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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 정치철학, 프로이트 칼 융 괴벨스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무의식 정치철학, 프로이트 칼 융 괴벨스

소장전자책 정가3,000
판매가3,000

무의식 정치철학, 프로이트 칼 융 괴벨스작품 소개

<무의식 정치철학, 프로이트 칼 융 괴벨스> ‘경제적 欲望無意識’과 ‘정치적 集團無意識’



현실세계의 인간존재는, 어떻게든 나름대로 意識的(理性的)인 존재인 양 살아내고자 하지만, 결국 철저히 無意識에 의해 작동하는 무의식적 존재임에 대해서 記述코자 한다. 그러한 모티브는, 필자의 실제적인 체험에서 起因한다. 필자는 몇해 전, ‘鬪人 동물농장’이라는 곳에서, 雜役夫 노릇으로써, 수 개월 동안 糊口했다. 그러면서 사회의 최하층에게 가해지는, 실로 잔혹한 ‘갑질’을 여실히 체험했다.
그런데 그것은 非但 어느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 農場의 構成員 전체가, 핏발선 흡혈귀처럼, 어떤 대상이 자기보다 한치라도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집단적으로 온갖 폭력을 행사하는, 그런 類의 것이었다. 그래서 ‘터’가 중요하다는 말들을 하는 모양이다. 당시에는 그 ‘동물농장의 터’가, 그런 ‘짐승 같은 자’들만 꼬여드는 시공간으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회상해 보아도, 그 ‘동물농장’에 모여사는 ‘동물’들은, 죄다 하나 같이 참으로 빈곤하고 저급한 족속들이었다. 그래서 필자로서는, 최저임금도 되지 못하는 급여를 받으면서도, 나름대로 公心을 갖고서, 최선을 다해 맡은 일을 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 결과는 가혹한 ‘갑질’이었다. 그러니 ‘거지가 거지 꼴 못본다’는 말이 있는 모양이다.
특히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것은, ‘1-804’의 狂氣어린 ‘갑질’이었다. 폐기물 비용을 납부하라는 메모를, 현관문에 붙여 둔 일을 빌미로, 마치 ‘미친 개’처럼, 온 동네가 떠나갈 듯, 거품을 물고 짖어대며, 위세를 떨던 그 눈빛이, 당시 필자로서는 당최 ‘짐승’의 것으로도 뵈지 않았다. 더욱이 그러한 사태를 관망하며, 야비한 표정을 짓던 ‘동물농장’ 구성원들 전체의 눈빛 또한 그러했다.
이후, 그 사건은 지속적인 trauma가 되어서, 여전히 필자를 괴롭히고 있다. 당시 필자는, 단지 자기들의 ‘동물농장’에 고용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든지 ‘갑질’을 해도 무방하다고 여기는, ‘동물’들의 집단적인 사유방식이, 참으로 기괴했으며 궁금하기도 했다. 결국 ‘동물존재’는 그런 천박하고 유치한 차원을, 결코 넘어설 수 없는 것일까.
그저 간혹 뉴스에서나 접하던 일을, 필자가 직접 당하고 보니, 그 弊害는 당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나마 그 사건은, 저급한 ‘동물농장’에서 천박한 ‘짐승’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었다. 과거에 필자는, 대한민국 최상층의 學閥을 지녔다는 교수, 강사, 박사, 석사 따위가 모여 있다는 곳에서도, 유사한 ‘갑질’을 체험했었다.
하긴 大統領까지도 集團無意識의 搖動으로써 이내 ‘갑질(탄핵)’당하는 세상이니, 그런 류의 ‘갑질’은 크게 문제될 것 없는지 모른다. 다만 필자로서는 인상적인 지점이, 그러한 일련의 作態들에 공통하는 것은, 그 정치적(사회적) 決定의 正當性이나 正統性이, 지극히 恣意的이고 集團的인 무의식에 根幹을 둔다는 점이다.
때문에 필자는, 그러한 ‘갑질’의 토대가 무의식에 기반하고 있으며, 특히 集團無意識으로써 작동한다는, 오랜 窮究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었다. 이에, 그 이론적 바탕을 論述하고, 논리적으로 검증하여, 좀 더 확장된 主張을 제시하는 것이다.

