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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너 마리아 릴케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인문

라이너 마리아 릴케

박홍규의 호모 크리티쿠스 03
소장종이책 정가14,000
전자책 정가30%9,800
판매가9,800

라이너 마리아 릴케작품 소개

<라이너 마리아 릴케> 릴케는 우리의 시대정신과 정면으로 맞서는 반反민주 시인이다!
독재와 영웅주의를 미화하고 전쟁과 죽음을 숭배하며 도시와 시민을 혐오했던 릴케의 실체를 탐색한다!
흔히들 릴케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고 한다. 서양은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다. 외국 시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일제강점기부터 많은 시인과 일반인에게 영향을 미쳤고, 작품 또한 수없이 번역되었으며, 엄청난 연구서들과 함께 방대한 전집까지 나왔고, 그 작품이 교과서에까지 실렸을 만큼 국내에서의 명성은 하늘을 찌를 정도다. 그러나 릴케는 평민 출신이었으면서도 평생 귀족을 자처했고, 거의 언제나 귀족들과 함께 살면서 시인인 자신을 신이나 영웅으로 묘사했으며, 그런 영웅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전쟁을 예찬하면서 민중과 노동자를 멸시했다. 세상에 산적해 있는 수많은 문제를 도외시하면서 추상적인 말들만 늘어놓았다는 비판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그가 반민주 시인이라는 점은 문제다. 특히 그가 쓴 시가 파시즘의 냄새를 짙게 풍긴다는 점, 혹은 최소한 그것과 통한다는 점은 매우 심각하다. 이제 우리는 ‘독일 서정시를 완성한 위대한 시인’이라는 무조건적인 칭송을 버리고 신비화의 그늘에 가려진 릴케의 진면목을 재검토해야 한다. 일제 때부터 소개된 그가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때부터 독일식의 관념 일변도로 그를 해석하여 그를 칭송했던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일본식 죽음이나 순간적 사랑의 탐미주의와 유사한 그의 시가 서양문화란 이름으로 남긴 일제의 흔적임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물어봐야 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낱낱이 파헤칠 때 ‘20세기의 가장 지독한 반민주 시인’이라는 그의 참 모습이 드러날 터다. 이 책은 이 같은 의도에서 릴케의 재조명을 시도한 것으로 한국 최초로 릴케를 비판하는 시도이다. 하지만 편협한 이데올로기적 매도가 아니라 릴케의 삶과 작품을 일일이 분석하면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균형을 잃지 않고 릴케를 보려고 노력했다. 저자는 “나는 릴케 전문가도 아니고 독문학자나 문인도 아니다. 따라서 분석과 비판에 한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아마추어가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릴케가 반드시 오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정도로 평가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 책을 기회로 릴케에 대한 논의가 더욱 풍성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인다. 이 책은 총 9장으로 이루어졌다. 1장에서는 릴케 시의 본질이라고 하는 삶, 사랑, 고독, 신, 죽음의 모순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2장에서 8장까지는 그가 살아간 순서대로 삶과 시에 나타난 모순을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9장에서는 릴케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한국에서의 릴케 문제를 검토한다. 우리나라에는 유명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드러낼 용기를 막아버리는 숭배와 신비의 분위기가 팽배하다. 특히 시인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이 책은 그런 비민주의 분위기에 경종을 울리면서 시대착오적인 분위기를 일소하고, 시를 포함한 모든 것을 자유롭게 읽고 논의하는 새로운 자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시도는 저자가 책에 인용되는 시들을 손수 번역했다는 점이다. 한국에서 한국어로 쓰는 책이라면 의당 번역된 것을 인용하는 것이 옳다는 믿음 아래 필요한 내용들을 직접 번역했는데, 이 점 역시 내용과 더불어 새로운 시도로서 충분히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삶의 본질, 사랑, 고독, 그리고 신과 죽음의 문제에 천착했던 시인이라고?
한국인은 대개 청소년기에 릴케를 만난다. 교과서에 “주여 지난 가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로 시작되는 그의 〈가을날〉이라는 시가 소개되기 때문이다. 음악방송이나 라디오에 나오는 청취자 사연 등에서도 릴케의 시는 곧잘 언급된다. ‘장미의 시인’이라는 애칭과 함께 〈묘비명〉이 회자되고, ‘사랑의 시인’이라는 또 다른 별칭과 함께 “내 눈빛을 꺼다오, 그래도 나는 너를 볼 수 있으리……”라는 저 유명한 사랑 시도 종종 들을 수 있다. 뿐만 아니다. 릴케는 키가 작고 가냘픈 외모와 더불어 백혈병으로 죽은 시인이라는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마음이 여린 소년소녀들의 감성을 건드리기 일쑤다. 이 책의 저자가 반세기도 더 전 어느 가을에 릴케의 〈가을날〉을 처음 읽고 반한 뒤로 오랫동안 그와 그의 시를 사랑했던 것처럼 말이다. 현실의 릴케는 어땠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신과 자연과 사랑을 찬미하고,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인 죽음이라는 문제에 맞서 사색하면서 고독하게 살았을까? 수많은 릴케 찬미자들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대답은 “아니다”이다. 그는 오히려 매우 귀족적인 성향을 가진 영웅주의자였으며, 전쟁과 군대를 찬양했고, 자연스레 독재와 영웅을 미화하는 시를 썼던 파시즘의 시인이었다. 사랑의 시인이라는 이미지 역시 상당 부분 왜곡된 것이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운운하는 바람에 자유롭고 쿨한 이미지의 시인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지만 그가 주장한 사랑은 책임을 회피하는 사랑이자 순간에 몰입하는 사랑이며 오직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이기적인 사랑이었다. 아내도 하나뿐인 딸도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릴케에게 그토록 호의적이며 그를 신비화하는 데 열과 성을 다하는 것일까? 머릿속에 쏙 들어오기는커녕 난해하기 그지없는 그의 시를 널리 소개하지 못해 안달하면서 수많은 논문을 쓰는 것일까?

