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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 게오르크 카이저(Georg Kaiser)
게오르크 카이저는 1878년 11월 25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상인 프리드리히 카이저와 부인 안토니 안톤의 여섯 아들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는 교사와 교육 과정에 대한 불만으로 김나지움을 중퇴한 후 3년간 상업 수업을 받았다. 서점과 수출입상에서 수습사원으로 일하면서도 항상 플라톤과 니체를 읽었고, 바흐와 베토벤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1898년에 카이저는 석탄 운반 인부로서 화물선을 타고 남아메리카로 가서 3년간 아에게(AEG) 부에노스아이레스 지사 경리 사원으로 일한다. 그러나 말라리아에 걸려 스페인, 이탈리아를 거쳐 독일로 돌아가서는 주로 마그데부르크에 머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 25세에 첫 작품으로 희비극 <클라이스트 교장>을 발표했다. 1908년 10월에 카이저는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인 마르가레테 하베니히트(Margarethe Habenicht)와 결혼해 제하임 안 데어 베르크슈트라세로 이사했으며, 1911년부터는 바이마르에도 겨울 저택을 갖게 되었다. 1915년에 처음으로 <학생 페게자크 사건>이 빈에서 공연되었다. 1917년 <칼레의 시민들>과 <아침부터 자정까지>의 초연으로 카이저는 극작가로서 최초로 성공과 명성을 얻는다. 이후 카이저의 작품 중 40편 이상이 세계 각국에서 초연됨으로써 그는 명실상부한 세계적 극작가로 부상한다.
이처럼 극작가로 성공했지만 카이저는 경제적으로는 오히려 압박받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런 상황이 경제에 대한 무지나 세상사를 모르는 탓으로 야기된 것인지, 아니면 작가로서의 왕성한 체험 욕구나 낭비벽 때문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차츰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가 법정 투쟁까지 이르게 된다. 1920년 6월 카이저는 가족과 함께 뮌헨 근교 투칭에서 가구가 비치된 호화 별장을 빌려 생활하던 중, 창작 활동을 계속하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임의로 이 집의 가구 집기 등을 저당 잡히거나 매각 처분한다. 이 일로 카이저는 횡령 및 사기죄로 구속되어 뮌헨 지방법원 법정에 서게 됨으로써 처음으로 세상에 자신의 사적 존재를 드러낸다. 원래 성격이 내성적이고 세상을 기피하는 그에게 이 사건은 치욕과 불명예를 안겨 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사생활을 일반에 낱낱이 공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재판이 진행되는 중에 카이저는 담당 판사에게 창조하는 인간에 대한 불가침성을 주장하면서 이미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고 있는 정신적 인간에게 더 이상 고통을 안겨 주지 말 것을 탄원한다. 결국 1921년 2월 횡령죄로 1년 징역형을 선고받지만 2개월 후인 4월 중순에 집행유예로 풀려난다. 카이저는 이러한 체험을 <아침부터 자정까지>에 나오는 은행원과 <산호>에 나오는 억만장자로 재현해 보인다. 1921년부터 1938년까지 카이저는 베를린 근교 그륀하이데에 머무르면서 극작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 기간 중 1933년은 카이저의 창작 기간에서 중간 시기를 마감하는 결정적인 해였다. 즉 이 해 2월 라이프치히에서 <은빛 호수>를 초연한 후, 카이저의 작품들은 나치스에 의해 유대적 성향의 타락한 예술로 규정돼 출판과 공연이 금지된다. 뿐만 아니라 카이저는 프러시아 예술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 후 5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으며 그륀하이데에 계속 머무르다가 1938년 가족과 이별한 채 홀로 암스테르담을 거쳐 스위스로 망명을 떠난다. 그는 이때의 심경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륀하이데에선 다음 선택밖에 없었다. 아사(餓死) 아니면 자살. 그러나 나는 작품을 버리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난 내 작품에 의무를 지고 있다. (…) 난 살아남았다, 작품을 위해서.”
