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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화시집 상세페이지

에세이/시

임화시집

소장전자책 정가1,000
판매가1,000

임화시집작품 소개

<임화시집> 임화(林和, 1908~1953)를 아시는가. 시대의 협량함에 주박된 운명을 제 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 남자를 모르시는가. 카프 중앙위원회 서기장이고 좌파 진영의 대표적 문학이론가이자 시인이었던 임화. 그는 박영희의 인도로 프로 문학에 입문하고, 동경 유학생출신으로 공산주의 이론가인 이북만(李北滿)에게서 혁명 투쟁의 전략 전술들을 전수받는다. 일찍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모던 보이’ 임화는 이탈리아 출신 무성영화시대의 명배우 발렌티노에 비견될 정도로 미남자였다. 서울토박이 중인 계급 출신의 지식인인 임화는 내면적 기질에서 모더니스트이고 몽상가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몽상가라는 타고난 자신의 체질을 전면 부정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의 운명을 제법 의기양양하게 수임(受任)했을 때조차 도시인의 날렵함, 손해 보지 않으려는 영악함, 몸의 가벼움이 하루아침에 바뀔 수는 없었다. 1947년 1월 25일, 미군정은 농가 인구 한 사람당 67.5킬로그램의 쌀만 남기고 나머지 수확물은 모두 공출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어서 7월부터 식량 수집원들의 강제 사찰과 징수가 전국적으로 강행된다. 일제의 수탈 정책 못지않은 이 강제 징수에 기층 민중들의 불만은 마침내 사만 여명에 이르는 철도 부문 종사원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9월 총파업’으로 불리는 전국 규모의 총파업으로 번져나간다. 이 파업을 진압하기 위해 동원된 군경과 테러단의 무차별 폭력은 ‘10월 인민항쟁’을 촉발시키는 기폭제가 된다. 군경의 폭력에 항의하는 군중집회에서 경찰의 발포로 사망자가 생겨나자 분노한 노동자·시민·학생들이 관공서를 습격하는 등 무장 봉기의 양상을 띠게 된다. 대구에서 시작된 무력시위는 삽시간에 영남 일대에서 남한 곳곳으로 번져나갔다. 이때 울려 퍼지던 것이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은 우리들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깃발을 덮어다오. 붉은 깃발을……”이라는 노래다. 임화의 시에 김순남이 곡을 붙인 ‘인민항쟁가’다. 그는 끝내 난파가 예정된 운명의 주박을 떨쳐보려고 안간힘을 다했으나 끝내 떨쳐내지 못한 채 난파의 운명과 맞닥뜨린다. ‘시와 혁명 사이에 낀 운명’(김훈)을 살다간, 지금은 명부(冥府)에 있는 그 임화를 불러내 보자. 몽상가: 당신이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북쪽에서 ‘미제 스파이’라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처형된 게 1953년이다. 내가 갑자기 당신을 불러낸 것이 혹시 당신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임화: 아니다. 괜찮다. 몽상가: 당신의 출생 이력과 출신 배경을 알고 싶다. 임화: 나는 1908년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나 4,5세 때 아버지가 소기업을 경영하여 17,8세 때까지 소시민의 가정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1921년부터 경성시에 있는 보성중학에 재학하고 있었는데 그때부터 문학에 흥미를 느껴 시를 쓰기 시작했고, 1926년 12월경에는 한설야, 이기영 등과 함께, 이미 1925년에 조선공산당의 영향 하에 조직된 프로문학 단체인 카프에 가입했으며, 1928년 7월경부터는 카프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후 1932년 4월경부터는 카프의 서기장으로서 조선문학 지도부의 한 사람이 되었다. 몽상가: 카프의 서기장, 조선문학의 지도자가 된 것은 자유분방하고 창백한 몽상가로 태어난 당신의 기질과는 사뭇 다르다. 김팔봉은 “임화는 본래 신경향파에 따라 오던 문학청년이 아니고 당시 세계적으로 퍼지던 다다이즘을 좇아가던 시 쓰는 문학청년이었다.”고 말한다. 이어서 “박영희를 좋아해 그를 따라다니다가 프로예맹이 조직된 뒤에 그의 집에서 먹고 자고 했다.”고 증언한다. 박영희는 일본을 통해 레닌의 ‘당의 문학’이란 명제를 받아들인 첨단 좌파로 좌파 문예이론의 전도사였다. 당신은 그를 ‘좋은 스승’이라고 말했다. 