모름지기 현실세계에서 政治의 실제적인 목적은 권력의 簒奪이다. 原論的으로 정치는 인간세계를 보다 나은 상태로서 작동시키는 근본적인 원리이지만, 실제적으로 인간존재에게 체감되는 정치는, 곧 政權의 向背이다. 인간존재가 이러한 정권은 목적하는 까닭은, 富와 權力과 名譽를 누리기 위함이다. 이런 것들을 좋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권은 무엇에 의해 작동하는가. 그것은 현대적 표현으로는 經濟力이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東西를 막론하고서, 백성(국민)을 먹여 살라지 못하는 정권은 존속될 수 없다. 그렇게 백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경제력이다. 따라서 경제력을 약화시킨다면, 그러한 정권은 결코 지속될 수 없다.
그런데 경제력은 지극히 無意識的인 영역에 토대를 둔다. 대체로 경제활동은 다분히 意識的인 행위로서 인식한다. 그러나 경제활동은 결코 의식적인 활동만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너무도 무의식적인 행위이기 십상이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가장 기초적으로 衣食住에 있다. 옷을 입고, 밥을 먹고, 집을 갖는다는 것이야말로, 경제활동의 始發點인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의식주에 욕망이 덧씌워지기 어려웠다. 財貨를 생산하는 역량이나 기술이, 그저 가장 기본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명활동이 적극화되면서, 이제 잉여생산물이 축적되는 현상이 발생한다. 더욱이 기술발전도 가속화되어, 더욱 많은 ‘所有的 欲望’을 부추기게 된다.

본래 욕망이란, 지극히 무의식적인 정신작용이다. 그래서 욕망을 제어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것이다. 만약 자기의 욕망을 自由自在할 수 있다면, 그는 聖人君子나 賢者로 불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세계의 대부분의 인간존재는, 철저히 욕망에 服務한다. 욕망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목적하며, 욕망에 지배당하는 상황인 것이다.
인간존재의 욕망이, 가장 절실하게 顯現되는 현장이, 바로 경제활동이 실현되는 市場이다. 그래서 시장이 발달할수록 인간존재의 ‘무의식적 욕망’을 자극하는 기술도 발전한다. 그러한 경제력이 정치권력에 가장 주요한 변수로서 작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정권은 죽는다’는 법칙이 규정될 수 있다.
다만,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서도, 정권이 유지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북한이다. 그러할 때,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고통은 오롯이 백성의 몫이다. 그리고 정권은,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부분에 대한 反動을 상쇄하기 위해, 아주 가혹한 정치를 실현케 된다. 이는, 역사에서 쉬이 볼 수 있는, ‘정치와 경제의 악순환’이다. 다만 그 고통의 몫일 따름이다.
대한민국의 경우,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경우, 현대에는 정권이 선거를 통해 移讓된다. 그런데 그 과정은 결코 의식적이지 않다. 그러다보니 당최 理性的으로 납득되지 않는 현상도 目睹하게 된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는, 경제활동이나 정치활동을 지극히 의식적인 활동으로서 전제하는 오류 탓이다.
경제활동이나 정치활동이 의식적인 것으로 분별됨은, 그것이 인류문명의 高度한 지식으로써 포장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자꾸만, 門外漢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전문적인 이론과 논리로써 무장하고 있다. 그래야만 경제활동이나 정치활동이, 지극히 理性的이며 意識的인 것으로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제활동은 철저히 ‘무의식적 욕망’에 의해 작동하고, 그러한 경제활동에 의해 조작되는 것이 정치권력 임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한 작동방식을 알지 못하면, 현실세계의 경제활동과 정치활동은, 올바르게 인식될 수 없다. 이에, 그 근원적인 법칙과 원리를 모색하였으며, 그 大綱을 제시한다.