릴케는 귀족과 영웅, 남성의 권위를 찬미한 지독한 예술지상주의자였다
릴케는 평민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는 평생 귀족을 자처했다. 책에 싣는 자기소개에도 자신이 귀족 출신임을 강조했을 정도다. 그의 아버지는 중류 철도공무원으로서 원래 군인이었으나 군대에서 출세하지 못해 철도공무원이 되었던 사람인데, 릴케는 ‘군인이었던 아버지’를 특히 자랑스러워했다. 또한 그는 당시 독일의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프랑스적 기질을 사랑하여 어머니 쪽이 알자스에서 프라하로 이주해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하지만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에 대해서는 늘 호되게 비난했고, 자신의 병약한 체질과 어린 시절 부적응의 원인을 어머니 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러나 릴케는 나이 40에 군대에 징집될 만큼 건장한 체질이었다. 그가 어머니를 미워하며 책임을 전가한 것은 영웅시를 즐겨 쓰고 영웅을 찬미했던 만큼 현실에서 영웅이 되지 못한 데 대한 일종의 분풀이였을 것이다. 이처럼 귀족적인 것과 영웅주의에 집착했던 그는 자연스레 대중과 노동자를 멸시했다. 신, 천사, 영웅, 기사, 군인, 장군, 왕, 시인 등과 달리 대중과 노동자는 이적저것 따지고 생각하느라 삶과 죽음을 초월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다. 하다못해 그는 죽음마저도 ‘고유한 죽음’과 ‘대량 죽음’으로 나누어 영웅의 죽음과 달리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대다수 민중의 죽음은 ‘대량 죽음’이라며 멸시했다. 릴케는 또한 지독한 남성중심주의자였다. 그가 쓴 시에는 남성의 힘과 권위를 찬양하는 수단으로 혹은 남성의 완전성을 위해 도구화된 여성이라는 은유가 수없이 등장한다. 게다가 그는 극도의 예술지상주의자였다. 진정한 예술을 위해서라면 가족도, 친구도, 사회도, 종교도, 아니 예술 외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모도 아내도 외동딸도 다 버려야 진정한 예술가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 대한 생각조차 들지 않게끔 그들을 철저히 비판하여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도려내야만 완벽한 시를 쓸 수 있으며, 그럼으로써 스스로 절대의 신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릴케의 삶과 시는 난해한 모순 덩어리다
릴케는 ‘창작의 절대성’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버렸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오직 창조자인 자신만이 유일한 인간, 아니 신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생활과 예술은 적(敵)이었다. 창조를 위해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이 오로지 방해물일 뿐이므로 예술가는 수도사나 선승처럼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만일 쓰는 일을 그만둘 경우에는 차라리 죽기라도 하겠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고 말한 배경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예술가에게는 오로지 창조를 위한 정신적 욕구만이 남아야 하므로 남에게 자기 작품에 대한 평을 구하거나 문학잡지사에 작품을 투고하는 ‘짓’을 그만두라고 누누이 강조한다. 하지만 릴케는 자신이 그토록 경멸했던 ‘짓’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릴케에게는 물질이나 명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리 어려워도 다른 직업을 갖거나 잡일을 한 적이 없다. 물론 노동자로 일한 적도 없다. 20대 후반부터 시인으로 조금씩 유명해지고 나서 죽을 때까지, 부유한 귀족에게 빌붙어 호화롭게 살았다. 릴케는 학업 콤플렉스도 심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16년 동안 각종 공부를 했지만 당시 대부분의 문인들이 경험한 김나지움이나 대학공부엔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가 평생 천재나 영웅을 자처하고, 교육받은 중산층을 멸시하고, 자신의 유식함을 과시하기 위해 난해한 시를 썼던 데엔 그런 열등감도 한몫했을 터다. 게다가 그는 수많은 여성 편력을 미화하면서 이를 영웅적 사랑으로 정당화했다. 시에서는 영웅을 노래했지만 현실에서는 비영웅적으로 살았다는 모순, 이것이야말로 릴케의 삶과 시에 드러나는 가장 큰 모순이 아닐까?

