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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대장정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인문

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대장정

왕초 PD와 1만 2800km 중국 인문기행을 떠나다
소장종이책 정가18,000
전자책 정가40%10,800
판매가10,800
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대장정 표지 이미지

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대장정작품 소개

<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대장정> 왕초 PD와 1만 2800km 중국 인문기행을 떠나다

대장정 14년 후,
마오쩌둥은 천안문 높은 성루에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마오쩌둥은 그토록 곤궁한 처지에서 어떻게 역전승을 거둘 수 있었을까.
중화민국의 총통이었고 전력도 공산당보다 훨씬 우세했는데, 장제스는 왜 실패했을까.
그 속을 들여다보면, 21세기 대한민국이 배워야 할 교훈이 담겨 있다.

현대 중국이 탄생한 곳은, 중국 공산당이 창당된 상하이를 꼽을 수도 있고, 베이징으로 입성하기 전의 옌안을 꼽을 수도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국은 중국 공산당이 가장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필사의 탈주를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대장정’이란 고난 속에서 잉태되었다. 먼저 이념적 정당을 만들어, 군대를 만들고, 군대를 앞장세워 국가를 수립한 중국. 그 중국은 대장정의 출발지에서 잉태되었고, 대장정이라는 탈주의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여 그대로 현대 중국이 되었다. 대장정에서 잉태되어 투쟁으로 성장하고, 지금은 세계를 쥐락펴락하려는 중국. 80년 전의 대장정은 결코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다. - 《글을 시작하며》에서

1934년 마오쩌둥의 368일 대장정 역사의 현장을 59일 동안 1만 2800킬로미터를 답사하면서 기록한 중국 현대사 이야기. 앞서 중국의 음식 문화와 민가 건축, ≪삼국지≫ 등으로 중국의 속살을 속속들이 소개해온 저자 윤태옥이 대장정을 통해 중국을 한 걸음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로서 치밀한 답사 준비를 통해 한국인으로는 대장정 답사를 최초로 완주했고, 함께한 여행 동반자들과 인문기행의 경험을 나누면서 길 위에서 만나는 현대 중국인의 모습도 따뜻하게 담아내었다. 이 책 ≪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대장정≫을 통해 가깝지만 넓은 나라 중국을 여행하는 색다른 방법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다큐 PD의 중국 인문기행, ‘다큐멘터리 대장정’
우리나라와 중국의 교류가 갈수록 커지고 있으나, 중국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는 크게 부족하다. 장년층은 주로 사서삼경 등 고전에 대한 교양적 이해에 치우치는 경향이 심하고, ‘G2, G1을 운위하는 오늘날의 중국’이라는 실체를 실질적으로 만들어낸 ‘20세기 중국의 현대사’는 20~30대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중국이란 존재를 황사와 미세먼지, 비위생적 불결함, 음험한 밀실정치, 일당독재, 터무니없는 인해전술 등 표피적인 것으로만 접하게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다큐 PD인 저자가 21세기 중국을 잉태하고 출산했다고 할 수 있는 1934~35년 마오쩌둥의 대장정에 대해 대중들이 좀 더 흥미롭고 수월하게 읽고 이해할 수 있는 글을 기획하였다. 중국 현대사 강론 같은 식의 딱딱한 글이 아니라, 누구나 로망을 갖는 ‘여행’에 중국 현대사를 버무리는 방식을 선택했다. 80년 전 대장정 역사의 현장을, 80년 후의 답사여행으로 밟아 나가면서 당시의 역사와 오늘의 여행 이야기를 한데 결합시켜 중국 현대사 이야기로 풀어낸 것이다. 한 해의 절반을 중국에서 역사와 문화를 찾아 여행하고 그 기록을 다큐멘터리나 연재물, 단행본 등으로 발표해온 저자의 경험이 ‘대장정’을 화두로 이 책에 담겼다. 여행사가 만들 수 있는 여행 패키지도 아니고 일반인이 혼자 갈 엄두는 더더욱 내기 어려운 여행지를 개척자 정신으로 떠나는 저자의 인생철학도 담겨 있다.

