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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의 일생 상세페이지

조선 양반의 일생작품 소개

<조선 양반의 일생> “국왕이 지존至尊의 존재라면, 양반은 그 바탕인 ‘지광至廣’의 존재였다.” 국가의 중심 세력이면서 한편 조선사회의 그늘이기도 했던 양반…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알려지지 않았던 다양한 고문서를 활용, 중국과 일본 지배계급과의 차이점부터 실생활의 미세한 부분까지 관통하는 조선 양반의 생애사를 완성했다.
누구나 되고 싶어하면서도 사실은 경멸적으로 비판을 일삼곤 했던 조선의 양반은, 존재 자체가 명암明暗이 뚜렷했다. 이 책 『조선 양반의 일생』은 과연 조선 양반은 어떤 존재였는지를 묻고 있다. 생활인이자 계급투쟁의 주체이면서 욕망을 품은 한 인간으로서 양반의 실상을 조명하는 가운데, 그러한 것이 어떻게 제도적으로 투영됐으며, 그 삶에 드리웠던 치명적인 약점들까지도 빼놓지 않고 다룸으로써 지배계급의 양면을 고루 다루고자 했다. 그동안 양반은 주자 성리학과 관련하여 그 사유세계나 정치적 실세로서의 측면이 많이 부각돼왔다. 이 책은 근래 들어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온 양반의 생활사 관련 자료를 집대성함으로써 그들 삶이 구체적으로 어떠했고, 그로 인해 오늘날 우리는 어떤 문화적 기반 위에서 살고 있는지까지 차근차근 탐색해나간다. 특히 이 책의 저자들은 수많은 고문서를 중심에 놓고 다양하게 해석한 글과 도판 자료들을 통해 생활의 이모저모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중·일 양반은 어떻게 달랐을까 - 사대부, 양반, 무사의 세계
조선 양반의 속살을 들여다보기 전, 먼저 큰 그림으로 한·중·일 양반의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객관적인 잣대를 확보한 후 세부적인 생활상까지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조선에 17세기를 전후해서 양반이란 존재가 확고한 지배계층으로 자리잡았다면, 중국은 명나라 시대가 되면서 ‘사대부’가 지배계층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16세기 후반 도요토미 정권 시대 이후 일본의 무사는 문인으로서의 면모까지 갖춰나가면서 지배 세력으로서 권력을 더 확고히 해나갔다. 즉 이 세 계급을 함께 들여다보면 양반의 실체는 좀더 명확해질 것이다. 먼저 중국 사대부와 조선 양반은 신분적 성격이나 과거시험을 통해 관직에 나가는 등 기본적인 성격은 비슷해 보이지만 미세한 차이점들은 훨씬 컸고, 그것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달랐다. 사실 중국은 범죄자를 제외하곤 누구에게나 과거를 볼 자격이 주어졌다. 반면 조선에서는 양반 가문의 자제만 시험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조선도 비양반까지 포섭하는 듯한 규정을 제정하기도 했지만, 사실상 조선에서 상민의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반면 시험 규정이나 관직 진출은 조선이 중국에 비해 덜 엄격했는데, 중국은 반드시 예비시험이란 관문을 거쳐야 했던 반면 조선인은 예비시험 없이 본시험을 곧장 치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조선의 양반들은 쉽게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관직의 숫자 역시 중국에 비해 월등히 많았다. 제도의 틀이 같아도 속내는 달랐던 중국과 조선의 과거는 어떤 결과를 야기했을까. 가장 중요한 차이는 “중국의 과거제도는 대단히 개방적이었던 반면, 조선의 과거제도는 폐쇄적이었다”는 점이다. 하층민들이 상층으로 올라갈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조선 사회의 경직성은 강화되었다. 더욱이 중국 사대부는 자기 지위를 세습시킬 수 없었지만 조선은 점점 더 세습적 성격이 강화돼 양반 자손은 누구나 양반이 되는 ‘과잉 현상’이 일어났다. 더군다나 조선 양반들은 사대부에 비해 향촌사회에서 강고한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양반은 자치조직을 가지고 향안을 만들고, 지방 수령을 보좌하면서 통치의 일익을 담당했지만, 중국의 향신들은 중앙정부가 자치조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청나라 말기부터 향신들의 움직임이 조성되면서 신해혁명을 일으키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조선 양반의 권력은 중국 사대부에 비해 강고한 듯하지만, 일본 무사와 비교해보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일본 무사계급은 조선의 양반이나 중국 사대부와 비교해 그 이질성이 눈에 띈다. 양반과 사대부가 문文을 이상으로 삼았던 반면 무사는 무武를 존재 근거로 삼았다. 무사는 그 신분이 생득적인 것이었다. 사대부가 시험을 통해, 또 양반이 신분과 시험이란 두 가지 관문을 거쳤던 것에 비해 오로지 상속의 자격만 갖추면 됐다. 물론 ‘단독 상속’인 점은, 조선 양반이 모든 아들에게 지위를 물려줬던 점과 다르다. 특히 일본 무사 가문은 방대한 가보를 집대성했는데, 이것은 조선이나 중국의 족보와 달리 세대마다 오로지 한 명의 후손만 기록하게 돼 있었다. 일본에서도 16세기 이후 주자학의 지식이 무사층에도 침투해 들어가면서, 무사의 성격보다는 점차 행정 관료로서의 수완이 높이 평가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두 나라와 비교해보면 조선의 양반은 중국과 일본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 존재였다. 즉 중국 사대부보다 훨씬 폐쇄적인 신분사회였지만, 일본 무사계급과 비교하면 신분 성격이 애매할뿐더러 법적으로 규정된 존재가 아닌 사회적 관습을 통해 형성된 계층이었다. 이런 성격으로 인해 한국사회에는 이른바 ‘양반화 현상’이란 것이 생겨나기도 했다. 즉 원래 양반이 아닌 사람이 양반으로 상승하려는 움직임을 말하는데, 이런 흐름은 조선에서부터 근대에까지 일관되게 존재했던 것으로, 양반 성격의 애매함이 이런 것을 가능하게 했다.