이후 7년 동안 스위스 각지를 전전하며 고독한 망명 생활 가운데서도 카이저는 한시도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44년에 그리스 희곡 3편 중 마지막 작품인 <벨레로폰>을 끝내고 소설 ≪아르트≫를 집필하던 중 1945년 6월 4일에 색전증으로 아스코나에서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독일에 있던 아내 마르가레테는 라디오를 통해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사후 반세기 이상이 지난 오늘날 가장 위대한 표현주의 극작가로 지칭되는 카이저의 전성기는 1917년 이후 몇 년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17년 1월 19일에 <칼레의 시민들>이 프랑크푸르트 초연에서 최초로 성공한 뒤, 같은 해에 <산호>를 비롯한 드라마 3편을 출간했고, <아침부터 자정까지> 등 5편의 드라마가 초연되었다. 1918년엔 <가스> 등 새로운 드라마 6편을 발표했고, <오페라 극장의 화재> 등 7편의 드라마가 초연되었다.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드라마들을 잇따라 출판하고 초연한 결과, 카이저는 1919년에 이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과 함께 독일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작가가 되었다. 카이저의 단시일에 걸친 급속도의 성장은 독일 연극사에서 그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이 같은 다작과 ≪구약성서≫부터 현대 산업사회까지 다양한 소재, 독특한 극 형식과 문체 등은 작가를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만들고 있다. 때문에 카이저는 표현주의 문학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면서 이중적 성격을 지니게 된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인간상의 주창자, 새로운 드라마 형식의 창조자로 칭송받는 반면 다른 한편으로는 노련한 무대, 드라마 제작 기술자로 폄하되기도 한다.
혼란스러울 정도로 소재와 극 형식이 다양하지만, 카이저의 전 작품 면면에 흐르는 일관된 주제는 새로운 인간과 그에 의한 인류와 세계의 개혁이다. 인간과 인류의 개혁에 관한 이념은 카이저의 독창적인 개념은 아니다. 이미 이러한 이념은 기독교 구원론이나 니체의 사상에서 발견된다. 희생과 박애의 정신이란 면에서 그리스도와 카이저의 새로운 인간 사이에 현저한 유사성이 나타나고 있으며, 카이저의 새로운 인간의 전제인 참회와 고백, 개전과 각성 역시 기독교 사상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카이저의 인간은 스스로 힘으로 자신을 구제해야 하는 반면 기독교 사상은 메시아의 구제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와 관련해 카이저가 <칼레의 시민들>이나 <아침부터 자정까지> 그리고 <가스> 3부작에서 사용하는 성경 구절이나 기독교적 메타포는 기독교 신봉에서 비롯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 개혁에 관한 자신의 이념과 비전을 표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카이저의 인간 개혁에 관한 이념은 20세기의 예언자였던 니체에게서 영향받은 바 크다. 니체는 대단한 철학적, 작가적 영감으로 새로운 야성의 인간, 도덕과 종교의 금기를 대담하게 깨뜨려 버리는, 그리고 강하고 자유로운 생을 향유하는 인간의 이상으로서 초인을 제시했다. 이러한 초인은 카이저를 비롯한 표현주의자들이 찾고 있었던 새로운 인간의 대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카이저의 이념과 니체의 사상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니체의 사고는 항상 초인의 사상을, 즉 민중과 양극적 위치에 서서 그들 위에 군림하는 특출한 한 개인의 이상을 추구하는 반면에 카이저는 개개인의 인간 자체를 문제시하며, 나아가 모든 인간의 개혁과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카이저에게 인간 개혁이란, 초인과 같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잠들어 있는 본래의 인간성을 깨워 일으키는 것을 의미한다.
역자 - 김충남
김충남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본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수학했으며, 뷔르츠부르크대학 및 마르부르크대학교 방문교수, 체코 카렐대학교 교환교수를 지냈다. 1981년부터 한국외국어대학교에 재직하면서 외국문학연구소장, 사범대학장, 한국독어독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세계의 시문학≫(공저), ≪민족문학과 민족국가 1≫(공저), ≪추와 문학≫(공저), ≪프란츠 카프카. 인간· 도시·작품≫, ≪표현주의 문학≫이 있고, 역서로는 게오르크 카이저의 ≪메두사의 뗏목≫, ≪아침부터 자정까지≫, 페터 슈나이더의 ≪짝짓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헤르만 전쟁≫, 에른스트 톨러의 ≪변화≫, 프란츠 베르펠의 ≪거울인간≫, ≪야코보프스키와 대령≫, 프리드리히 헤벨의 ≪니벨룽겐≫ 등이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응용미학으로서의 드라마−실러의 ‘빌헬름 텔’ 연구>, <신화의 구도 속에 나타난 현재의 정치적 상황−보토 슈트라우스의 드라마 ‘균형’과 ‘이타카’를 중심으로>, <최근 독일문학의 한 동향: 페터 슈나이더의 경우>, <베스트셀러의 조건−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의 경우> 외에 독일 표현주의 문학과 카프카에 관한 논문이 다수 있다. 현재 한국외국어대학교 독일어과 명예교수로 ‘독일 명작 산책’과 ‘독일 작가론’을 강의하고 있다.
<병사 다나카>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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