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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화

    이선화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
    프랑스 소르본대학교 대학원 박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학사

2015.01.19.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본명이 피에르‐오귀스탱 카롱(Pierre-Augustin Caron)인 보마르셰는 1732년 시계 제조업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솜씨 좋은 장인을 아버지로 둔 덕에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며 음악과 시를 공부하고 예술과 문학에 대한 식견을 쌓았다. 보마르셰가 연극계에 입문하게 된 것은 1760년에서 1763년 사이로, 친분이 있던 재력가 르 노르망 데티올 후작의 성에서 연회를 주관하면서 그는 희극과 당시 유행하던 장르인 퍼레이드(Parade)의 대본을 집필하며 극작을 시작한다. 이때의 성공에 고무되고, 또 한편으로 디드로의 드라마 연극론에 매료된 보마르셰는 두 편의 부르주아 드라마 <외제니(Eugénie)>(1767)와 <두 친구 혹은 리옹의 장사꾼(Les Deux Amis ou Le Négociant de Lyon)>(1770)을 발표했으나 결과는 참담한 실패였다. 그러고 나서 이른바 피가로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세 편의 희극 <세비야의 이발사>와 <피가로의 결혼>, <죄지은 어머니>를 발표하며 프랑스 연극계의 총아로 떠오른다. 1777년 보마르셰는 극작가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극작가협회를 창설한다. 수년에 걸친 투쟁 끝에 극작가협회는 드디어 1791년 입헌의회 치하에서 작가들의 문학적 권리와 상속권을 인정받기에 이른다. 이른바 오늘날의 지적재산권이란 개념이 처음으로 인지되게 된 것이다. 1789년 58세 나이로 프랑스 혁명에 가담하지만 모반, 루이 16세와의 비밀 교신, 횡령 등의 혐의로 고발당한다. 간신히 교수형을 면하고 몇 년을 숨어 지내다 정부 승인 아래 독일 함부르크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이민자로서 고된 삶을 살다가 1799년 프랑스 자택에서 뇌출혈로 사망한다.

<죄지은 어머니>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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