양반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 과거시험과 관직 진출
양반 계급에 들기 위해선 신분이 뒷받침돼야 했지만, 과거시험과 관직 진출을 통해 부단한 노력이 뒤따라야 했다. 조선시대에 총 804회의 과거시험이 있었고, 여기서 15000명의 합격자가 배출됐다. 이는 식년시의 합격 정원이 33명이고 조선의 고을 수가 360개인 것으로 계산해보면, 10개 고을당 1년에 합격자가 한 명도 배당되기 어려운 수치였다. 이처럼 경쟁률도 문제겠지만, 오히려 과거시험은 과정과 절차가 까다로웠던 점이 더 주목할 만하다. 거기엔 시험이나 관문의 독특한 규칙에 적응하지 못해 일어난 사건들이 줄을 잇기 때문이며, 이는 희비가 엇갈리는 역사의 순간들을 생생히 복원해 보는 듯하다. 먼저 응시자들은 과거시험 필기도구와 답안 종이를 직접 마련해야 했는데, 종이는 반드시 도련지搗鍊紙라는 하등품을 사용하게 돼 있었다. 부유층 집안 자제들은 고급 종이를 쓰다가 자격이 박탈되는 일도 있었다. 또 시험지를 쓰기 전 신원조회서격인 녹명을 작성했는데, 4조부 및 조·증조·외조의 인적 사항까지 모두 기록하는 이 형식이 얼마나 까다로웠던지 실학자 성호 이익은 녹명을 잘못 기입해 과거 합격이 취소되기까지 했다. 과거시험 답안 작성시 그 까다로움은 한층 더 드러난다. 시권은 반드시 해서로 써야 했고, 노老·불佛 문자를 쓰거나 순자, 음양서陰陽書, 패설稗說, 색몽당파 등을 언급하는 것은 금했다. 또 역대 왕의 이름을 범해서도 안 되었다. 특히 채점 절차의 공정성은 대단했다. 우선 봉미법이라 하여 응시자의 인적 사항이 기록된 곳은 서너 번 말아 접어 실로 꿰매었고, 문과시험에서는 더욱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녹명 부분과 답안 부분을 칼로 절단한 후 수험번호를 각각 기록해 채점이 끝날 때까지 보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특정인의 필체가 드러남으로써 채점할 때 부정을 유발할 수 있다 하여 서리들로 하여금 모든 답안지를 옮겨 적게 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여 합격한 자는 ‘면신례免新禮’, 즉 신참 신고식을 치렀는데, 여기엔 선배들의 가혹 행위가 동원돼 뜻하지 않은 사고가 종종 뒤따랐다. 선배들은 일단 신참이 들어오면 말석에도 끼워주지 않고 사람 취급도 안 했고 그들을 ‘새 귀신新鬼’이라 불렀다. 신참은 면신이 끝날 때까지 얼굴에 분칠을 하고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채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수모를 겪었다. 뿐만 아니라 선배들에게 잔칫상을 차려주고, 종을 들여 뇌물을 바친 후 명함을 들이기도 했다. 선배들에게 베푼 잔치에서도 온갖 벌칙을 받았는데, 얼굴에 오물칠을 해 광대처럼 만들거나 시커먼 부엌에서 거미잡이 흉내를 내게 한 후 씻은 물을 강제로 먹이고, 때로는 미친년 오줌을 받아와 강제로 먹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의 최고조는 부모 이름을 적은 종이를 태워 강제로 먹이는 것으로, 부모를 욕보이는 것은 가장 치욕적인 벌칙에 해당됐다. 이러한 신참의 곤욕은 50일 넘게 지속되기도 했는데, 그것이 어찌나 심했던지 율곡 이이는 면신을 통과하지 못하고 낙향했을 정도로 고생했다. 어쨌건 이렇게 어려운 관직의 자리는 100개도 채 되질 못했고 그것도 고급 관료 1명이 여러 자리를 겸직하는 경우가 많아 자리다툼이 심하게 일어났던 것은 당연지사다. 이런 결과에 따라 결국 관직에 제수할 때 고위 산계를 가진 자가 낮은 관직으로 제수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이처럼 양반들 모두가 관직에 목을 맸던 것은 오로지 관직에 나아가야만 사람 행세를 하며 살 수 있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양반사회의 이면, 그 화려함과 고통의 세계
양반의 권력은 사실 자손 대대로 거주하던 세거지에서 그 위력을 발휘했다. 세거지는 생활 근거지이자 자치 조직의 기반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집집마다 수십에서 수백 구까지 노비를 소유했던 양반들은 동洞의 노비들을 공동으로 통제하는 약조를 만들고 자신들의 생활기반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갖가지 벌칙들을 마련해놓기도 했다. 마을에서는 우선 유력 양반의 명부인 ‘향안’을 작성해 그것을 양반 결속의 기반으로 삼았다. 이 명부에 들어가면 좌수·별감에 대한 선거권과 피선거권, 주요 사안에 대한 의결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안동이나 남원처럼 양반이 많을수록 향안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은 특히나 더 까다로웠다. 부친, 모친, 처가 모두 그 지역 출신이란 규정, 즉 삼향三鄕(부향父鄕, 외향外鄕, 처향妻鄕)을 갖춰야 했는데, 이를 충족시키는 이들은 많지 않았다. 특히 우리 고유의 향약은 흔히 알려진 덕업상권, 예속상교, 과실상규, 환난상휼의 네 조목 가운데 과실상규, 즉 처벌을 중시했다. 이황이 초안을 마련한 예안 향약을 보면, 형제간에 다툴 경우 극벌이 내려졌고, 정처를 소박하거나 빈말을 하여 남을 모함한 자, 남이 어려움에 처했는데 구하지 않은 자, 혼인과 장례, 제사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자들은 중벌에 처해졌다. 또 양반을 능욕하거나 양반에 버금가는 화려한 옷을 입거나, 농사일을 소홀히 하는 자도 처벌을 면치 못했다. 특히 세금을 자체적으로 거둬들였던 유향소에서는 향리나 관속들의 비행을 철저히 처벌 대상으로 규정했는데, 가령 안동 유향소에서 작성한 『인리제관속기과人吏諸官屬記過』라는 책에는 향리나 관노官奴·의생醫生 등 여러 관속의 비행 사실과 그에 대한 처벌 사실을 하나하나 기록해두었다. 