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변화하는 사람은 고정된 틀에 갇힐 수가 없습니다”
진은숙이 세계를 마주하고 음악하며 살아가는 이야기
진은숙은 1980년대에 창작 활동을 시작해 초기작 〈트로이의 여인들〉, 출세작 〈말의 유희〉를 거쳐,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생황 협주곡 ‘슈’〉 등의 협주곡을 비롯해 오페라, 오케스트라 곡, 성악곡 등 40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이 작품들은 조지 벤자민, 켄트 나가노, 사이먼 래틀, 정명훈 등 명지휘자들과 연주자들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1,500회 이상 연주되었다.
진은숙은 동아시아 출신 여성이라는, 어쩌면 눈에 띌 수도 있는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내기보다는 고유한 음향적 상상력과 철저한 음악적 완성도로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서서히 벼려 갔다. 작품 하나하나에 자신의 모든 걸 바치는 열정으로 극도의 정교함을 추구하면서 걸어온 창작의 여정이 어느덧 40년이 되어 간다. 그사이에 진은숙의 음악은 백인 남성이 주도해 온 현대 작곡계를 넘어 오늘날 클래식 음악계의 독보적인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이 책은 여전히 확장되고 있는 진은숙의 경이로운 음악 세계를 가까이서 살펴보는 동시에 하나의 작품이 나오기까지 예술가가 어떤 시간을 거치는지 들여다볼 수 있는 책이다.
진은숙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다섯 명과 대화를 나누며 가감 없는 태도로 자신의 삶과 예술 세계를 펼쳐 보인다. 작품 창작의 계기, 지휘자나 연주자들과의 협업, 음악을 하는 이유, 창작의 과정, 물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관심, 자신을 향한 편견을 대하는 태도 등 다양한 이야기가 자연스러운 대화 안에서 펼쳐진다. 마치 개별 악기의 소리가 층층이 쌓여 하나의 세계를 완성해 가는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이 책에는 한 예술가의 다층적이고 독특한 면모들이 모여 색다른 예술론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담겨 있다.
“큰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너무 조그매지고……”
저마다의 독특한 세계가 교차하는 다섯 번의 대화
이 책의 엮은이인 음악학자 이희경은 진은숙의 음악 세계를 갈음하고 그의 작품으로 들어가는 길잡이 역할을 위해 이 대담집을 기획했다고 밝히며, “다층적이고 복합적인 예술가의 내면을 말이라는 다소 즉흥적인 틈새를 통해 들여다보려는 욕망은 추상적인 음악을 창조하는 예술가에게 더욱 가까이 가기 위한 소통의 방편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대화는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는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깝고, 이 책은 그런 날것의 생생함과 아슬아슬함 사이에서 예술의 조각을 발견하게 해 준다.
1장에서 ‘인터스텔라’ 김지수 기자는 인간 진은숙의 면모를 자연스럽게 끌어낸다. 진은숙은 창작하는 “인생 전체가 슬럼프”였다고 토로하면서도 “바깥에서 나를 인정하거나 성공하는 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는 음악하는 사람으로서 견지하는 삶의 태도를 보여 준다. 2장에서 글로벌 제약 기업인 로슈의 기술 책임자 마티아스 에센프라이스는 의약품을 개발하는 자신들의 ‘연구’와 진은숙이 수행하는 ‘예술’ 사이에서 접점을 찾아내고자 한다. 두 사람은 막막한 순간에 돌파구를 찾아내는 연구와 예술의 수행 방식이 아주 닮았다는 점을 보여 주며 실수를 인정하고 혁신을 지향하는 방법을 함께 모색한다. 3장 물리학자 김상욱과의 대화는 다른 인터뷰들과 달리 진은숙이 질문하고 김상욱이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물리학과 천문학에 대한 진은숙의 오랜 관심은 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독특한 관점을 형성했고, 이 대화는 진은숙의 확장하는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를 주인공으로 한 진은숙의 새로운 오페라 《달의 어두운 면》(2025)의 단초도 엿볼 수 있다. 4장에서 음악가 원일은 진은숙에게 예술의 의미와 고생스러운 작업을 계속하는 이유를 묻는다. 작곡가의 조건이나 음악 환경 등 창작자들이기에 공감할 수 있는 대화가 이어진다. 5장에서 음악학자 이희경은 그동안 진은숙이 만들어 온 음악을 세세하게 살피고, 앞으로 진은숙이 만들어 갈 음악의 실마리를 끌어낸다. 이 대화는 진은숙의 작품 세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 훌륭한 길잡이가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작품이 걸러지니 시간이 가장 무서운 재판관 같아요”
‘작곡가의 말’로부터 음악의 향유로 나아가기
접근하기 어렵게 느껴지는 음악의 속성에 대한 김상욱의 질문에 진은숙은 수학과 같은 음악의 추상성을 이야기하며 “음악은 시간 안에서 생기는 음의 구조”이므로 감상을 위해서는 시간과 인내심, 음악이 나아가는 방향을 이해하기 위한 사전 정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 대화는 음악이라는 예술의 속성을 잘 보여 준다. 김상욱의 말처럼 “음악은 작은 데이터만 가지고도 감정을 건드릴 수 있는 정말 재밌는 예술”이지만 현대음악은 현대미술보다 더 다가가기 어렵고 추상적인 예술로 인식된다. 작곡가는 자신이 전하려는 바를 음표로 표시하고, 그 음표들은 연주자를 통해 소리로만 우리에게 전달된다. 작곡에는 수학적인 엄밀성이 요구되지만 그 결과물은 감상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이 오묘한 작용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진은숙이라는 작곡가의 삶과 작품 세계를 통해 음악으로 다가가는 하나의 길을 열어 준다. 예술과 인간, 광활한 우주의 별로 나아가는 이 대화들을 등불 삼는다면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고 음악을 누리는 기쁨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