내가 알기로는 당신은 태생적으로 시대의 가출아, 시대의 문제아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당대의 전위에 서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좌파 혁명가의 길을 가고 있는 박영희의 모습은 당대의 첨단이었다. 박영희에게 매혹된 당신은 그와 닮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기질과 무관하게 좌파 혁명가의 풍찬노숙의 길을 간 것은 불가피한 실존의 선택이기보다는 질풍노도로 치닫는 청춘의 무모한 열정과 내면의 소영웅주의, 시대를 앞지르려는 영악함의 부추김이라는 혐의가 짙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임화: (잠시 말이 없다.) 1934년 4월과 5월에 일제경찰의 탄압으로 나와 같이 활동하고 있던 카프의 지도자 한설야, 이기영 등을 비롯한 간부들이 전라북도 경찰부에 검거되었다. 그때 나도 검거되지만 폐결핵의 악화로 풀려났다. 내게 닥쳐올 일제의 탄압에 겁을 먹고, 문화인은 어떠한 시기에서나 작품을 쓰면 살 수 있으니 차라리 이 기회를 이용하여 실제에 영합함으로써 일신상 안락을 꾀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1935년 6월 하순에 경기도 경찰부 주임인 일본인 경부 사이가와에게 내가 서명한 카프의 해산선언서를 내주고 일제와 완전히 결탁했다. 몽상가: 내 판단과 추측에 대해서는 당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소극적 긍정으로 받아들이겠다. 당신의 ‘이념적 아비’라고 할 수 있는 박영희는 어느덧 카프에서 발을 빼고 변신을 해버렸다. 게다가 당신은 욱일승천하는 일제의 기세에 압도되어 주눅이 들었으며, 당신이 꿈꾼 근대성이 조선을 통해서는 그 실현이 요원해보였고 그래서 이미 근대성을 실현하고 있는 일제에 투항했다. 일제에의 투항은 곧 근대성에의 투항이고 그것은 현실과의 통정(通情)이라고도 볼 수 있다. 맞는가? 임화: 프로문학의 계급적 입장을 떠나, 순수문학을 주장하면서 내선일체와 반소·반공행위를 했다. 1935년 8월부터 1937년 9월 초순까지 경상남도 마산시에 있는 처가에서 병을 치료하고, 1937년 9월 중순에 경성으로 되돌아와서, 같은 해 10월경부터는 민족해방 투쟁에서 변절한 자들의 집단인 경성시 보호관찰소에 가담하는 한편, 금강기업주이던 최금주의 자금지원으로 일제의 합법적 출판기관인 <학예사>를 경영했다. 1939년 4월경에는 <학예사>를 대표하여 조선총독부 도서과 주최로 경성 부민관에서 열린 각 출판기관 대표자 및 문단의 중요 작가들의 회합에 참가했으며, 이 자리에서 용산에 주둔하던 조선군사령부의 보도부 대표인 소좌 정(鄭)모씨의 초소에 따라 ‘시국협력’에 응했다. 같은 해 6월경에는 소위 ‘국민총연맹’의 문화부장이었던 일본인 야나베를 그의 사무실에서 만나, 약 30분간 회담을 진행하면서 앞으로 조선인 문학자들이 시국에 협력하여 ‘내선일체’의 강화와 ‘국민정신’ 배양에 노력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했다. 회담 장면을 촬영, 그것을 잡지에 발표케 함으로써 많은 문단 활동가와 조선인민으로 하여금 일제를 위해 충성을 바치게끔 유인했다. 몽상가: 당신은 교묘하게 내 물음의 즉답을 피하고 있다. 어쨌든 당신의 마음이 그리 편치 않다는 것은 잘 알겠다. 당신은 공산주의 이론가인 이북만의 누이동생인 이귀례와 동거하며 딸 하나를 두었다. 1935년 폐결핵 치료를 위해 마산으로 내려와 지하련(池河連, 1912~1953)을 처음 만나는데, 당신들은 곧 사랑에 빠져 조촐한 결혼식을 올리고 부부가 된다. 당신보다 네 살 아래인 지하련에 대해 서정주는 “상당히 미모여서 문인들 사이에 인기가 대단했다. 임화가 작품보다 문단 정치로 유명해진 데 비해, 그의 부인은 글재주가 임화보다 나았다.”고 전하는가 하면, 이형기는 “길죽한 얼굴, 시원한 검은 눈, 콧날은 날카로운 편, 키는 호리호리…… 늘 치마저고리에 성격은 적극적”이었다고 증언한다. 지하련은 백철의 추천을 받아 1940년 12월 《문장》에 단편 「결별」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온다. 사적인 배경과 재능, 미모로 많은 시선을 모은 신진작가인 지하련을 아내로 맞은 그때가 아마도 당신의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당신은 처가가 있는 마산의 맑은 공기와 낚시 등으로 소일하는 한유한 생활, 그리고 지하련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점차 건강을 회복해 간다. 1938년께 당신들은 서울로 올라와 전농동에 살림을 차리고 1남 1녀를 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지하련이 중병을 얻어 당신과 자식을 서울에 남겨두고 요양 차 마산으로 내려온다. 당신은 마산의 지하련에게 “세상이 소란해서 마음 둘 곳 없는데 너는 앓고 아이들은 가엾고 나는 고달프고 쓸쓸하다.”