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량치차오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자(字)가 탁여(卓如), 호(號)는 임공(任公)이며, 필명(筆名)은 음빙실주인(飮冰室主人)·음빙자(飮冰子)·만수실주인(曼殊室主人)·신민자(新民子)·소년중국지소년(少年中國之少年) 등등이다. 서구 열강의 침략과 대항의 최전방 지역이었던 광둥성(廣東省) 신후이(新會) 사람으로, 반경반독(半耕半讀)의 향신(鄕紳) 가정에서 태어났다. 동치(同治) 12년(1873), 즉 아편전쟁이 일어난 지 33년 뒤, 태평천국의 난이 평정된 지 10년 뒤, 서구의 충격이 한창 중국으로 물밀듯이 거세게 쳐들어오던 시기였다.
량치차오는 중국 역사상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한 근대 전환기를 살면서 끊임없이 시대를 이끌어 간 대표적 지식인이었다. 신문·잡지 및 교육을 기반으로 변법유신(變法維新)을 도모하고, 근대화된 서구 문명을 선전함으로써 폐쇄되었던 근대 중국에 새로운 개혁의 기풍을 일으켰으며, 특히 탁월한 계몽주의 사상가·정치가·언론인·교육자·문학가로서 중국 문화사(文化史)에서 절대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일반적으로 량치차오의 생애는 크게 수학(修學) 시기(1873∼1894), 유신 운동과 계몽 활동 시기(1895∼1903), 입헌 추진과 정치 재개 시기(1904∼1917) 그리고 강학(講學)과 저술 시기(1918∼1929) 등 네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량치차오는 18세 이전까지 조부와 부친에게서 유학(儒學) 위주의 전통적인 교육을 받고, 수재(秀才)와 거인(擧人)이 되었다. 이후 18세에 입경(入京), 회시(會試)에 응시해 실패했으나 곧이어 금문경학(今文經學)의 대가이자 변법 유신파의 선구자였던 캉유웨이(康有爲)와 사제의 연을 맺으며 생애 최대의 전환기를 맞이했다. 즉, 이듬해부터 광저우(廣州) 만목초당(萬木草堂)에서 약 3년 동안 경세학(經世學)을 공부하며 평생 학문의 기초를 다졌고, 이를 통해 어려서부터 쌓아 온 유가 소양을 더욱 깊고 두텁게 하며, 넓고 새로운 다른 세계의 존재에 대해 인식할 수 있었다. 줄곧 과거 준비와 사장(詞章)에 전념해 온 량치차오는, 캉유웨이를 만난 이후로 전통적인 학문은 물론 서학(西學)까지 배우게 되었으며, 특히 캉유웨이의 공양학을 전수받아 애국적 이상과 변법 유신의 사상 체계를 계승·발전시킬 수 있었다.
둘째 시기에 있었던 무술유신(戊戌維新, 1898)은 그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정치적·사상적으로 당시 진보주의의 주류였으며, 캉유웨이와 함께 그 전 과정에 참여하고 선두에 섰던 량치차오의 입장에선 이때를 전후로 한 7년여의 기간이 일생 중 가장 중요한 때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그는 정치 일선에 있었거나 부득이 일본에 망명해 있었거나 간에 ≪시무보(時務報)≫(1896)·≪청의보(淸議報)≫(1898)·≪신민총보(新民叢報)≫(1902) 등 언론과 강학회(强學會)·대동학교(大同學校) 등의 학회·학교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조국을 개혁하고자 했다. 당시 량치차오의 문장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서구 자본주의 문명과 의식 형태에 관한 논술로, 주로 문예 부흥으로부터 유럽 시민 혁명 무렵까지의 학술 유파·사지(史地) 지식 및 인물 전기 등 참신하고 광범위한 내용의 것들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정론·철학·사학·교육·문학 등의 학술 저작으로, 특히 선전·계몽성이 강한 것들이었다.
이 시기 학술 연구를 통해 정립된 량치차오의 사상은 다음의 여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변혁 사상으로, 청조의 회복이나 재건이 아니라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전면적인 변혁을 주장했다. 둘째는 애국 사상으로,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을 인식하고 속히 중국 고유의 민족주의를 양성해 이를 억제할 것을 주장했다. 셋째는 민권 혁명 사상으로, 천부 인권론을 고취하고 ‘국가’와 ‘국민’의 개념을 제기해 국민이 자유와 평등을 쟁취할 것을 주장했다. 넷째는 이른바 중서 결합(中西結合)의 문화 사상으로, 특히 일본의 성공 경험에 고무되어 서학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다섯째는 ‘신민(新民)’을 위한 교육 사상으로, 무술 이전에는 과거를 폐지하고 학교를 일으키며 여성 교육[女學]과 아동 교육[幼學]에도 힘써야 한다는 등 변법의 근본이자 급선무로 여긴 인재 양성에 중점을 두었던 데 비해, 무술 이후에는 근대화를 위해 구시대의 열악한 국민성을 개선하고 국민의 문화 소양을 제고하는 문제에 치중했다. 끝으로 여섯째는 공업 입국의 경제 사상으로, 중국이 빈곤하고 약해진 국면을 타개하고 ‘부국 양민(富國養民)’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무농(務農)’·‘권공(勸工)’·‘혜상(惠商)’을 중시해야 하며, 그중에서도 특히 근대적 공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셋째 시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정치적·사상적으로 진보와 보수를 오가는 모습을 보이다, 신해혁명 이후 귀국해서는 주로 정치에 치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덜한 시기였다.