마지막이 되어야 할 귀족 영웅시인 릴케
20세기 시인 중에서 릴케와 가장 닮은 사람을 꼽는다면 파블로 네루다일 것이다. 그 역시 릴케처럼 많은 여인을 사랑했고 많은 사랑시를 남겼다. 하지만 네루다는 남미의 현실을 직시한 뒤 릴케를 떠났고, 그 결과 위대한 참여시를 썼다. 물론 시에는 좋은 시와 좋지 못한 시의 구별이 있을 뿐 참여시라느니 순수시 따위의 구별이 있을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책은 한때 릴케를 한때 좋아했다가 싫어하게 된 저자의 고백이다. 따라서 릴케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칭하고, 그의 시를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라고 하는 전제 아래 쓰인 일반적인 릴케주의자들의 입장과 전혀 다르다. 저자가 릴케는 물론 그의 시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그는 귀족의 시대가 사라진 것을 통탄하고, 귀족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귀족의 눈으로 대중의 시대를 경멸하는 시를 써서 귀족과 그 동류인 자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릴케를 적극 수용한 사람들 역시 정신적으로 그런 기질을 갖는 사람들이었다. 전통, 농경사회, 인간적 다양성에 무게 중심을 두기보다는 비인간적 획일성을 긍정하는 가운데 근대적 기술문명, 도시문명, 인간주의를 부정하고 있는 탓이다. 물론 저자가 그런 것들의 가치를 전면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근대적 기술문명, 도시문명, 인간주의를 비판한다고 해서 전근대적 전통, 고향으로 상징되는 농경사회, 비인간적 획일성으로 돌아가자는 주장까지 찬성해야 할까? 따라서 릴케는 이제 인류 역사에 남은 마지막 귀족 영웅시인이 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시인은 영웅주의나 귀족주의에 빠져 건강한 민중의 삶을 멸시하는 그런 시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출판사 서평

