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은 그들에게 무엇을 말했던가
그들은 공장에서 무엇을 들었던가
민주노조의 전설 원풍모방노동조합
조합원 일곱 명이 끌고 온 생애의 구술 기록
엄혹한 시절, 민주노조가 어떻게 한 인간을 변화시켰는지 보라
1963년 9월 처음 출범한 이래 원풍모방노동조합은 지난한 어용노조 정상화투쟁을 거쳐 1972년 8월 마침내 민주노조로 탈바꿈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원풍노조는 특히 1970~80년대 한국노동운동사에서 지울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노동자들의 일방적 희생만을 강요해온 경제성장 정책의 허울을 폭로하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3대의 폭압에 맞서 싸운 땀과 눈물과 피의 기록이다. 물론 원풍노조는 실패했다. 1982년 이른바 ‘9.27사건’ 당시, 정권의 사주를 받은 구사대에 의해 노동조합 사무실은 폐쇄되고, 지부장은 자루에 담겨 화곡동 쓰레기장에 내버려졌으며, 조합원들은 빨갱이로 내몰리며 천지사방으로 쫓겨났다. 연행 200여 명, 입원 80여 명, 구류 28명, 구속 8명, 그리고 해고는 무려 559명이었다. 이후에도 언론을 통한 매도, 출근투쟁 저지, 블랙리스트를 통한 재취업 방해공작 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원풍노조는 결코 실패하지 않았다. 그 혹독한 시련들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과정에서 어느새 민주노조의 전설로 우뚝 섰던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민주정부들은 원풍노조의 활동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명예를 회복시켰다.
원풍노조의 맥을 이어가고 있는 원풍동지회는 2010년 원풍노조의 공식적 역사를 정리한 『원풍모방노동운동사』를 펴냈다. 이 책 『공장이 내게 말한 것들』은 『원풍모방노동운동사』와 함께 펴낸 『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에 이어 조합원들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호명한 또 하나의 구술 기록이다.
§. 노동자이자 조합원이자 구술자들의 말
이필남
처음 배정받은 작업은 실을 염색하는 공정이었다.
항상 물에 젖은 원료를 옮겨야 했기에 힘이 들었지만, 그보다 염색약의 독한 냄새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 특히 표백제를 사용하는 날은 코로 숨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염색이 잘못 되면 다른 색깔로 바꾸기 위해 표백제를 사용해서 염색 물을 빼야 했다. 그 표백제 냄새가 어찌나 독하던지 코로 숨 쉬기도 힘들고 조금만 맡아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였다.
염색과 작업장은 겨울에는 다른 곳보다 한결 추웠다. 염색 냄새를 밖으로 빼내기 위해 환풍기를 많이 돌리는데 실내의 온기도 밖으로 빠져나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물을 사용하는 현장이다 보니 더 추울 수밖에 없었다. 스팀 건조기가 있는 곳만 겨우 온기가 있었다. 몹시 추운 날은 옆의 동료와 서로 기계를 봐주면서 교대로 건조기에 가서 언 몸을 녹였다. 그러다가 발각이 되면 시말서를 쓰고 불이익을 당하기 때문에 당직자가 현장에 들어오면 서로 신호를 해주었다.
임충호
“이봐, 정신 좀 차려요?”
누가 누군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 사람 저 사람 등을 흔들며 상체를 일으켜 세우다 아무 반응이 없이 축 늘어진 동료는 등에 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그 와중에 쓰러져 있는 낯익은 얼굴 하나는 똑똑히 기억한다. 직포과 화숙이였다. 그 모습이 얼마나 불쌍하던지 등에 업고 강남성심병원으로 뛰면서 펑펑 울었다. 그렇게 수십 명의 동료들을 들쳐 업고 뛰었다. “때려죽일 놈들”을 수없이 되뇌면서, 펑펑 울면서, 강남성심병원, 한독병원, 누가의원 응급실로 뛰고 또 뛰었다.
대림동 삼거리 도로가 얼마나 넓었던가. 마침 추석 연휴가 시작되던 때라 오고가는 차들도 많았다. 그 도로를 의식 잃은 동료들을 업고 뛰며 참 많이도 울었다.
김두숙
섬유노조 어용위원장 역을 맡았던 나는 조합원들에게 삿대질과 야유를 받으면서 욕을 먹었지만 그래도 흥겨웠다. 상쇠가 징을 크게 울리며 운동장으로 조합원들을 끌고 가서 뒤풀이 공연을 했다. 운동장에서 관객과 공연자가 하나가 되어 탈춤공연 뒤풀이를 할 때는 무언가 노조활동에 기여했다는 뿌듯한 기분에 하늘을 날아갈 것만 같았다.
