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화성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 우리는 화성학은커녕 악보조차 읽지 못하는 유명한 음악가들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쉽게 접하고는 한다. 음악에 관한 천재적인 영감은 화성학의 이론을 충분히 알지 못하더라도 그를 훌륭한 음악가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천재들이 연주하고 만들어내는 음악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화성학의 일정한 법칙에 종속되며 그 속에서 빈틈없는 구조적 통일성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동일한 유추가 철학자와 논리학의 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유명한 철학자들의 논리학에 대한 견해와 숙련도는 각기 다르지만, 모든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적 사유에는 암묵적으로 논리적 추론이 수행되고 있다. 설령 그의 사유가 비논리적인 영역까지 도달하더라도 그 곳까지 이르는 사유의 도정에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은 논리적 추론인 것이다. 이러한 논리적 확실성을 최상의 철학적 가치로 설정하고 그러한 전제 위에 구축된 철학적 전통이 바로 현대의 영미 분석철학이다. 하지만 음악을 처음 공부하려는 이들이 화성학 책 앞에서 좌절하고 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듯이, 고도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사유를 단련하기 위해 현대의 논리학 책을 집어든 이들은 정확히 동일한 종류의 절망감을 느끼게 된다. 음악학도와 철학도의 동일한 바람은, ‘이 단계를 건너뛸 수는 없을까’인 것이다. “화성학을 수료하기 전에는 모차르트를 들을 수 없다”라고 한다면, 그 누가 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양상논리와 형이상학”은 그러한 절망감을 최소한으로 줄여준다. 이 책은 지엽적인 기호들의 나열이라는 이미지로 고착된 분석철학의 사유가 어떻게 필연과 본질, 지시와 의미, 신 존재 증명과 같은 고도의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연관되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제시하고 있다. 양상논리는 20세기에 개발된 필연성과 가능성의 논리연산을 다루는 논리체계인데, 책 속에서는 양상논리학의 주된 논의와 연구결과들, 그리고 분석철학자들이 양상논리 의미론을 통해 형이상학적 사유로 복귀하는 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독자들은 분석철학의 영역에서 부활한 본질주의와 형이상학적 세계관, 그리고 신 존재 증명을 시도하는 현대 영미철학의 위대한 철학적 교향곡들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더불어 수학기초론과 집합론, 필연성에 관한 고대철학자들의 고찰과 현대의 수리논리학을 넘나들며 진행되는 양상논리의 개괄은 과학과 논리, 형이상학이 교차하는 접점을 보여주고 있다. 독자들은 분석철학자들이 필연과 본질, 신 존재 증명이라는 철학의 보물을 찾아 떠나는 형이상학적 모험에 현대논리학의 기초훈련이라는 큰 부담을 면제받은 채로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서양철학을 양분하는 주된 흐름은 유럽의 대륙철학과 영미 분석철학으로 대표된다. 이 중 영미 분석철학은 수학기초론과 연관된 수리논리학적 사유, 언어 분석을 기반으로 한 반형이상학적 사고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분석철학이 철학도들에게 일종의 부담감 혹은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는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철학적 문제라고 하기에는 사소해 보이는 언어 분석과 기호논리학적 방법론에 천착해온 영미 분석철학은 흔히 나무만 보고 산을 보지 못하는 논리와 언어의 노예로 폄하되기도 한다. 하지만 분석철학은 필연성과 가능성에 대한 논리연산을 수행하는 양상논리학의 개발을 통해 형이상학적 본질주의의 부활을 목도하였으며, 심지어는 분석철학의 내부에서 신 존재 증명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 책은 20세기 중반부터 영미 분석철학의 주류로 부상한 양상논리학과 가능세계 의미론자들의 주된 논의와 연구 결과를 소개하고 있다. 더불어 집합론과 고차논리학, 양상논리학을 동원한 기호적 사유가 필연과 본질, 지시와 의미와 같은 고전적인 형이상학의 문제를 다시금 재조명하는 과정, 그리고 궁극의 철학적 화두라 할 수 있는 신 존재 증명에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현대 영미철학의 분석적 사유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독자들에게 분석철학의 형이상학적 변신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이다. 또한 해체와 상대성의 가치를 역설하는 현대 대륙철학의 홍수에 함몰되지 않고 가능세계 존재론으로 새로운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구축하려는 분석철학자들의 숨겨진 면모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모든 철학자들이 비판과 이성의 잣대를 들이밀면서도 사상의 내밀한 곳에 간직한 형이상학적 체계의 구축에 대한 열망이 발현된 것이며, 형이상학을 추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서 발생한 분석철학도 결국은 다시금 그러한 열망으로 복귀하였음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