는 편지를 썼고, 지하련은 “죽음이 무섭지는 않다. 잊을 수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죽음은 두려운 것이고 병고란 한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고 되뇌며 당신과 아이들을 걱정하고 외로운 투병생활을 이어갔다. 서울에서의 당신의 행적을 말해보라. 임화: 1940년 6월경에는 ‘조선반공협회’ 기관지인 《반공의 벗》에 「북한산맥」, 「태평통」 등의 수필을 발표하여, 반소·반공의 사상적 경향을 주입시켰다. 같은 해 8월경부터 1942년 3월까지 부르주아 영화사인 <조선영화사> 문예부 촉탁으로 있으면서 1942년 3월경 조선군사령부보도부에서 제작한, 조선 청년들을 일제의 징병으로 출동시키기 위해 만든 선전영화 「너와 나」의 대본을 직접 교정했으며 1943년 1월부터 1944년 12월까지는 ‘조선영화문화연구소’의 촉탁으로 있으면서 반동적인 내용의 『조선영화연감』과 『조선영화발달사』를 편집, 조선문화 및 영화의 발전을 위해 당연히 일제와 합동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강조했다. 몽상가: 당신은 ‘문학’에서 ‘영화’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화’는 시대의 첨단이었던 ‘혁명’의 또 다른 변형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당신의 발걸음은 첨단에서 첨단으로 건너뛰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의 감동과 기쁨은 짧게 지나가고 해방 공간의 문단에는 이념에 따라 좌·우익 진영으로 갈라선 문인들의 분열과 대립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다. 두 문학 진영은 서로 반목하여 충돌을 일삼는데, 이 때문에 민족문학의 수립이라는 공통 과제는 뒷전으로 밀리고 해방 문단은 문단 테두리를 벗어난 정치적 대립으로 얼룩진다. 앞 다투어 전국 대회를 열며 두 문학 진영이 각각 내놓은 문건은 모두 ‘민주국가건설’과 ‘민주주의적 조선 건설’을 앞세우고 있었다. 이는 당시 문단의 분위기가 ‘문학’보다 ‘정치’에 크게 쏠려 있었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 뒤의 행적을 계속 말해보라. 임화: 8·15해방을 맞이하여, 같은 달 16일 경성에서 부르주아 순수문학의 제창자였던 김남천, 이원조, 이태준 등과 같이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가 1947년 가을 평양으로 들어왔고, 같은 해 말 박헌영의 지시로 해주 제일인쇄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개시, 서울에 가서 조선문화총동맹을 조직하고 부위원장으로 공작하고 있었다.(잠시 고개를 떨구고 말을 멎는다.) 더 이상은 못하겠다. 지나간 내 생을 되돌아보는 일은 고문보다 더 괴롭다. 몽상가: 북쪽에서 당신 생의 마지막 호칭은 유감스럽게도 ‘피고 임화’였다. 당신은 1945년부터 1952년 9월까지 미군첩보기관에 북쪽의 동향을 상세 보고한 ‘미제 스파이’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최고 재판소 군사재판부에 의해 당신은 재산 몰수와 사형선고를 받고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한다. 언어 위에 세상을 세우려는 자들의 덧없음을 잘 아는 나는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한없는 연민과 함께 마음이 매우 불편해진다. 이해하겠는가? 당신이 잊고 있는 기억들을 헤집으며 당신을 괴롭혔다면 용서해 달라. 나는 전적으로 당신을 이해한다. 명부에서라도 당신이 편안했으면 좋겠다. 이것이 내 진심이다. 아아, 임화! 한국의 근대문학사가 이식문학사라고 그 본질을 꿰뚫어 본 임화의 외관은 엄숙하고 시퍼렇게 날이 선 좌파 혁명가였지만 내면으로는 여전히 한치 앞도 내다 볼 수 없는 혼돈의 시대를 아슬아슬하게 횡단해나가는 창백한 인텔리에 지나지 않았다. 1947년 남한의 정세가 여의치 않자 임화가 월북하고, 지하련도 1948년 소설집 『도정』이 발간될 즈음 월북한다. 해방 직후 촉망받는 소설가로 자리를 굳혀가던 지하련은 아까운 재능을 더 꽃피우지 못하고 남편 임화와 함께 파국으로 치닫는다. 1953년 남로당의 숙청으로 남편 임화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만주 땅에서 전해들은 그녀는 무너진 가슴을 안고 평양으로 달려간다. 그러나 시체조차 찾지 못한 지하련은 실성해 치마끈을 풀어헤친 채 평양 시내를 헤매다가 결국 병사하고 만다. [네이버 지식백과] 임화 [林和] - 모던보이에서 붉은 깃발을 든 좌표 혁명가로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나무이야기)