이런 가운데 양반 비양반을 막론하고 마을에서 부과된 최고의 형벌은 출향黜鄕과 수화불통水火不通이었다. 출향은 고을에서 쫓아내는 것으로, 심한 경우 훼가출향毁家黜鄕이라 하여 집을 부수기도 했다. 이른바 왕따를 만들어 사회적으로 배제하고 고립시키는 벌을 내렸다. 이런 훼가출향은 선조 때 진주 유생들이 간통을 했다는 이씨라는 사람의 집을 부순 데서 비롯되었다. 이외에도 삭적削籍, 손도損徒, 제마수齊馬首 등의 벌이 내려졌다. 삭적은 향안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향원으로서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이다. 손도損徒는 ‘무리에서 빼낸다’는 뜻으로 일정 기간 동안 향원 자격을 정지함을 이른다. 제마수는 가벼운 처벌로, 향원들이 함께 말을 타고 그 집을 찾아가 집 앞에서 죄를 성토했으며, 이를 당한 이는 사죄의 뜻으로 벌주罰酒를 냈다. 이처럼 마을 자체적으로 내려진 처벌 외에, 국가에서 사형 다음으로 내린 가장 무거운 형벌은 유배형이었는데, 유배에 처하지 않는 것이 ‘운이 좋다’고 할 만큼 양반이라면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그렇다 해도 여기엔 정실이 많이 개입돼 인근 고을로 유배 보내는 일도 종종 있었다. 어쨌건 감옥생활이나 다를 바 없던 유배 중 최악은 열악한 섬, 즉 도배島配형에 처해지는 것으로서, 이것이 너무 가혹하다 하여 영조는 흑산도나 그 외 섬에 유배 보내는 것을 금하고, 고종 때의 『대전회통』 역시 추자도나 제주목 유배를 금했지만 잘 지켜지진 못했다. 고종 때 최익현, 김평묵, 김윤식 등 상당수 지식인이 규정에 어긋남에도 제주로 귀양갔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육체적 고통 외에 유배자들은 자신을 유배지까지 호송하는 압송관의 경비와 수고비까지 직접 부담해야 했다. 이 부담이 얼마나 컸던지, 1591년 함경도 부령에 유배된 홍성민은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말 여섯 필과 옷가지, 음식물을 장만하다가 가산을 탕진한 예를 문집에 남기고 있다. 한편 정치적 안배로서의 유배도 있었다. ‘조만간 정계 복귀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이라 유배의 질이 달랐다. 예를 들어 경종 2년 위리안치의 명을 받고 갑산 유배길에 오른 윤양래의 경우 유배는 곧 유람길이었다. 가는 마을마다 후한 대접과 노잣돈까지 챙긴 그는 너무 많은 선물을 받아 말이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일까지 발생했다. 선조 22년 함경도 길주에 유배된 조헌 역시 부사와 밤새 만찬을 즐기다가 다음 날 술이 깨질 않아 출발하지 못했다. 반면 정조 때 대전별감 출신인 안조환은 노골적으로 구박을 받은 경우다. 보통 유배지에서 유배자의 생활을 보살펴주는 이를 보수주인이라 하는데, 안조환은 아무도 맡으려 하지 않았다. 일반 백성의 경우 유배객을 정할라치면 갖은 핑계로 빠져나가기 일쑤였고, 어쩔 수 없이 떠맡을 때도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안조환의 보수주인 역시 자기도 먹고살기 힘든 판국에 무슨 유배객을 맞냐며 안조환에게 그릇을 내던지고 역정을 내기도 했다. 그는 결국 남의 집 처마 밑에서 자고 거친 음식을 먹거나 굶기도 했으며, 또 종살이처럼 주인집 마당 쓸기, 불 때기, 쇠똥 치기 등을 하면서 종국에 비렁뱅이처럼 동냥까지 하기에 이른 유배생활의 애환을 「만언사」라는 글로 남겼다. 유배생활의 최고조를 보여주는 경우는 위리안치라 할 수 있는데, 1776년 흑산도로 유배된 김구주는 집에 둘러진 울타리 높이가 3길이었다고 한다. 혹은 5길인 경우도 흔했다. 그렇다면 5~9미터에 달하는 가시울타리가 처졌다는 것인데, 중종 때의 기준의 불평을 들어보면 숨을 쉬려 해도 공기가 통하지 않아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고 햇빛이 들지 않기에 대낮이 한밤과 같아 고을 사람들은 이를 ‘산무덤’이라 불렀다고 한다. 어쨌건 이처럼 고통스런 삶도 있었지만, 이 책은 양반세계의 화려함도 조명한다. 대표적인 예로 국가가 규제할 만큼 화려한 양반의 주거문화를 통해 이를 엿볼 수 있다. 사실 양반들의 주거는 국가에서 규제하고 있었다. 조선 초 서울이 새 도읍지가 되면서 집터가 부족하자 국가는 지위에 따라 대지를 차등 분배하기로 했다. 태조대에는 정1품 35부부터 시작해 5부씩 줄여 6품은 10부, 서민은 2부씩 주는 것으로 정했다. 그러나 이것도 『경국대전』에서 대군·공주 30부, 왕자군·옹주 25부, 1·2품은 15부, 3·4품은 10부, 5·6품은 8부, 7품 이하 및 유음자손有蔭子孫은 4부, 서인은 2부를 주는 것으로 하여 태조대보다 줄어들었다. 이처럼 법전으로까지 규정했건만 이는 실생활에서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다 해도 양반들은 당대의 실세였기에 처벌하기가 쉽지 않았고, 더군다나 왕부터 나서서 왕자나 공주의 집을 제도보다 더 크게 지어주려 했기에 계속 논란이 되었다. 영의정의 경우도 50칸까지만 지어야 했지만 지켜진 경우는 거의 없다. 세종은 “서민의 가옥은 참람하게도 공경에 비기고, 공경의 주택은 참람히 궁궐과 같아서 사치와 화려함을 숭상하니 온당치 않다”고 경고했고, 17세기 현종대에는 현실에 맞게 제도를 고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났으며, 고종대 『대전회통』 역시 그 조항을 수정하지 못했다. 이런 연유로 법전에 실린 칸수 규제는 별 의미가 없었고 결국 양반집은 99칸까지 지을 수 있다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실제로 조선후기에는 100칸을 훨씬 넘는 집들도 있어서 조선말기에 그려진 장서각의 가사도면을 보면 가장 넓은 집은 180칸이 넘었다. 또 18세기 후반 영조대에 지어진 구례 운조루의 경우도 처음 80칸 가까이를 아들에게 물려주었고 현재 남아 있는 것도 70칸 이상이어서 법제상의 규제를 벗어나 있다.