대체로 ‘欲望(desire)’은, 선천적인 것이라고 분별할 때, 本能이라고 할 수 있다. 심리학자 ‘빌헬름 분트’나 ‘윌리엄 맥도갈’은, 食慾, 性慾, 群居, 模倣, 호기심, 鬪爭, 逃避 등을 본능으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칼 마르크스’는 식욕을,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성욕을, ‘프리드리히 니체’나 ‘알프레트 아들러’는 권력욕을 근본으로 하여, 자신들의 학설을 만들었다.
현대의 심리학은 個體의 動因을, 단순히 선천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생각하여, 기본적 욕구라고 본다. 심리학자 ‘쿠르트 레빈’은, 진정한 욕구와 準욕구로 구분하였고, ‘제임스 프레스콧’이나 ‘게이츠’는, ‘생리적·생물적 욕구’와 ‘사회적·인격적 욕구’의 2가지로 크게 구별하였다.
‘생리적·생물적 욕구’는 식욕, 배설욕, 수면욕, 활동욕, 성욕 등이며, ‘사회적·인격적 욕구’는 사회적 認定의 욕구, 집단소속의 욕구, 애정의 욕구, 성취의 욕구 등이다. ‘에이브러햄 매슬로우’는 생리적 욕구를 기초로 하여, 안전의 욕구, 애정의 욕구, 自尊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 5가지 욕구가 계층적 구조를 형성한다고 설명하였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욕망 개념을 더욱 정교하게 분석하였는데, 라캉의 ‘욕망(d?sir)’은, 프로이트의 용어 ‘所望(Wunsch)’의 프랑스 번역어에 해당한다. 이는, 프로이트의 표준판 번역본에서 ‘wish’로 번역되어 있다.
‘라캉’은,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를 따라서,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때 욕망은 ‘의식적 욕망’이 아니라, 항상 ‘무의식적 욕망’에 해당한다. 또한 이 ‘무의식적 욕망’은 완벽하게 性的인 것이다.
그런데 이는, 지나치게 ‘프로이트의 神話’에 傾倒되어버린 결과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욕망은 ‘무의식적 욕망’이며, 그것은 철저히 경제활동에서 發現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따라서 자연스레 정치철학의 영역에 이르게 된다. 前述했듯이, 경제를 살리지 못하는 정치권력은 죽기 때문이다.
-하략-


저자 소개

‘욕구(欲求·慾求, need)’ 또는 ‘욕망(欲望, desire)’은, 생물이 어떠한 혜택을 누리고자 하는 감정으로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채우기 위한 느낌이 강하다. 시민 윤리에서는, 적절한 정도의 욕망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이지만, 과도한 욕망은 주변인에게 피해를 입히며, 자신 또한 망친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욕구가 충족되면 만족감과 쾌감을 느끼고, 충족되지 못하면 고통과 불만을 느끼게 된다. ‘매슬로우’는, 다음과 같은 5단계의 욕구가 있다고 생각했다. 제1수준: 기아나 갈증 등의 생리적 욕구, 제2수준: 육체의 위험을 피하려는 안전욕구, 제3수준: 가까운 대인관계를 원하는 소속·애정욕구, 제4수준: 자기존중과 사회적 인정을 원하는 평가욕구, 제5수준: 일을 성취하려는 자아실현욕구 등이다.
인간존재는 먼저 가장 낮은 차원의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킬 필요가 있으며, 그것이 충족된 후에 점차 고차원의 욕구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인간과 다른 동물에 공통되는 욕구는,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되며, 생물학적 욕구라고 불린다.
이러한 ‘생물학적 욕구’에는 饑餓욕구, 渴症욕구, 性욕구, 授乳욕구, 養育욕구, 小兒的 依存욕구, 住居作成·使用 욕구, 일반활동욕구, 일반탐색욕구, 휴식·수면욕구, 배설욕구, 遊戱·審美욕구 등 적극적 욕구와, 공포(손상회피)·공격(장해회피)·군거성(독립회피) 등 소극적 욕구(혐오)가 있다.
이러한 욕구(욕망)들은, 물론 자급자족이 불가능하여, 사회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충족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각양각색의 사회적 기술을 고안하고 사용한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사회적 욕구’라고 불리는 욕구이며, 지배·경쟁·청구·원조의뢰 등의 자기주장욕구, 굴복·증여 등의 自己卑下욕구, 모방·상호원조·협동작업 등의 집단화욕구, 집단에 대한 충성심 등의 집단주장 욕구로 세분된다.
여기서 ‘생물학적 욕구’는 경제활동과 연관되며, ‘사회적 욕구’는 정치활동과 연관된다. 단지 그러한 개념에 대한 표현을 심리학이나 정신의학의 學術語로써 표현하는 탓에, 경제나 정치로부터 離隔되어버린다. 따라서 이러한 심리작용(정신작용)의 바탕과 원리를 살핌으로써, 인간존재의 삶의 토대가 되는 국가공동체가 작동하는 원리 또한 이해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