가족의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진 나는 마치 양어깨에 날개가 날린 듯 원풍노조라는 옷을 입고 대의원으로, 탈춤반으로, 소모임으로 활동하는 가운데 미처 몰랐던 나의 기질과 끼를 발견하고 계발하면서 행복과 함께 성취감도 느꼈다.
김향자
나는 소모임 회원 몇 명과 구치소에 구속되어 있는 와이에이치 노조간부들 면회를 갔다. 그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우리는 이미 동지애가 있었다. 면회를 할 수는 없었지만 힘내라고 사식 몇 끼니 값이라도 영치금을 넣고 돌아왔다.
구치소로 면회를 가는 일은 그 자체 하나의 시위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다.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교수, 목사, 학생들이 사회정의를 외치다가 수없이 구속되던 시절이었다. 유신의 폭압정치는 사회 곳곳을 어둡게 짓누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노동문제를 위해 싸우다 구속된 사람들의 면회를 자주 다녔다. 이런 작은 행동들이 암울한 시대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최금숙
추석 연휴가 지나자 상집간부 모두에게 수배령이 내렸다. 수배 전단지가 거리 곳곳에 붙어 있었다. 살인, 강도 같은 무서운 범죄자들의 사진으로 도배된 수배전단지는 많이 보았지만 내가 그 전단지의 주인공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다.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일단 2인 1조가 되어 숨었다. 나는 노조 감사였던 문선자 언니랑 한 조였는데, 방용석 지부장이 소개해준 집을 찾아가서 이 집에서 하룻밤, 저 집에서 하룻밤 피해 다니면서 잠을 자고 밥을 얻어먹었다. 한 오누이가 자취하는 성수동의 집에도 가서 체면 불구하고 며칠 지냈다.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쥐꼬리만 한 임금을 받고 일하던 오누이 노동자의 집은 방과 부엌이 따로 있는 구조도 아니었다. 어느 날 밖에서 부서 조합원들을 만나고 저녁에 들어와 보니 밥 지을 쌀이 떨어졌던 모양이다. 오빠 되는 사람이 라면에 콩나물을 넣고 끓여주었다.
김정숙
얼떨결에 결혼은 했지만 노조활동을 했던 지난 시절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탈춤반 회원들과 대본을 짜고 춤을 배우던 일, 소모임 활동을 했던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다녔던 서울의 활기찬 거리가 시시때때로 생각났다.
시집은 흙으로 만든 부뚜막에 무쇠 솥을 걸어놓은 재래식 부엌이었기에 밥을 짓고 국을 끓이려면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야 했다. 바짝 마른 장작이 타다닥 소리를 내며 붉은 불길이 춤을 추듯 활활 타오르면서 아궁이 속으로 사라졌다. 어떤 날은 하얀 한삼을 이리저리 뿌리며 덩실덩실 탈춤을 추던 내 모습과 동료들의 모습이 활활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어른거렸다. 그런 날은 나도 모르게 부지깽이로 부엌바닥을 툭툭 굿거리장단을 치면서 봉산탈춤 불림을 흥얼거렸다. 때로는 원풍노조 활동을 할 때가 그리워 저절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그럴 때마다 내손에 들려 있던 부지깽이는 북채가 되어 부엌바닥을 두드렸다.
김영희
어느 날 어머니가 “영희야 네가 서울 가서 돈 벌어서 네 오빠 고등학교 공부를 가르치면 좋겠다.”고 했다. 오빠는 그때 중학생이었다. 사실 우리 집 살림살이에 오빠를 중학교에 보낼 형편은 아니었지만 작은 아버지가 집안의 장손은 가르쳐야 한다고 부모님을 설득했다. 어머니 말씀에 아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가 이웃집 아주머니에게 취직자리를 미리 부탁해 두었던 터였다. 그 아주머니를 따라서 상경해, 구로공단 봉제공장에 시다로 들어갔다. 1976년, 당시 내 나이 열다섯 살이었다. 근로기준법에 정해 놓은 취업 연령이 되지 않아서 동네 언니의 주민등록 초본을 빌려서 그 언니 이름으로 취직했다. 처음에는 실밥을 따는 일을 했다. 그 당시 월급은 25,00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노동시간은 보통 12시간이었지만 수출 기한이 임박할 때는 수시로 철야작업도 해야 했다. 일을 하면서 꾸벅꾸벅 졸 때도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