저자 소개

임화(林和) 1908년 10월 13일 ~ 1953년 8월 6일 시인·평론가·문학운동가. 본명은 임인식(林仁植). 서울 출생. 1921년 보성중학에 입학하였다가 1925년에 중퇴. 1926년부터 시와 평론을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영화와 연극에도 뛰어들었다. 1928년에 박영희(朴英熙)와 만났으며, 윤기정(尹基鼎)과 가까이 하면서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가담. 1929년에는 「우리 옵바와 화로」·「네거리의 순이(順伊)」·「어머니」·「병감(病監)에서 죽은 녀석」·「우산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발표. 시집 『현해탄(玄海灘)』·『조선신문학사』 간행, 출판사 ‘학예사’ 운영, 1946년 2월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주최의 제1차 전국문학자대회를 성황리에 개최하였다. 1947년 11월에 월북하기 전까지는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 노선의 민전의 기획차장으로 활동. 월북 후에는 6·25까지 조·소문화협회 중앙위 부위원장으로 일하였다. 1953년 8월에 남로당 중심 인물들과 함께 북한정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당하였다. 시집으로는 『현해탄』(1938)·『찬가(讚歌)』(1947)·『회상시집(回想詩集)』(1947)·『너 어느 곳에 있느냐』(1951) , 평론집으로는 『문학의 논리』(1940)가 있다.

목차

판권 페이지
향수
현해탄
曇[담] ─ 1927
어린 太陽[태양]이 말하되
오늘밤 아버지는 퍼렁이불을 덮고
하늘
화가의 詩[시]
눈물의 해협

愁鄕[수향]
행복은 어디 있었느냐?
江[강]가로 가자
너 하나 때문에
지구와⌜빡테리아⌟
車中[차중]
홍수 뒤
가을 바람
밤 갑판 위
우리들의 戰區[전구]
벌레
海上[해상]에서
다시 인젠 天空[천공]에
구름은 나의 從僕[종복]이다
세월
깃발을 내리자
네거리의 순이
다시 네거리에서
바다의 찬가
새 옷을 갈아 입으며
암흑의 정신
양말 속의 편지
우산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侏儒[주유]의 노래
지상의 詩[시]
最後[최후]의 念願[염원]
해협의 로맨티시즘

골프場[장]
荒蕪地[황무지]
月下[월하]의 對話[대화]
나의 눈은 핏발이 서서 감을 수가 없다
내 청춘에 바치노라
안개 속
夜行車[야행차] 속
옛 책
우리 오빠와 화로
一 年[일년]
地圖[지도]
나는 못 믿겠노라
자고 새면
三月一日[삼월일일]이 온다
주리라 네 탐내는 모든 것을
敵[적]
故鄕[고향]을 지나며
上陸[상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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