양반 사회는 어떻게 지탱되었나
조선 양반을 지탱해준 한 축은 그들이 이끈 경제 시스템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경제의 중심이었던 ‘양반의 은밀한 거래’, 즉 ‘선물경제’에 대해 다룬다. 양반은 얼마만큼의 재산을 소유했을까? 일례로 조선조 최고의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이 150명의 노비와 수천 두락의 전답을 소유했던 것을 보면 규모 있고 효율적인 재산 관리는 양반의 자질 중 필수적 요소였다. 사실 양반은 글공부나 하며 청렴하게 살았다기보다는 경제관념이 철저해 친족망과 교유관계도 자신의 경제생활과 직결시킬 정도로 철저한 생활인이었다. 기본적인 생활기반은 물론 국가로부터 받는 녹봉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과연 생활이 지탱되었을까. 유희춘의 『미암일기』를 보면, 녹봉은 실제로 『경국대전』에 규정된 것과 달리 적은 횟수(총 17회 중 6회)와 적은 양(65퍼센트)만 지급되었다. 가령 흉년이 들거나 중국 사신이 오는 등 국가 재정이 곤궁해지면 관리들 녹봉부터 줄였다. 그런 까닭에 녹봉의 의미는 점점 퇴색해가고 양반들은 ‘선물’로 가계생활을 꾸려나가기 시작한다. 단적인 예로 유희춘은 관직생활 10년간 2885번이나 선물을 받았다. 선물을 준 자들은 지방관을 비롯해 동료 관인, 친인척, 제자 등으로 매달 42회나 받았다. 내용물은 곡물류를 비롯해 면포·의류, 생활용구류, 문방구류, 치계雉鷄·포육脯肉류, 어패류, 견과·약재류, 시초柴草 등 일상용품에서 사치품까지 망라되어 있다. 유희춘은 이 물건들로 생활을 꾸려나간 것은 물론이고 재산 증식의 발판으로 삼기도 했다. 특히 지방관들, 즉 관찰사를 비롯해 병사, 수령 등은 그 물품의 내용이 방대하고도 화려했는데, 유희춘을 담당했던 지방관의 경우 유희춘 집안의 대소사를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가토加土, 소분掃墳, 조사造舍, 혼례, 상례, 제례뿐만 아니라 토지와 노비를 구입할 때에도 선물을 제공하고 있다. 그러면 유희춘은 이를 거절하거나 사양하지 않고 흔쾌히 받았다. 혹 기대 이상으로 보내오면 흡족해하며 ‘매우 넉넉하다’ ‘손이 크다고 하겠다’ ‘크게 도움이 된다’ ‘우리 집이 갑자기 부자가 되었다’ ‘후하다’ ‘지나치게 많다’라는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반대로 상대가 요구에 응하지 않거나 생각보다 물품이 적으면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반응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은 유희춘이 이러한 선물을 뇌물이라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오희문의 『쇄미록』과 이문건의 『묵재일기』에서도 상세히 드러난다. 특히 앞으로 정계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할 것인가가 선물을 받는 횟수와 규모를 좌우했다. 가령 이문건의 경우 유배지에서도 끊임없이 선물을 받았는데, 그건 곧 그가 정계에 복귀해서 한자리 할 거라는 지역민들의 기대심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후 유배가 길어지면서 그의 복귀에 대한 전망 역시 흐릿해지자 선물은 금세 줄어들고 만다. 물론 근대적인 시각으로 볼 때 양반의 선물경제는 부정적이고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 게다가 선물경제로 인해 시장경제의 발달이 저해됐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지만 당대에는 나름의 합리성을 획득하고 있었다. 당시 국가경제는 소비와 징수에 있어 공사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즉, 선물을 받는다 해도 모두 부정부패와 연결지을 순 없고, 국가 재분배 체제의 일환으로 용인되었던 것이다.

