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정비석
본명은 서죽(瑞竹)이다. '비석'은 스승이었던 김동인이 지어준 이름이다.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1932년 일본에 있는 니혼 대학 문과를 중퇴했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근무했다. 1935년 시 [도회인에게], [어린것을 잃고]와 소설 [여자], [소나무와 단풍나무]를 발표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졸곡제(卒哭祭)]가 입선되었고, 193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성황당(城隍堂)]이 당선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 문인 단체인 조선문인보국회 간사를 지냈다. 해방 후에는 [중앙신문] 문화부장을 지냈고, 이후 전업 작가로 소설 창작에 매진해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했다. 1954년(1. 1∼8. 6) [서울신문]에 연재한 장편 [자유부인]은 당시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아 정비석의 대표작이 되었다. [자유부인]은 전쟁 이후 달라진 사회상을 현실적으로 묘사·풍자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당시 지식인 계층의 대표 격인 교수와 그 부인의 모습을 통해 사회의 타락상을 드러내고 있어 사회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황산덕은 교수를 모욕한다는 논지로 공개적인 이의를 제기해 '자유부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문학평론가 백철은 '신문소설의 대중성과 예술성 문제'를 거론, 이후 문단에서는 신문소설의 윤리성과 창작의 자유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여성 단체와 정계에서도 정비석 작가에 대한 고발과 투서가 이어졌다. 이로 인해 [서울신문]의 판매 부수는 세 배로 뛰어올랐다. 정음사에서 펴낸 단행본 [자유부인]은 발매 사흘 만에 초판이 매진되고 총 7만 부가 팔려, 국내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기록되었고 여러 차례 영화화되었다. 이후 정비석은 역사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976년에는 장편 [명기열전]을 [조선일보]에 4년간 연재했고, 1980년에는 장편 [민비]를 발표했다. 1981년 6월 2일부터 1989년 7월 23일까지 8년여 동안에는 [한국경제신문]에 장편 [손자병법(孫子兵法)], [초한지(楚漢志)], [김삿갓 풍류 기행]을 잇달아 연재했다. 소설집으로 [청춘의 윤리](1944), [성황당](1945), [고원(故苑)](1946) 등 80여 권이 있고, 수필집으로 [비석(飛石)과 금강산의 대화](1963), [노변정담(爐邊情談)](1971), 평론집으로 [소설작법(小說作法)](1946)이 있다. 1991년 서울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산정무한>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