<본문 중에서>

릴케를 포함한 모든 사상가나 예술가들에 대한 나의 관심은 민주주의에 있다. 즉, 모든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비롯한 인권, 권력 분립과 시민 자치를 믿는 민주주의에 있다. 물론 모든 사상가나 예술가들의 관심이 반드시 민주주의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사상을 민주주의라는 하나의 잣대만으로 평가할 수도 없고 그렇게만 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내가 관심을 갖는 민주 시민의 소양 내지 교양의 범주에서라면 반민주주의적인 모든 사상가나 예술가들이 철저히 재검토되고 비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나 예술가들이라고 해도 그들이 반민주적이라면 충분히 비판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 전제다. 우리 모두 민주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한 함께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진보든 보수든, 개혁이든 수구든, 좌든 우든 간에 민주주의는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부정하는 전체주의적 공산주의는 물론 파시즘이나 독재 전체주의도 인정할 수 없다. 나는 아무리 위대한 사상가나 예술가라고 해도 그들이 전체주의를 찬양한다면 받아들이기 싫다. 그런 사람들의 사상이나 예술엔 가치가 없다. 위대하다고 찬양할 수 없음도 물론이다. (……) 그러나 릴케 삶의 본질에는 그가 평민 출신이었으면서도 평생 귀족을 자처했고, 거의 언제나 귀족들과 함께 살면서 시인인 자신을 신이니 영웅이니 표범이라고 묘사했으며, 그런 영웅이 주인공인 전쟁을 예찬하면서 민중과 노동자를 멸시했고, 귀족 부인들을 포함한 무수한 여인을 사랑했던 사실도 포함된다. 그가 노래한 삶, 사랑, 고독, 죽음, 신이란 바로 그런 귀족 영웅들의 것이기도 했으므로 그는 귀족적이라느니 보수적이라느니, 심지어 히틀러의 선구자라는 평까지 들었다. 꼭 그런 이유가 아니라 해도 릴케가 노래한 삶, 사랑, 고독, 죽음, 신에 관한 내용은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나 벤야민(Walter Bendix Schöflies Benjamin, 1892~1940)을 비롯한 많은 이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억압과 가난을 비롯하여 세상에는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는데, 그것을 전혀 모른 체하고 추상적인 내면에 숨어서 헛소리만 했다는 비판들이다._〈여는 글〉 중에서

나는 이 같은 노골성보다도 이 시가 지독한 남성중심주의 시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설령 그 시가 성기의 시적인 묘사라고 해도 그 전체가 남녀 성기의 묘사가 아니라 남성 성기 중심으로서 여성의 자궁(모태)은 그저 무수한 전사이자 군사인 정자를 내뿜을 음경이 지나는 곳으로만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한 사람을 위대하게’ 하는 것, 즉 남자를 성적으로 위대하게 하는 것이지 여인과의 사랑을 성적으로 노래하거나 그 사랑의 완전함 혹은 절대성을 찬양하는 게 아니다. 게다가 자신의 수많은 왕성한 정자를 무수한 전사와 군사 무리라는 대단히 군사적이고 전투적인 비유로 찬양하고 있다. 이 시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 성적인, 관능적인, 에로틱한, 군사적인 릴케에게 도리어 매력을 느낄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이는 적어도 일반적인 릴케 이미지와는 다르다. 고독하고 성스럽고 내면적이며 정신적이라는 등의 릴케 이미지와 변강쇠 같은 릴케를 일치시키기란 성에 대한 우리의 터무니없는 이중 잣대를 감안한다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을까? 설령 그 두 가지가 일치한다고 보려 해도, 위의 시 어디에서 고독하고 성스럽고 내면적이며 정신적인 요소를 찾을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섹스를 하는 남자는 고독하고, 섹스는 성스러운 것이며, 내면 및 정신과 일치되는 것이라는 등 철학이나 정신분석학을 동원하면 가능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우리는 시는 그냥 시로 읽도록 하자._〈과연 릴케를 읽어야 하나?〉 중에서

시인은 오래된 집을 찬양하면서 그 밑으로 보이는 임대 연립주택에 등골이 오싹해진다고 느낀다. 이러한 태도는 릴케가 뒤에 파리나 이탈리아, 러시아와 북독일, 북아프리카와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보게 되는 거대한 신전이나 스핑크스 등에 대한 찬양으로 이어짐과 동시에 파리를 비롯한 대도시의 서민주택이나 공공건물에 대한 혐오와 짝을 맞추게 된다. 즉, 릴케 시의 중요한 주제의 하나인 도시 혐오다. 또한 시인은 「야만인들」이란 제목의 시에서 바로크시기에 지어진 궁전을 “임대 아파트 단지에 자리를 내놔야 할 운명”이라며 개탄하고 “속된 무리들이 그곳을 덮치고 있”다고 탄식한다.(전집1, 56) 또한 시인은 「돌출창이 있는 구석방에서」라는 제목의 시에서 “일상의 번잡한 일들을 보지 않으려”, “그 오래고 오랜 집으로 도망”치고 “더 이상 바깥을 내다보지 않”는다(전집1, 22)고 노래한다. 그래서 시인은 「의심스런 경우엔」에서 당시의 체코민족과 독일민족의 투쟁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애매한 태도를 보인다.
민족들끼리 싸우는 거친 소리는
내게 한마디도 들리지 않네.
나는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으리.
정의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있지 않으니까.(전집1, 55)_〈릴케 작품에 드러난 민중 멸시와 현실 도피〉 중에서

