러 직업을 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마침 길에서 우연히 경찰관 채용 공고를 보게 된 것이 계기라면 계기였다. 필자가 경찰관이 된 것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필자는 공무원 체질이 아니었다. 장발 단속에 걸려 경찰관에게 강제로 머리카락을 잘리는가 하면 야간 통행금지 위반 따위로 숱하게 단속을 당했고, 그때마다 경찰관에게 욕을 해 댔다. 즉결심판에 회부돼 즉결법정에 출석할 때는 벌금 낼 돈을 미리 1원짜리 동전으로 준비해 가기도 했다. 경찰관 앞에 1원짜리 동전 2,500개를 쏟아부으면서 통쾌감을 느꼈다. 이런 반항적인 기질은 경찰관이 돼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필자는 입직 당시부터 경찰의 환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필자의 눈에 비친 경찰 조직은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부터 자학적 관행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비정상이었다. 지금도 경찰관들은 경찰을 모래알 조직, 따로국밥, 살모사 조직이라고 부른다. 퇴직하면 경찰서 쪽으로 소변도 보지 않겠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한다. 자신이 평생 몸담은 직장을 이토록 혐오하는 것은 조직에게나 개인에게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도 그랬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오죽했으면 순경 시절부터 동료들은 필자를 경찰노조 위원장감이라고 불렀다.
80-90년대 경찰관들의 꿈은 빨리 경사가 되는 것이었다. 경사가 되면 지서장이나 계장이 될 수 있고 방망이를 차고 순찰을 돌아야 하는 신세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동료가 경사로 승진하면 방망이 팔자를 면했다고 모두 부러워했다. 필자도 빨리 승진을 해서 방망이 팔자를 면하기 위해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시위 진압을 나갈 때 행정법을 메모해 가지고 나갔고, 순찰을 돌면서 형사법을 외웠다. 학교 다닐 때 하지 않았던 공부를 정말 실컷 했다. 이런 노력 덕분인지 매번 시험에 합격을 했고 승진을 거듭했다.
필자는 경위로 승진하여 주문진파출소장을 하면서부터 경찰이 처한 비참한 대내외적 현실에 눈을 뜨게 됐다. 특히 세 번에 걸친 검찰과의 충돌을 겪으면서 검찰과의 불합리한 관계를 반드시 개선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관내 유흥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 강릉검찰지청 5호실 장 모 계장을 형사 입건한 문제, 주문진에서 교통사고를 낸 모 검사의 아버지가 탑승한 관광버스 처리 문제, 파출소 근무일지와 근무수첩을 제출하라는 여 검사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벌어진 검찰과 경찰 내부에서의 충돌 등이 그것이다. 이 세 번의 사건을 통해 필자는 경찰이 처한 처참한 현실을 정확하게 깨달았다. 경찰의 가장 큰 적은 경찰이었다.
이 무렵 새롭게 등장한 PC 통신은 절망적인 현실의 돌파구가 되었다. 그곳에는 필자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PC 통신으로 의견을 교환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종의 연대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대는 필자가 1998년 경감으로 승진할 때쯤 보편화된 인터넷 공간을 통해 더욱 발전하게 된다. 인터넷이 필자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히 크다.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필자의 경찰 생활은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인터넷은 불평분자에 불과했던 필자를 투사로 변신시켰다.
이 책은 필자의 투쟁의 기록이다. 필자는 경찰관으로 사는 동안 필자가 몸담은 경찰 조직의 불합리와 구태를 드러내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제복을 입은 시민으로서 경찰 조직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필자 나름의 방식이었다. 2013년 10월 31일, 필자는 31년 동안의 경찰 생활을 마치고 퇴직하였다. 그러나 필자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필자는 필자가 사랑하는 경찰의 건강성을 좀먹는 암세포와도 같은 불합리와 구태를 드러내어 바로잡는 일에 기꺼이 남은 생을 바칠 것이다. 이것은 제복을 벗은 시민으로서 경찰 조직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필자 나름의 방식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필자의 향후의 투쟁을 예고하는 선전포고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