1934~35년 홍군의 368일
중국의 대장정은 ‘중국인들의 삶과 희망이 엮어낸 역사적 산물’이었다. 50대가 ≪8억 인과의 대화≫로 닫힌 중국의 빗장을 힘들게 열었다면, 40대는 ≪중국의 붉은 별≫을 통해 열정을 체험했다. 이 책은 20, 30대가 바라보는 중국에 또 하나의 시선을 던진다.
출발 당시 들것에 실려 다니면서도 당의 전략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토론한 마오쩌둥, 샹강에서의 참패, 저우언라이의 지지, 병사의 마음을 얻는 장수들, 홍군의 보급기지이자 정보통이 되어준 국부군, 쭌이의 국가은행, 홍군을 위해 다리를 놓아준 사람들, 48시간의 160킬로미터 구보 돌파, 쇠사슬에 매달려 건너간 루딩교, 반유 습지에 세워진 병사들의 동상, 남부 출신 병사들의 설산 등반, 맨몸으로 난공불락의 협곡에 오른 소년 전사, 조선인 항일투사 등 신중국을 탄생시킨 고난의 역사를 실제 역사의 현장에서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기나긴 탈주 동안 홍군 전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속에 무엇이 있었기에 이처럼 극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을까? 장정 답사를 통해 현대 중국을 이끌어온 힘을 성찰하고, 한국과 중국의 앞날에 지켜가야 할 정신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여행의 새로운 도전, 작은 대장정(小長征)
이 글은 2014년 1월 6일부터 3월 5일까지 59일간 저자가 마오쩌둥의 대장정을 주제로 하여 답사여행을 한 것을 당시의 역사 이야기와 함께 여정에 따라 풀어썼다.
저자는 1934년 10월 17일부터 다음해 10월 19일까지의 368일간 중국 공산당 중앙홍군의 대장정 코스를 따라 여행하면서 당시의 전투 현장과 장정 유지를 중점적으로 답사하였다. 답사여행의 노선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하였다. 우선 대장정 이전의 역사로서, 국공합작이 깨진 1927년 상하이 쿠데타의 현장과 대장정의 승자인 마오쩌둥의 고향 등을 답사했다. 대장정 이후에는 대장정의 실질적인 종결이 된 옌안시대와 시안사변 현장까지를 둘러보았다. 그리하여 대장정 1년의 역사에만 집중한 것이 아니라, 20세기 전반 반세기의 중국 현대사를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구성했다.

[인천(출국)―상하이(중국 공산당의 탄생지,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현장)―창사(마오쩌둥의 출생과 성장)―징강산(마오쩌둥의 토지혁명과 유격전)―장시성 루이진(중화소비에트공화국 수도)]―[위두(대장정 집결 출발지)―싱안(홍군 최악의 참패)―쭌이(마오쩌둥의 부활)―구이양(사도적수)―쿤밍(육군강무당)―자오핑두(창강 도강 지점)―안순창과 루딩(다두하 도강)―자진산(첫 번째 설산)―다웨이(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의 회사)―헤이수이현과 마오얼가이(습지 입구)―반유(습지 출구)―바시(마오쩌둥 일생에서 ‘가장 암울했던 하루’의 현장)―라쯔커우(협곡 돌파)―하다푸(홍군 전사들이 잠시 휴식을 취한 곳)―난량(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의 혁명 근거지)―후이닝(제1, 제2, 제4방면군 회사)―우치(중앙홍군의 대장정 종착 지점)]―[즈단(바오안 시대)―옌안(옌안 시대)―시안(시안사변과 제2차 국공합작)]

* 계속되는 ‘작은 대장정’
저자 윤태옥은 다시 짐을 꾸려 2015년 1월 15일부터 3월 16일까지 10박 11일씩 6개 구간으로 나누어 마오쩌둥의 12,500km 대장정을 답사하는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원하는 사람은 저자의 블로그(http://blog.naver.com/kimyto)를 통해 동반할 수 있다.

책속으로 추가
쭌이 혁명위원회 선포와 함께 쭌이를 혁명 근거지로 개조하기 시작했다. 지주와 관리들의 재산을 몰수해 토지는 빈농들에게 나누어주고, 기타 재산은 공화국 국고로 귀속시켰다. 공산당 선전활동에 열을 올리는 한편, 지원자들을 홍군 전사로 받아들였다. 국가은행이 문을 열어 공산당 화폐를 유통시키고,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을 풀기도 하고 홍군에게 필요한 물품을 사들이기도 했다. 대장정은 단순히 군대가 이동한 것이 아니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중앙정부가 함께 이동한 사건임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본문)