동물원에서 우리 속을 배회하는 동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시를 이해하리라. 자신을 그 동물과 같이 느껴본 사람도 많으리라. “수천의 창살”에 갇혀 “의지가 마비되어” 사는 듯한 느낌은 우리의 일상에서도 자주 찾아오지 않던가? (……) 그 특징이 시인의 주관을 배제한다는 점이라고 하지만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주관적이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가령 이 시를 쓸 무렵 릴케가 로댕이라는 거인 앞에서 얼마나 왜소함을 느꼈을까, 또는 이 시가 실린 『신시집』에서 보듯이 파리라는 추악한 대도시에서 그가 얼마나 소외감을 느꼈을까 하는 점들을 자연스레 짐작할 수 있다. 적어도 시 자체에서 시인의 존재는 분명히 배제된다. 그 전의 시에서는 ‘나’라는 시인의 존재가 분명히 나타났고, 그 ‘나’의 감정이 실렸는데 말이다. 그러나 위 시에서 표범을 보고 그 날렵함을 예찬하는 시인도 분명히 우리 앞에 존재한다.
그런데 시인이 유독 표범을 노래한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앞에서 릴케 시의 본질이라고 설명한 영웅주의의 표상으로 표범을 선택한 것은 아닐까? 가령 앞에서 보았던 『기수 크리스토프 릴케의 사랑과 죽음의 노래』에 나오는 젊고 씩씩한 귀족 기수 릴케의 “말을 타고 달린다, 달린다, 달린다, 하루 종일, 밤새도록, 또 하루 종일. 달린다”라는 표현은 「표범」의 “아주 조그만 원을 만들며 빙빙 도는,/ 사뿐한 듯 힘찬 발걸음의 부드러운 행보”와 연관되는 이미지가 아닐까? 여기서 시인은 동물원의 표범을 비롯한 동물들에 감정이입을 하면서도 그것들이 살았던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에 대해서는 노골적인 불만을 드러낸다._〈표범 예찬과 흑인 혐오〉 중에서

‘고유한 죽음’과 그렇지 못한 ‘대량 죽음’의 대비는 앞에서 보았듯이 릴케의 중요한 개념이다. 릴케, 즉 말테는 여기서 단순히 죽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는 삶 자체를 말한다. 우리의 삶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성복처럼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특히 죽음을 “병에 딸려 있는” 것이 되었다고 본다. (……) 그러나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집에서 맞는 고유한 죽음은 훌륭한 상류층의 것이고, 그렇지 못한 대량 죽음은 가난한 사람들의 죽음이라고 릴케가 보고 있다는 점이다.(전집12, 16) 과연 그럴까? 고유한 죽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경거리일 뿐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대량의 죽음을 맞아도 되는 것인가? 고유한 죽음이 인간적인 죽음이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여기서도 나는 반민주적 릴케를 본다. 여하튼 그런 고유한 죽음의 보기가 말테의 할아버지인 시종관의 “두 달이나 계속된” “요란한” 죽음이다.(전집12, 17-22) 그러나 그렇게도 장황하게 묘사되는 그 별난 죽음이 결코 훌륭한 죽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심지어 인간의 죽음이라기보다 동물의 죽음 같아 릴케가 말하는 그 죽음이 왜 대량의 죽음보다 가치 있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장례식을 별나게 꾸미는 우리 왕족이나 양반네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 것일까? 반면 대량 죽음은 과연 무의미한가? 아무리 시시한 죽음이라도 그 하나하나에는 고유한 삶과 가치가 들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을 병원에서의 대량 죽음이라고 무시하는 것이 과연 시인의 감수성인가? 또 모든 존재에 신성이 있다고 보는 범신론을 믿는 자의 태도인가?_〈두 가지 죽음〉 중에서