경제활동은 ‘欲望無意識’에 의해 작동한다. 따라서 그러한 무의식을 적절히 조작하지 못하면, 그 사회의 경제력은 침체된다. 그리고 경제력이 침체됨으로써 當代의 정치권력은, 다양한 방편으로써 권력을 박탈당하게 된다.
그런데 비단 경제활동을 목적이나 수단으로 삼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할 때에는, 오롯이 政權 자체를 목적하게 된다. 政權簒奪이 목적이라면 경제활동에서의 ‘욕망무의식’보다는, 정치활동에서 작동하는 ‘集團無意識’을 조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러다보니 ‘욕망무의식’과 同時的이고 二重的으로 작동하는 것이 ‘집단무의식’이다.
이에, 정치적 ‘집단무의식’에 대해 천착하였다. 이는, 마치 天氣漏泄과 같다. 흔히 정치활동은 지극히 의식적인 활동인 것으로 전제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현실세계 인간존재의 활동 중에서 특히 의식적이지 않은 분야가 政治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이해한다면, 정치활동을 작동시키는 본질적 원리를 알게 된다.
다만, 이러한 ‘욕망무의식’과 ‘집단무의식’의 메커니즘은 철저히 善意를 좇아 이용되어야 하지만, 역사적 사례로써 검증할 때, 대부분 惡意的으로 이용됨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서민대중으로서는, 적어도 이러한 메커니즘의 작동방식이나마 인식할 수 있다면, 다소나마 경제적, 정치적 굴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을 記述하는 목적이다.

‘?tman’은 힌두교의 기본 敎義 중의 하나다. 힌두교의 또 다른 기본 교의인 ‘브라만’이 中性的 원리라면, ‘아트만’은 인격적 원리라 할 수 있다. 힌두교에서 생명은 ‘숨’과 같은 의미로 쓰였으므로, ‘아트만’의 원래 뜻은 ‘숨쉰다’는 뜻이다. 한국어에서 생명을 ‘목숨’으로 표현하는 것과 유사하다.
여기서 숨을 쉬는 행위는, 지극히 무의식적인 것이다. 呼吸을 의식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질병이나 육체적 위험에 의해, 억지로 호흡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그렇게 숨쉬는 행위가 의식적이게 되면, 인간존재의 목숨은 위태로워질 수밖에 없다.
‘숨’이란, 天地自然 안에서 스스로/저절로 작동하는 자연스런 생명원리여야 한다. 그러한 자연스러움이 해체되면, 인간존재의 목숨은 유지될 수 없다. 경제활동이나 정치활동도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울 때, 최상의 상태임은 明若觀火다.
그런데 그러한 경제나 정치가 실현된 例는 全無하다. 그저 상상 속 이상향에서나 가능할 따름이다. 그러하므로 이러한 원리를 현실세계에서 실제로 작동시킬 수 있는 방편의 모색은, 정치활동과 경제활동에 있어 결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칼 융’은, 集團無意識 중에 여러가지 원형의 존재를 인정했지만, 그것들은 최종적으로 ‘自己(Selbst)’의 원형에 귀착한다고 생각했다. ‘자기 원형’은 마음(영혼) 전체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 외적 세계라는 교섭의 주체인 자아는, 자기원형과의 심리적 에너지를 통한 역동적인 운동으로써, 변용하고 성장해서, 理想 개념으로서의 ‘완전한 인간’을 목표로 한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완전한 인간’으로서 ‘자기 원형’을 실현하지 못한다면, 현실세계의 정치와 경제를 위시한 활동들은, 결코 무의식의 영역을 벗어날 수 없다. 물론 ‘프로이트’의 ‘슈퍼에고’나 ‘융’의 ‘자기 원형’도 무의식의 영역에 있다.
그런데 동일한 무의식이지만, 그 發現態가 다르다. 여타의 무의식이 ‘어둠의 영역[陰]’이라면, ‘슈퍼에고’와 ‘자기 원형’은 ‘밝음의 영역[陽]’에 있다. 다만, 융의 집단무의식이 의미 있는 지점은, 東西古今의 二分法的 思惟方式을 넘어서서, 周易哲學이나 陰陽哲學에서 주장하는 陰陽의 相生相克的인 合一的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그러할 때, 무의식에 의해 작동하는 현실세계는, 보다 나은 상태에 이를 수 있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현실세계는 이분법적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융의 주장이 더욱 절실한 것으로서 인식된다. 특히 정치활동의 측면에서 더욱 그러하다.
2차례의 세계대전과 冷戰 시대를 지낸 이후, 인류는 보다 나은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나 국제정치의 현장은 여전히 ‘전쟁 프레임’과 ‘자본 프레임’에 의해 작동하고 있다.
정치의 延長으로서의 전쟁이나, 경제의 목적으로서의 자본은, 죄다 無意識의 차원에서 작동하는 것들이다. 그러한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제아무리 意識의 차원을 穿鑿한들, 마땅한 對案이나 解答이 도출될 리 만무하다. 이에, 천지자연의 원리를 직시하고서, 인간존재의 무의식을 窮究할 때, 비로소 현실세계의 한계들은 다소나마 解消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가 무너지면, 정치도 무너지는 법이다. 이는 人類史에 정치와 경제가 등장한 이래, 萬古不變의 법칙으로서 작동하고 있다. 물론 미래에 이러한 법칙에 변화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인류사를 살필 때, 경제와 정치의 緊密한 연관성은 부정할 수 없다.
경제가 무너지면 집단대중의 無意識은 금세 깨어난다. 경제에 의한 피해가 자기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면, 이제 무의식은 약동하기 시작한다. 더욱이 이러한 순간에 무의식은, 集團無意識의 行態을 보인다.
‘바이마르 공화국’을 몰락시키고 ‘히틀러의 나치’를 선택했던, 대중의 집단무의식을 작동시킨 결정적 원인이, ‘生存의 利得’을 급감시키는 경제적 손해였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가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 세계적인 大恐慌에 의한 것이었다는 眞實은 별반 중요하지 않다.
다만 지금 당장 내가 배고프고, 우리 가족의 수입이 줄어서, 불러일으켜지는 욕망을 원하는 만큼 충족시킬 수 없다는 현상만이 중요할 따름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도, 항상 그 발생가능성을 內在하고 있다.