알고 보면 권력자, 조선의 여성들
조선 양반의 삶도 오늘날과 다르지 않게 나와 배우자 그리고 자식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베를 잦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특히 혈연과 혼인으로 맺어진 가족제도는 재산 상속과 가계 계승으로 인해 사회의 근간이 되었다. 그러했기에 국가는 만혼晩婚을 억제해 『경국대전』에는 사족의 딸 중 30세가 넘었는데 가난해서 결혼하지 못하면 국가에서 혼수를 도와줬고, 빈곤하지 않은데도 결혼하지 않은 경우면 가장을 처벌했다. 특히 혼인은 부나 조가 결정하는 가문 간의 결합이었기에, 다른 신분끼리 결혼하면 ‘쳐다보는 혼인(앙격혼仰格婚)’ ‘내려다보는 혼인(하격혼下格婚)’이라 하며 경계의 뜻을 담고 있었다. 또한 『경국대전』에는 남녀균분상속이라는 혈연상속의 원칙이 명시되어 있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저자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세워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뒤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창설 230년이 되는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 통합함으로써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 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의 한계를 넘어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규장각 자료총서> <한국문화연구총서>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한국학 모노그래프> <한국학 연구총서> <한국학 자료총서> 등 900여 책을 펴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단은 “조선의 기록문화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한국학”이라는 어젠다를 대상으로 연구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다양한 연관 사업을 기획하여 우수한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사회적 확산 프로그램 운영에도 힘쓰고 있는데, 본 교양총서는 그 대표적인 성과물이다.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 | 조선의 바탕이며, 현재를 만든 양반 문화