여기서 우리는 당시 유럽의 격렬한 식민지 쟁탈전의 무대였던 비참한 북유럽의 현실 대신 북아프리카를 코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환상의 대지로만 느낀 릴케의 오리엔탈리즘을 엿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집트의 사자(死者) 숭배에 공감했고, 이는 뒤에 『두이노의 비가』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릴케는 비가의 천사가 기독교의 천상의 천사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도리어 이슬람교 천사와 더욱 관계가 깊다고 말했다.(홀트후젠, 163) (……) 스핑크스 등에 대한 찬양 이상으로 무엇보다 이슬람 세계가 릴케를 충동질한 것은 영웅과 전쟁의 세계였다. 우리는 이미 그것이 릴케의 초년 시절부터 그에게 뿌리박힌 가장 원초적인 세계였음을 보았다. 『두이노의 비가』도 근본적으로 그런 영웅 찬가이다. 6비가도 영웅에 바친 노래인데, 그 영웅은 바로 이집트 카르나크 옛 신전에 새겨진 영웅, 즉 전투 장면을 묘사한 부조 속에 있는 영웅이다. (……) 이상 이슬람에 대한 릴케의 이해는 오늘날 우리가 아는 이슬람 가운데서도 가장 원리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공격적 무력주의 내지 폭력주의 이슬람을 연상케 한다. 이슬람은 본래 그런 영웅주의적이고 군사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인 것이 아니었는데, 오랫동안 이슬람과 적대하며 전쟁을 반복해온 유럽에서는 이슬람에 대한 그런 편견이 굳어졌다. 이는 이슬람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왜곡이라고 할 수 있는 허위이자 허구로서 지금까지도 부시 류의 서양제국이 이슬람을 공격하는 근거가 되었다. 따라서 이슬람과 서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그런 오리엔탈리즘적 왜곡을 그만두고 이슬람의 평화주의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도 서양에서는 그것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이런 마당에 참된 평화가 가능할까? 릴케는 그런 왜곡된 이슬람의 공격적 군사주의를 예찬한다. 이는 그가 자신의 반민주적 사고가 이슬람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릴케의 오리엔탈리즘은 그 자체가 허위일 뿐 아니라 그것이 동서양의 평화를 파괴하는 무서운 허구라는 점에서 더욱 가공스럽다. 이 점에서도 릴케는 세계평화를 파괴하는 데 앞장선 사람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__〈이슬람 환상〉 중에서

주여, 때가 왔네. 지난여름은 아주 위대했네.
너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놓고
벌판에 바람을 풀어다오.
마지막 과일들이 익도록 명하고
따뜻한 이틀을 더 주어
그 완성으로 몰아가고 강한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을 넣어다오.
지금 집 없는 자는 어떤 집도 짓지 않네.
지금 외로운 자는 오랫동안 외로이 머물러
잠 못 이루어 독서하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잎이 지면 가로수 길을
불안스레 이리저리 헤맬 것이네.(전집2, 42-43)

제1장에서 본 성교시와 마찬가지로 “주여”로 시작되는 위 시는 평범한 시다. 그냥 읽어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고 별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풍요한 가을 속의 고독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래서 좋은 시다. 그러나 적어도 제3연 제1행에서 말하는 “집 없는 자는 어떤 집도 짓지 않네”라는 구절을 정말 집이 없는 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릴케는 집 없는 자는 집이 없는 것에 도리어 만족하라고 가르쳤다. 이어지는 제2행의 외로운 자가 누구의 위로도 받지 못하고 독서를 하고 편지를 쓰며 방황하는 것도 릴케가 말하는 고독, ‘소유하지 않는 사랑’의 가르침을 뜻한다. 그러나 이 책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이 우리는 그러한 릴케 식 고독이나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할 수 없다.
위 「가을날」에서는 그 정도로 그치고 영웅이나 천사나 신, 특히 전쟁을 찬양하지 않아 다행이지만, 우리는 앞에서 릴케가 쓴 그런 시를 많이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 책의 제1장 처음에서 물었던 것, 즉 “과연 릴케를 읽어야 하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_〈한국의 릴케〉 중에서