역사의 재미난 事例로서, ‘바이마르 공화국(獨逸帝國)’과 ‘大韓帝國’은 서로 비견해 볼 필요가 있다. 두 국가공동체의 운명이, 기묘한 유사한 점과 연결고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나치당’에게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정권을 박탈당한다. 그리고 ‘대한제국’은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인 ‘韓日合?條約’에 의해 국가를 강탈당한다.
두 국가공동체 모두 무언가 실패한 대목이 있으므로, 정권과 국가를 빼앗겼을 테지만, 현재에 이르도록 적절한 분석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물론 온갖 이론과 갖은 주장이 紛紛하다. 그런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두 국가공동체는 ‘大衆 集團無意識’을 이끌지 못했던 것이 결정적인 敗因이다.
특히 大韓帝國은 朝鮮王朝의 신분제도가 유지되었으므로, 兩班士大夫 엘리트 계층에 의한 정치만을 목적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설령 국제정치나 국내정치의 要諦를 파악한다고 해도, 그것을 실행할 동력을 얻을 수 없었다.
近代 이전에는, 전 세계 대부분이 王政이었으므로, ‘대중 집단무의식’을 직접적으로 작동시킬 필요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억압해야만 했다. 그런데 근대 이후, 産業化에 의해 급속히 발전한 국가들은, 이미 ‘대중 집단무의식’을 자의든 타의든 작동시켜야만 했다. ‘명예혁명’, ‘미국혁명’, ‘프랑스혁명’ 등이 그러한 歷史的 事例다.
그리고 전 세계를 ‘대중 집단무의식’의 狂氣 속으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나치당’의 합법적 정권 簒奪이다. 그러한 世界史的 흐름을 이미 中世期 후반부터 수용하고 있었던 일본은, 그 內在力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이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표출되었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바이마르 공화국’과 ‘대한제국’은 역사의 뒤안으로 몰락해버린 것이다.

목차

▣ 목차



序說: ‘경제적 欲望無意識’과 ‘정치적 集團無意識’
제1장. ‘페르소나’와 ‘프로파간다’
1. ‘의식의 변화’와 ‘무의식의 변화’
2. ‘페르소나’라는 假面
3. ‘페르소나의 팽창’과 自己實現
4. ‘집단적 무의식’과 ‘프로파간다’
5. ‘거짓과 선동’으로서 ‘프로파간다’
6. ‘프로파간다’와 ‘마타도어’
7. ‘괴벨스’와 ‘프로파간다’
8. 정치적 선전으로서 ‘프로파간다’
9. ‘私的 利益集團’의 ‘프로파간다’
10. ‘프로파간다’와 選擧
11. 當選과 落選, 그 후