동아시아적 관점에서 본 양반 문화_ 한·중·일 양반 세계를 비교하다
미야지마 히로시 ·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양반집 아이들은 어떻게 자랐을까_ 『묵재일기』 와 『양아록』을 통해 본 아이 기르기와 유년 교육
이복규 · 서경대 국문과 교수

고시 공부는 비교도 안 될 처절한 과거 공부_ 환희와 비통이 교차했던 조선의 과거시험과 급제
김학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학자료조사실장

조선 양반들은 어떻게 관직에 진출했는가_ 조선 양반들의 관료생활
박홍갑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극과 극, 조선시대 유배의 재발견_ 팔도유람과 노골적인 구박으로 나뉘었던 유배생활
심재우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인문학부 교수

은밀한 거래는 어떻게 양반사회를 지탱했나_ 선물경제가 양반가에 가져다준 빛과 어둠
이성임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국가가 견제한 양반들의 화려한 주거 문화_ 양반의 거주지와 주거생활
이재희 · 국사편찬위원회 고서전문원

알고 보면 권력자, 조선의 양반 여성들_ 양반가의 여성생활
이순구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양반들의 성인식·결혼식의 모든 것_ 인생의 봄, 관례와 혼례
정종수 · 국립고궁박물관장

양반들은 어떻게 부모 재산을 물려받았을까_ 『경국대전』에서 호주제 논쟁까지 가족제도와 가계계승
정긍식 · 서울대 법학부 교수

벌과 상으로 지방사회를 통치한 향약_ 지방 사족사회와 자치조직
박현순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양반들의 죽음과 조상숭배의 실상_ 상·제례와 조상숭배
김경숙 · 조선대 사학과 교수

참고문헌
지은이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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