저자 프로필

박홍규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52년 9월 9일
  • 학력 일본 오사카시립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영남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영남대학교 법학 학사
  • 경력 영남대학교 기초교육대학 교양학부 교수
    영남대학교 법과대학 법학부 교수
    1998년 영남대학교 법과대학 학장
    1995년 민주주의 법학연구회 회장
  • 수상 1997년 제38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2014.12.31.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_ 박홍규
세계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글을 쓰는 저술가이자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이다. 인문·예술의 부활을 꿈꾸는 르네상스맨으로 현재 영남대학교 교양 학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자전거 타기와 걷기를 사랑하며, 자유·자연·자치의 삶을 실천하고자 늘 노력한다. 그동안 쓴 책으로 니체는 틀렸다, 자유란 무엇인가, 함석헌과 간디, 내 친구 톨스토이, 가거라 아들아 용감하게;루쉰의 외침을 듣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라만차의 돈키호테, 독학자 반 고흐가 사랑한 책, 독서독인, 까보고 뒤집어보는 종교, 이반 일리히, 윌리엄 모리스의 생애와 사상, 메트로폴리탄 게릴라,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 아나키즘 이야기, 플라톤 다시 보기, 인디언 아나키 민주주의 등이 있다. 함께 쓴 책으로는 거꾸로 생각해봐! 세상도 나도 바뀔 수 있어, 세상을 바꾼 창조자들, 청년 인생 공부 등이 있다.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목차

저자의 말
인용 범례
여는 글_누가 릴케를 함부로 노래하나?

1장 왜 릴케인가?
과연 릴케를 읽어야 하나? | 한국인들은 릴케를 어떻게 받아들였나? | 릴케의 삶은 모순적이다 | 릴케 고독의 모순 | 릴케의 사랑법 | 릴케는 동성애자인가? | 릴케 ‘여성성’의 모순 | 릴케는 신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 릴케 ‘내면성’의 모순

2장 영웅주의자 소년군인
릴케의 자기소개 | 시대 배경 | 어린 시절 | 육군소년학교 | 린츠 시절 | 프라하 시절 | 영웅주의 | 첫 시집 『가신에게 바치는 제물』 | 릴케 작품에 드러난 민중 멸시와 현실 도피 | 니체의 영향

3장 청년 귀족
뮌헨 시절 | 루 살로메 | 릴케의 초기 예술론 | 『백의의 후작부인』과 『기수 크리스토프 릴케의 사랑과 죽음의 노래』 | 『피렌체 일기』 | 러시아 여행 | 러시아 여행은 릴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 『기도시집』 제1부 | 결혼 | 『기도시집』 제2부 | 『형상시집』 | 유겐트슈틸 | 소외된 사람들

4장 파리의 반도시주의 영웅
대도시 파리를 혐오하다 | 표범 예찬과 흑인 혐오 | 『로댕』 | 『기도시집』 제3부 | 로마와 북구 | 『신시집』 | 세잔과 유대인

5장 반도시주의자 영웅 말테
『말테의 수기』는 어떤 책인가? | 두 가지 죽음 | 시인과 빈민 | 새롭게 보는 법 | 어린 시절, 사랑, 시간 | 대중, 고독, 빈민 | 소유하지 않는 사랑 | 돌아온 탕아

6장 두이노의 성주 영웅시인
두이노 성 | 이슬람 환상 | 제1비가 | 제2비가 | 제3비가

7장 전쟁주의자 시인영웅
전쟁 예찬 | 사랑과 징집 | 전후의 영웅 찬양 | 제4비가 | 제5비가 | 제6비가 | 제7비가 | 제8비가 | 제9비가 | 제10비가

8장 최고의 시인영웅 오르페우스
소네트 제1부 | 기념비를 세우지 마라 | 소네트 제2부 | 「젊은 노동자의 편지」 | 고유한 죽음 | 「묘비명」 | 「묘지에서의 명상」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릴케의 시

9장 왜 다시 릴케인가?
릴케 삶과 문학의 개관 | 한국의 릴케 | 김춘수

닫는 글_‘마지막’이 되어야 할 귀족 영웅시인 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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