제2장. ‘프로이트’의 欲望無意識
1. 無意識의 狂氣
2. ‘프로이트’와 ‘칼 융’
3. ‘프로이트’와 ‘種의 起源’
4. ‘프로이트’와 性革命
5. ‘이드’와 ‘에고’와 ‘슈퍼에고’
6. 무의식과 libido
7. 口腔期(oral stage, 0~2세)
8. 口腔性交(oral sex)
9. 肛門期(anal stage, 2~4세)
10. 肛門性交(Anal Sex)
11. 男根期(phallic stage, 4~6세)
12.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13. ‘거세 불안’
14.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극복
15. 여자아이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16. ‘엘렉트라 콤플렉스(Electra complex)’
17. 潛在期(latency stage, 6~12세)
18. 性慾期(genital stage, 12세 이후)
19. 욕망을 제어하는 ‘超自我’
20. ‘超自我’도 無意識이다
21. 대부분의 정신활동은 無意識의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제3장. ‘칼 융’의 集團無意識
1. 無意識의 自己實現
2. 人間存在의 內面에 관심을 갖다
3. 精神醫學을 선택하다
4. complex 개념을 고안하다
5. 콤플렉스는 열등의식이 아니다
6. ‘콤플렉스’라는 무의식
7. 일반적인 콤플렉스
8.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9. ‘프로이트의 도그마’와 ‘융의 신비주의’
10. 神秘主義와 鍊金術
12. ‘神秘的 合一’은 삶의 결정적 변화를 유발시킨다
13. ‘하나[一]’와 ‘텅 빔[無]’
14. ‘우파니샤드 신비주의’와 ‘아트만’
15. 자연스레 ‘숨쉬는 목숨’이 ‘아트만’이다
16. ‘物質的 自我’와 ‘超越的 自我’의 合一
17. ‘기독교 신비주의’와 ‘프네우마’
18. ‘보나벤투라’와 ‘에크하르트’
19. 종교개혁 이후의 신비주의
20. 현대사회의 신비주의
21. ‘볼링겐 별장’에서의 隱遁
22. ‘히틀러의 나치’가 등장하다
23. 나의 생애는 無意識의 自己實現의 역사다
24. ‘프로이트의 개인무의식’과 ‘융의 집단무의식’
25. ‘집단무의식’은 경제와 정치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26. 集團無意識의 原形들
27. 삶의 사건들은 무의식에 의해 발생한다
28. ‘집단무의식’은 人類史의 集積이다
29. 인간존재는 ‘自己 原形’을 실현해야 한다
30. 무의식의 조화가 깨지면 전쟁이 발생한다
31. ‘칼 융’의 恨歎

제4장. ‘괴벨스’와 宣傳煽動
1. 惡魔的인 無意識 선동의 대가 ‘괴벨스’
2. 프롤레타리아 가문에서 태어나다
3. 육체적 장애가 정신적 능력을 강화하다
4. 육체적 장애가 無意識에서 콤플렉스를 형성하다
5. 無意識의 존재 ‘히틀러’를 만나다
6. 제2차 세계대전
7. 선전선동을 시작하다
8. 宣傳과 煽動은 二重的이며 同時的이다
9. 北韓의 선전선동
10. ‘프로파간다’의 起源
11. ‘프로파간다’는 ‘무의식적 감성(감정)’을 조작한다
12. Propaganda와 外交는 의식적이지 않다
13. 독일의회 의원이 되다
14. ‘나치당’의 선전국장이 되다
15. ‘경제적 沈滯’는 ‘정치적 搖動’을 초래한다
16. ‘호르스트 베셀 사건’의 선전선동 事例
17. 殉敎者가 된 ‘호르스트 베셀’
19. 經濟不況은 集團無意識을 작동시킨다
20. ‘나치당’이 합법 노선을 선언하다
21. ‘大衆 集團無意識’은 末梢的인 것에 더욱 반응한다
22. 구경거리를 제공하는 ‘나치당’의 선전선동
23. ‘나치당’이 제2당으로 浮上하다
24. ‘바이마르共和國(獨逸帝國)’과 ‘大韓帝國’
25.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脆弱性
26. 經濟不況이 亡國의 결정적 원인이었다
27. 大韓帝國 혹은 大朝鮮國
28. 開化派와 守舊派의 대립
29. 일본이 守舊派를 지원하다
30. ‘中國에 對한 事大’와 ‘日本에 對한 事大’
31. 온갖 미디어 매체를 활용하는 선전선동
32. 선전선동의 목적은 Energy와 金融利益이다
33. 선전선동의 목적은 戰爭과 覇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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