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루스 베스트 로맨스 소설!
너무나 공손한 이름 전성훈 33세. TBS 방송국의 촉망받는 앵커. 준수한 외모와 편안한 말솜씨, 그리고 시사 전반에 걸친 해박한 지식으로 입사 초기부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뉴스 앵커답지 않게 많은 여성 팬을 확보하고 있는 그는 많은 여론조사에서 ‘신랑감 후보 1위’, ‘함께 여행가고 싶은 남자 1위’, ‘사위 삼고 싶은 총각 1위’등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모 기업인의 불법 수뢰현장이 담긴 제보 내용을 다룬 것이 화근이 되어 징계 처분을 받게 된다.
오래전 가 보았던 기억으로 찾아간 서해안 바닷가에서 홀로 앉아 술을 마시는, 무척 낯익은 여자를 보게 된다. 우연찮게 합석을 하게 되고 이미 정신을 잃고 모래 위에 누워있는 여자를 남겨두고 일어설 수 없었던 성훈은 그녀를 부축해 자신의 호텔방으로 데리고 간다.
너무나 건방진 이름 나은진 29세. ‘프레타포르테 in London' 일명 pure spirit에서 촉망받는 신인으로 주목받으며 혜성처럼 등장했다. 한복 디자이너 배화란의 딸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고자 남들보다 열 배쯤 피가 나게 노력했다. 자신의 작품을 런던과 서울에 동시 출시할 계획을 가지고 공항에 내려서는 순간부터 디자이너 나은진은 사라지고 배화란의 성공한 딸에 대한 기사만이 넘쳐났다. 그 때문에 모든 스케줄을 버려둔 채 무작정 차를 몰고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곳이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 바닷가에서 은진은 초췌한 인상의 사내와 술잔을 기울이게 된다.
수염만 좀 깎고 제대로 단장만 한다면 무척 핸섬한 얼굴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남자의 매력적인 저음의 목소리와 물처럼 들이붓던 술에 함께 취해 간다.
무겁게 내리누르는 돌덩이의 정체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은진은 남자가 퍼붓는 불같이 뜨거운 키스에 저도 모르게 응하게 된다.
여자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가 그토록 익숙하다고 느꼈던 것은 자신이 진행하던 뉴스 시간에 단신으로 몇 번인가 다루었던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가 유명한 배화란의 딸이었다니…….
[나은진, 인기 앵커 전성훈의 감춰진 연인으로 밝혀져…….]
일주일 째 쏟아지는 성훈과 은진의 스캔들은 식을 줄 몰랐다. 드디어 회사차원에서 방법을 강구하기에 이른다. 동료들의 수군거림과 그 자신이 취재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이 성훈을 더욱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요?”
“배화란 선생님…….”
“맞아요. 우리 은진이하고 ‘깊은’ 사이라고 하던데, 사실인가요?”
“저, 그게…….”
“나도 내 딸을 두고 도박을 하고 싶지 않지만, 우선은 결혼 발표를 하세요. 둘 다 나이찬 사람들이고, 이런 식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내 딸을 위해서는 이 방법이 최선인 것 같군요.”
“아, 아니. 선, 선생님!”
“누구 사귀는 사람 있어요? 장래를 약속했다던가…….”
“아니, 없습니다.”
“잘 됐군요. 하나밖에 없는 딸을 이런 식으로 내몰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상견례 자리를 가지려면 언제쯤이나 되겠어요?”
“핫! 미쳤군요. 결혼이라니? 대체 그 일이 결혼까지 해야 할 일인가요? 이 세상에 하룻밤 잠깐 만났다 헤어지는 모든 남녀가 결혼을 해야 한다면 이 세상은 김밥집 만큼이나 예식장이 들어서야 할 거라고요.”
“난들 이 상황이 좋아서 그러는 줄 알아?”
“그럼 뭐죠? 우, 우린 서로를 전혀 모른다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이도 아니라고요.”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 당신은 어떤지 몰라도 난 앞으로의 방송생활이 달려 있어. 앵커가 되기 위해 내 평생을 바쳐왔단 말이야. 이런 식의 예상치 못했던 스캔들 따위로 그런 내 꿈을 접을 수는 없다고. 알아듣겠어? 당신이 패션쇼인지 뭔지 해서 런던으로 가든 파리로 날아가든 난 상관없어. 나는 그저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돌파구가 필요할 뿐이라고. 여러 말 말고 내일 기자회견장으로 나오도록 해. 한 달 안에 결혼식 올린다. 여기, 우리의 뜨거운 러브스토리가 담긴 파일이니까, 내일까지 모두 숙지해서 나오도록. 일 년이야. 딱 일 년만 지나고 나면 당신은 당신대로, 나는 나대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는 거다. 그동안에는 사랑에 빠진 연인의 모습으로 살아주기 바라.”
차가운 얼음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은 성훈의 눈빛에 은진의 목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쏘아보듯 응시하는 그의 시선을 더 이상 참아내지 못하고 은진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미 열흘이나 시간이 지났지만 은진의 살갗에는 여전히 성훈의 뜨거운 입김이 흐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의 손길과 입술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리던 그 새벽을 떠오르자 은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딱딱하게 굳어지는 은진의 얼굴을 바라보는 성훈의 마음도 결코 편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