이 네 가지 결정은 보구, 오토 브라운, 카이펑 세 사람만이 반대했을 뿐, 나머지 참석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통과되었다. 기존 3인단이라는 당 중앙을 해체하되 그 가운데 저우언라이를 존속시킴으로써 리더십의 연속성을 유지하고, 마오쩌둥을 지휘선으로 끌어올려 저우언라이의 조력자로 규정함으로써 정치적으로는 유화적인 안배를 한 것이다. 이 같은 지도부 구성은 그동안 지속되어온 코민테른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획기적인 조치였다. 만일 코민테른과의 무선통신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쭌이회의가 어떤 방향으로 흘러갔을지 알 수 없다. 소련과 코민테른은 여전히 중국 공산당의 주요 자금줄이자 상급기관이었기 때문이다. (본문)

나에게는 국가은행 유지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대장정은 단순히 공산당 또는 홍군이라는 무장집단의 군사작전이 아니었다. 대장정은 중국 공산당과 공산당이 세운 정부가 공산당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이전한 것이었다. 공산혁명이란 무장투쟁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민의 밥그릇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서 출발하여 어떻게 밥그릇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느냐로 귀결되는 과정이다. 이 밥그릇을 보호하기 위해 홍군도 필요했던 것이다. 이런 물질적 토대를 잘 보여주는 것이 국가은행이다. (……) 이처럼 소박한 소비에트의 국가은행은 장제스의 쟁쟁한 금융가 인맥이나 상하이 와이탄의 화려한 은행 건물들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규모나 세련됨의 차이가 아니라 국가가 은행을 통해 무엇을 했느냐는 것이다. 이 점은 마오쩌둥의 성공과 장제스의 실패라는 결과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본문)

장제스는 홍군이 북상할 것이라고 오판하여 츠수이하 서쪽, 창강 남쪽에서 홍군을 포위하기 위해 쓰촨과 구이저우 군대는 물론 윈난군까지 총동원했다. 3월 24일 장제스는 부인 쑹메이링까지 대동하여 충칭에서 구이양으로 날아왔다. 그 시각 마오쩌둥은 네 번째 츠수이하 도강을 위해 부교를 설치하라고 명령했다. 3월 21일, 닷새나 숨어 있던 주력 홍군이 은밀하게 서에서 동으로 츠수이하를 건넌 다음 남쪽 쭌이 방향으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홍군 주력은 남으로 향하고 국부군은 북으로 이동하면서 대로에서 마주치기도 했다. 그러나 홍군은 복장이 똑같지 않았고 국부군 옷을 입은 병사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국부군은 홍군을 보고서도 방어 임무를 교대하는 아군으로 착각했다. 심지어 홍군 부상병이 국부군 위생병에게 치료를 받기도 했고, 국부군 막사 안으로 들어가 조리 중인 고기를 집어먹는 일까지 있었다. (본문)

이 항아리에 얽힌 사연은 이렇다. 1935년 2월 20일 츠수이하를 두 번째 건너던 홍군의 한 병사가 실수로 그 주민의 항아리를 깨뜨렸다. 홍군 전사는 동전 두 푼으로 항아리 값을 물었다. 그동안 백성들이 겪어오던 군대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나 국부군은 음식이건 물건이건 마음대로 가져갔고, 행패나 부리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항아리 하나 깨뜨렸다고 돈으로 배상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홍군 병사에게 감동한 주민이 한 귀퉁이가 깨진 항아리를 대나무로 엮어서 동전 두 푼과 함께 보관해오다가 2009년 사도적수 기념관이 개관할 때 기증한 것이다. 일에는 명분도 중요하지만 명분에 합당하게 처신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일화다. 권력을 쥔 자들이 사람들을 가난하다고 업신여기지 않고 존중해주면 그 권력이 내세우는 명분은 더욱 힘을 얻는 법이다. 옳은 명분조차 천박한 행태로 망쳐버리는 사례를 수없이 목도하는 요즘, 깨진 항아리가 주는 교훈이 새삼 소중하게 다가온다. (본문)

칭강포 홍군 열사 기념비는 150개가 넘는 가파른 계단 위에 있었다. 그곳에 20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은 기념탑이 치솟아 있었다. 탑 기저부에 칭강포 전투에 대한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 당시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으며,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희생되었는지를 알려주는 내용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국이란 국가는 고난의 대장정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결합체임을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대장정은 결코 80년 전의 옛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역사이고, 중국이라는 국가의 실체가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음을 축약해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

그러나 이번에도 행운의 여신이 마오쩌둥에게 미소를 보냈다. 중앙홍군의 선두 정찰대가 취징으로 가는 대로에서 군용 지프 한 대를 습격했다. 지프에는 윈난군 장교가 타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10만 분의 1 군사용 작전 지도를 갖고 있었다. 윈난의 군벌 룽윈이 홍군을 추격하는 국부군에게 보내는 군사 기밀 지도는 이렇게 해서 어처구니없게도 홍군의 손에 들어갔다. 마오쩌둥은 이 지도를 보고 자오핑두 등 세 군데를 도강 지점으로 정했다. 홍군은 구이저우의 싱이를 거친 다음 윈난의 취징에서 세 갈래로 나뉘어 각자 도강 지점을 선점하기 위해 행군 속도를 올렸다. (본문)

