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6.25전쟁의 명장’, ‘한국군 최초 사성장군’, ‘주한미군이 전설로 받아들이는 장군’…. 백선엽 예비역 대장(92)에게 따라붙는 수식이다. 그렇다면 ‘군인 아닌 백선엽’은 어떤 인물일까.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는 그를 말해주는 책이다.결론부터 소개하자면, 군복을 벗은 백선엽은 외교관과 교통부 장관, 대한민국 화학공업의 전사로 ‘싸움터’를 옮긴다. 다부동 전투, 평양 첫 입성, 1.4후퇴 뒤 첫 서울 수복, 지리산 빨치산 토벌 등 6.25전쟁 3년 동안 치열한 야전에서 커다란 전적을 거둔 그가 민간인으로서는 어떤 싸움터에 섰으며, 그 싸움의 결과는 또 어땠을까. 그 궁금증을 풀어 볼 수 있는 책이다.
그가 옮겨 다닌 새로운 ‘싸움터’는 중화민국(대만), 프랑스 파리와 서유럽 5개국, 그리고 아프리카의 평원, 서울의 ‘콩나물시루 버스’, 착공 직전의 서울 지하철, 충주와 나주의 비료공장, 여수와 남해의 화학단지 등이다. 1960년 4.19와 이승만 대통령 하야 뒤 그는 군복을 벗는다. 대만 대사로 1년을 지내고, 5.16이 벌어진 뒤에는 프랑스 주재 서유럽 5개 국가 및 아프리카 13개 국가 겸임대사를 지낸다. 이어 캐나다 대사로 있다가 박정희 정부의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며 서울 지하철 건설에 뛰어든다. 다음 10년 동안은 한국의 화학공업 기반을 다지는 데 주력한다.
백선엽이 거친 이 세월은 김일성 군대의 남침을 간신히 막아내고 잿더미만 남았던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올라서기 위한 기틀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예산이 부족하던 시절에 프랑스와 서유럽 5개국, 아프리카 13개국의 대사를 한 사람이 겸임하는 기이한(?) 현상 속에서, 임무를 맡은 공직자는 어떻게 난관을 극복했을까에 관한 답이 고스란히 나온다. 일본 적군파가 비행기를 납치해 평양으로 가려고 했던 1970년의 ‘요도호 사건’과 서울 지하철 건설의 상관관계, 석유화학단지 건설 차관을 얻기 위해 일본 통산성에 한 달 동안 출근하다시피 했던 ‘텐 스타(Ten star: 한국군 예비역 장성 계급을 합쳐 일본 관리들이 부른 별명)’의 굴욕과 인내기, 그리고 성공담 등이 이 책으로 고스란히 전달될 것이다. 야전의 명장, 백선엽의 눈으로 살펴보는 대한민국 분투의 역사가 그 안에 있다.
백선엽이라는 인물은 연구 대상이다. 6.25전쟁 3년 동안 그는 한반도 운명을 갈랐던 서부 전선(신의주~서울~부산)의 축선에서 가장 뛰어난 야전능력을 보인 대한민국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6.25의 최고 명장’이라고 내세워도 이의를 달 사람은 없다. 달리 이를테면 그는 ‘싸움의 명수’다. 6.25전쟁의 크고 작은 전투를 바라보는 그의 시각은 일찍이 신문지면과 책자를 통해 소개된 적이 있다. 그러나 군복을 벗은 뒤 그가 걸어온 이력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늘 겪어야 했던 각종 싸움의 다양한 측면을 관찰할 기회는 없었다.
이 책은 그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즉 실제 벌어진 한반도의 전쟁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싸움 능력을 선보인 그가 군복을 벗고 민간인으로 활동한 뒤에는 어떤 안목으로 세상의 싸움을 살폈는지를 알 수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는 군에서 예편한 뒤 외교관으로 10년, 교통부 장관으로 1년 6개월, 한국 화학공업의 산 증인으로 10년의 세월을 거친다. 외교관으로서 첫 임지인 대만에서는 마오쩌둥에게 패배해 대륙에서 쫓겨 온 장제스를 살핀다. 큰 싸움에서 무릎을 꿇은 과거 중국대륙의 권력자가 실지 회복을 위해 절치부심하는 장면은 역사적 상상력을 자극한다. 이어 프랑스 등 서유럽 5개국과 아프리카 13개국 겸임대사를 지내면서 아프리카 신생 독립국과 과거 식민지 종주국 유럽 국가 사이의 긴장관계를 ‘싸움’의 시각에서 조명한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양대 진영으로 갈라진 세계사의 새 질서 속에서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이 펼쳐야 하는 싸움에 관한 고민이 진하게 묻어 나온다.
교통부 장관으로서도 마찬가지다. 백선엽은 없는 예산을 타령만 하고 있기에는 뭔가 허전했다. 만들고 이뤄야 하는, 역시 지난하고 고된 싸움의 연속이었다. 이 책을 통해 지하철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서울의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다투면서 일궈야 했는지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볼 수 있다. 화학공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임무를 받은 상황도 그랬다. 황량한 벌판에 섰다는 점이 아무런 준비 없이 김일성 군대의 남침을 맞았던 6.25전쟁을 떠올리게 한다. 백선엽은 황무지와 다름없는 현장에서 다시 싸움을 벌인다. 없는 돈을 만들기 위해 일본 통산성의 복도에서 한 달 동안 죽치고 기다리는 장면이 싸움 아니라고 한다면,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가 펼치는 회고록의 가장 강한 율조는 ‘부국강병’쳀다. ‘나라가 부유해져야 국방력도 강해진다’는 한자 성어 원래의 새김과, 이를 현실세계의 험난한 싸움터에 끈질기게 연역하는 과정이 그려진다.『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를 통해 대한민국이 걸어온 발자취가 고스란히 살아난다. 없이 살다가 별안간 찾아온 전쟁, 그리고 잿더미에서 일어나 이제는 세계적인 경제강국으로 일어선 대한민국의 궤적을 알 수 있다. 싸움은 험난했지만, 그를 이겨내는 의지는 싸움터에 선 사람의 몫이다. 백선엽은 그렇게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비록 군복은 벗었지만, 그는 스스로를 ‘노병’이라고 불렀다. 그 노병이 전하는 싸움의 이야기가 결코 예사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