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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소개
이름: 연암 박지원
약력: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실학자
仲美, 호는 연암燕巖, 연상煙湘, 열상외사洌上外史이다. 18세였던 1754년(영조 30),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아 이를 극복하고자 여러 계층의 진실한 인간형에 대해 모색한 전傳 아홉 편을 지어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이란 이름으로 묶었다. 1771년경 마침내 과거를 그만 보고 재야의 선비로 살아가기로 결심, 연암은 서울 전의감동典醫監洞(지금의 종로구 견지동)에 은거하며 벗 홍대용洪大容 및 문하생 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과 교유하면서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받으면서도 새롭게 창조하자’는 말로 집약되는 자신의 문학론을 확립하고, 참신한 소품小品 산문들을 많이 지었다.
1780년(정조 4) 삼종형三從兄 박명원朴明源이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을 축하하는 특별 사행使行의 정사正使로 임명되자, 연암은 그의 자제군관子弟軍官으로서 연행燕行을 다녀왔다. 이 결과 지어진 것이 『열하일기』이고, 이는 완성된 전권이 나오기 전부터 열띤 반응을 받았다. 50이 된 1786년, 연암은 음직蔭職으로 선공감 감역繕工監 監役으로 관직을 맡게 되고 그 후 경상도 안의 현감安義縣監, 의금부 도사, 의릉 영懿陵令 등을 거쳐, 1797년부터 1800년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지금의 충남 당진)의 군수 등으로 재직하며 농업 장려를 위해 널리 농서를 구한다는 윤음綸音(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과농소초課農小抄』를 진상했다.
1800년 음력 8월 연암은 강원도 양양 부사襄陽府使로 승진했으나, 궁속宮屬과 결탁하여 양양 신흥사神興寺 승려들이 전횡하던 일로 상관인 관찰사觀察使와 의견이 맞지 않아 1801년 늙고 병듦을 핑계 대고 사직했다. 1805년(순조 5) 음력 10월 29일, 69세의 나이로 연암은 서울 북촌 재동齋洞(지금의 가회동) 자택에서 별세했다.
※ 역자 소개
이름: 김영죽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를 졸업했다, 동대학원에서 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근무했고 현재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및 동아시아학술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면서 동 대학 한문학과 및 동아시아학술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는 『19세기 낭송연행록』 『조선 지식인이 세상을 여행하는 법』 등이 있으며 국역 북원록』, 『국역 벽로집』 등을 공역했고 「베트남 西山朝 巨儒 吳時任의 使行관련 기록 일고」, 「譯官, 士와 商의 경계에 서다 - 조선 후기 역관과 士商儒商 사이의 개연성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름: 김현미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한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화여자대학교 우리말과 글쓰기 담당 조교수,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 연구원 전임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연행록사전 담당 전임연구원 등을 역임하고, 현재 퇴계학연구원 『퇴계학사전』 전임연구원으로 있다.
『18세기 연행록의 전개와 특성』을 펴냈으며 『한국여성작가 연대기』 『경계에 선 유교 지식인의 여성 담론』 등을 공역했다. 『19세기·20세기 초 여성생활사 자료집』 4, 5집 등의 번역서도 펴냈다. 「19세기 연행록에 드러난 홍경래의 난과 그 토양 ‘서북’」, 「파병군이 언급한 임진전쟁의 구도와 공적功績 - 가유약賈維鑰의 부산평왜비명平倭碑銘을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발표했다.
<열하일기(熱河日記)>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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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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