선발대는 희생자 없이 하산하기 시작했고, 자진산 북록의 다웨이에서 드디어 제4방면군 선발대를 만났다. 그들은 서로 신원을 확인하고는 얼싸안으며 기뻐했다. 장정을 떠난 지 239일 만에 만리 행군을 거쳐서 드디어 제4방면군을 만난 것이었다! 제4방면군의 선발대는 전투에 지친 중앙홍군 선발대를 위해 작지만 푸짐한 연회를 열었다. 선발대가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중앙홍군은 본대 전사들의 고산 행군을 준비했다. 옷을 최대한 껴입으라 했지만 사실 입고 있는 옷이 전부였다. 짚신 안의 맨발을 보호하기 위해 발싸개를 하도록 했다. 그 외에는 추위를 이길 수 있게 고추와 생강을 끓인 물을 수통에 넣어주는 게 고작이었다. 선발대는 젊은 전사들이라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으나 본대는 사정이 달랐다. 나이가 많거나 체력이 소진된 전사들이 많았다. 부상병이 들것을 메고 가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자진산을 넘어가는 홍군에게 하달된 주의사항은 아무리 힘들어도 걸음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미 피로도 극심한 데다가 고산 증세로 호흡이 가빠진 상태에서 한번 앉으면 다시 일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6월 14일과 15일 이틀에 걸쳐 중앙홍군 본대가 산을 넘었다. 일부 추락사도 있었고 한번 앉았다가 영영 일어나지 못한 전사도 있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타던 말을 부상병에게 내주고 온힘을 다해 걸었지만 수시로 젊은 경호원들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마침내 중앙홍군은 첫 번째 설산을 건넜다. 그나마 여름이라 피해가 덜했다. (본문)

계곡 입구부터 동반했던 현지 티베트인 젊은이들은 높은 지대에서도 멀쩡해 보였다. 점프 샷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한 커플은 눈밭에 뒹굴며 낭만적인 포즈로 사진을 찍는데,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웠다. 젊음은 생동감이 넘치고 에너지가 충만한 것이다. 대장정 당시 홍군의 핵심적인 장교들도 대부분 20대 중후반이었다. 20대가 중국 현대사, 나아가 세계사를 뒤흔들었다. 그것에 비하면 오늘날 대한민국의 20대는 자식이란 명패를 달고 새장에서만 안전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평균수명이 늘어나면서 노인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기는 했지만 노인이 나라의 핵심을 거의 대부분 차지하고, 반면에 젊은이들은 사회 하부구조에 머문 채 상승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상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전부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등을 기댄 채 잠들어 있었다. 미동조차 없었다. 한 사람 한 사람 살폈으나 누구 한 사람도 숨을 쉬지 않았다. 나는 묵묵히 이 처참한 광경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이 많은 동지들이, 한 걸음만 떼면 습지를 벗어날 수 있었는데 반유하를 건널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질병과 기아를 이곳까지 가져왔으나, 승리의 서광을 남겨놓았다. 우리는 동지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닥에 눕혔다. 편하게 눕히는 한편, 혹시라도 숨이 남은 전사가 있는지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어린 전사 하나가 아직 숨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정찰원이 그를 둘러업고는 다시 반유하를 건넜다. 그러나 강을 건너와서 살펴보니 그마저 이미 숨져 있었다. 우리는 많은 눈물을 흘렸다. 모자를 벗어 그들에게 애도를 표하고는 본대로 돌아왔다.” ―왕핑의 회고록 (본문)

이때 열여섯, 열일곱 살의 소년 전사 둘이 나섰다. 지휘관은 이 어린 전사들이 어떻게 절벽을 기어오르려는지 의아스러웠다. 뜻밖에도 어린 전사들은 마치 원숭이처럼 날렵하게 절벽을 올랐다. 이들은 구이저우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깊은 산속에서 약초를 캐며 자랐다. 고향에서는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으나, 쭌이에서 홍군이 가난한 사람들 편이라는 선전활동에 감화되어 입대했다. 홍군에 입대해서는 비인간적인 처우나 구타에 시달리지 않고 하루에 한 자씩 한자도 배웠다. 이들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존중받는 삶을 체험하면서 소년 전사로 성장했다. 공산주의를 이론이 아니라 본능으로 체득한, 동질감으로 무장한 전사들, 이런 전사들이 위기 때마다 자신의 능력을 힘껏 발휘했다. (본문)

그다음 해에 놀랄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1944년 중탸오산中條山 전투에서 후퇴하던 5만여 명 국부군이 농민들에 의해 무장해제를 당하는 기막힌 일이 발생했던 것이다. 바로 탕언보의 부대가, 그렇게 악행을 저지르던 지역을 통과할 때였다. 원한이 뼈에 사무친 농민들이 엽총, 식칼, 쇠스랑으로 무장한 채 국부군에게 죽기살기로 덤벼들었다. 붙잡힌 병졸들은 생매장되거나 총살을 당했다. 탕언보는 이런 주민들을 일제 앞잡이니 반역자니 하며 비난했다.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허난성 동남부의 한 지역에서는 국부군 제4집단군이 1942년 기근이 발생했을 때 죽 배급소를 운영했다. 1944년 일본군과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자 그 부대는 주민들로부터 열화와 같은 지원을 받았다. 그 덕분에 허난성 전투에서 매우 귀한 승리를 거두었다. 기근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 죽 한 그릇 얻어먹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본문)



저자 소개

저자 - 윤태옥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방송위원회와 m.net에서 활동했다. 이후 팍스넷 부사장, 크림엔터테인먼트 총괄 부사장, 팍스인슈 대표이사를 역임했으며, 현재 중국 전문 다큐 제작사 와이더스케이프 대표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6년 이후 70회 넘게 중국을 여행했으며, 그 결과물로 방송 다큐멘터리 『인문기행 중국』 7부작, 『중국 문명기행 삼국지』 4부작, 『북방 대기행-바람의 제국을 가다』 5부작을 기획, 제작했다.

중국 관련 저술로는 『북경맛집 100』(MBC플러스 제작 어플리케이션), 『중국 음식기행』(주간조선 연재) 등이 있다.1년에 6개월 이상을 중국 어느 곳에 머물거나 배낭 하나 메고 곳곳을 돌아다닌 기록을 블로그에 남기고 있으며, 최근 3년간 일평균 600여 명(누적 83만 명)이 그의 블로그를 방문하여 1,800여 개에 이르는 중국 관련 포스트를 통해 중국을 만나고 있다. ‘왕초의 조그만 공개강연’이란 개인 정기강연도 매월 열고 있으며, 학교 연구기관 기업체 등에서 ‘인문기행 중국’이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기도 한다. ‘왕초’는 2000년 「왕초일기」라는 골프 칼럼에서 시작해 지금까지 한번도 바꾸지 않고 사용해온 닉네임이다.

목차

글을 시작하며 | 80년 전의 대장정에 주목하다

1장 | 그날 기묘한 탈주가 시작되다
장정이 아닌 탈주
작은 대장정, 출발하다
혁명의 용광로 상하이

2장 | 마오 봉건에서 혁명과 권력으로
마오쩌둥 일생의 대장정이 시작된 곳, 창사
양카이후이와 함께 혁명의 씨앗을 키우다
혁명소녀 허쯔전의 비극적인 삶

3장 | 참패 핏물로 범람한 샹강
신중국을 지탱하는 힘, 열사능원
허리가 잘려버린 참혹한 패배
좡족과 야오족의 룽성을 지나 퉁다오로 향하다

4장 | 부활 마오쩌둥의 반격
저우언라이의 도움으로 재기의 발판을 다지다
자오싱의 둥족과 카이리의 먀오족
쭌이에서 부활한 마오쩌둥

5장 | 질주 1 강한 적을 현란하게 속이다
아군조차 어지러운 기만작전, 사도적수
구이저우에서 설을 보내고 윈난으로

6장 | 질주 2 목숨 건 루딩교 전투
드디어 창강을 건너다
무한질주로 루딩교를 탈취하다

7장 | 고난 설산과 습지와 내분
설산 넘어 제4방면군과 만났으나
내분이 발목을 잡고
악마의 아가리, 습지

8장 | 승리 반전의 회생, 위대한 승리
홍군끼리 총질할 순 없다!
라쯔커우 협곡을 돌파하다
드디어 종착이다!

9장 | 실패 스스로 망할 일만 했다
시안사변의 현장을 찾아서
장제스는 왜 실패했나
남의 일 같지 않은 대참사

글을 마치며 | 참담한 심정, 고마운 마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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