다음으로 넷째 시기의 초반, 즉 5·4 운동 무렵에는 이전 시기의 다소 복잡한 사상적 경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중국을 대표하는 자유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비록 정치적으로 당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재야인사로서 급진적인 정치 혁명에 반대하고 평화적인 점진을 주장했으며, 문화적으로 ‘세계주의적인 국가’를 건설하고 동서 문화의 융화를 추진할 것을 강조했고, 자유주의를 중시하는 등의 가치관을 견지했다. 그리고 사회 혁명이 20세기 세계사의 최대 특징이 될 것임을 예견한 바 있지만, 중국 개혁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적용이 부적합하다고 인식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문화 사상이 사회의 진보를 이끌어 간다는 점을 매우 강조한 것이 특히 두드러져 보인다.
마지막 다섯째 시기인 량치차오의 만년은 주로 학자로서 보낸 시기였다. 간략히 살펴보면, 우선 공학사(共學社)나 강학사(强學社)와 같은 문화 단체를 건립해 인재를 배양하고 새로운 문화와 정치의 기반을 조성하기에 힘썼다. 그리고 정치가가 아닌 학자로서 본격적인 학술 활동에 몰입해, 서학의 치학 방법(治學方法)으로써 전통 중국학을 연구하는 기풍을 정립하며, 유가 철학·선진 제자(先秦諸子)·청대 학술·불학(佛學)·역사 및 문예 미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겼다. 이 시기 량치차오의 방대한 저술 활동은 중국학에 대한 총결 작업으로서뿐만 아니라 연구 방법 면에서도 한 시대를 대표하고 후대의 학술 연구 기풍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또한 이 시기에 량치차오는 교육 활동에도 큰 힘을 쏟아 중궈공학(中國公學)·난카이대학(南開大學) 등에서 중국 문화와 역사에 관한 학문을 전수했으며, 특히 1925년에는 칭화대학(淸華大學) 국학연구원(國學硏究院)을 실질적으로 설립해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러다가 1928년 부인이 병사한 후, 그도 1929년 1월 신장병으로 사망했는데, 병을 앓고 있는 동안에도 ≪신가헌 연보(辛稼軒年譜)≫를 저술하는 등 학문 연구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끝으로 량치차오의 인생 역정은 한마디로 중국의 근대화를 위한 투쟁의 역사였다. 정계에서 은퇴한 1917년 무렵까지는 주로 정치가로서 학술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신이 말한 학자의 임무인 ‘세상을 깨우쳐야 한다(覺世)’는 사명감 아래 근대 중국의 신문화(新文化) 창도자·실천자로서 소임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1918년 이후로는 학술 연구에 전념하면서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傳世)’ 전통문화의 수호자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도 그 변화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도록 1918년 이후의 작품도 일부 실었다.
역자 - 최형욱
최형욱(崔亨旭)은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나 한양대 중문과를 졸업하고, 1988년 타이완 국립정치대학 대학원에서 <청대 양호파의 원류 및 그 문학 이론 연구(淸代陽湖派的源流及其文學理論硏究)>라는 논문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연세대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1996년 <량치차오의 문학 혁명론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94년부터 한양대, 연세대 등에서 시간 강사를 역임하고, 1998년부터 2000년까지 경동대 전임 강사를 거쳐 현재 한양대 중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6년 여름부터 1년간 방문학자로서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 중국학센터에서 연구한 바 있다. 주요 논문 및 저역서로 <조선의 량치차오 수용과 량치차오의 조선에 대한 인식>, <량치차오의 중국 국민성론 및 조선 국민성 비판 탐구>, <중국 근대의 계몽주의 문학 사조>, <량치차오의 시계 혁명론이 개화기 한국 시론에 미친 영향>, <량치차오의 추풍단등곡(秋風斷藤曲) 탐구>, <한중 전통문화 관련 디지털 인문 콘텐츠 실태 비교 및 수준 향상 방안 연구>, ≪신편 명심보감≫, ≪량치차오, 조선의 망국을 기록하다≫ 등이 있다.
역자는 평소 중국의 근현대 문학 이론, 근현대 한중 사상·문학 비교, 특히 중국 근대 문학과 현대 문학의 연계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대체로 1910년대 후반, 즉 5·4 운동 무렵을 기점으로 보는 중국 현대 문학사는 왕왕 이전의 장구한 중국 문학이나 역사와 단절시켜 논의하는 경향이 있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전통은 계승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루쉰(魯迅, 1881∼1936) 이전에는 마치 문학이 없다시피 한 것으로 보이게 했다. 중국 근현대 문학의 발전 양상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또 그 가운데서 이전 문학과 연계된 흐름을 이해한다면, 중국 문학 특히 근현대 문학 연구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연구에 임하고 있다.
또한 중국 근현대 문학 및 사상에 대한 연구는 그 자체로서뿐만 아니라 이 시기 우리 문학과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도 상당한 연구 가치가 있다고 여겨진다. 근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전통적인 관념들이 왜, 어떻게 새로운 방향으로 변화해 갔는가, 문학을 비롯한 서구 문명이 밀려들어 중국과 충돌하고 또 융화되면서 어떤 양상을 보였는지 등에 관한 많은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비교해서도 큰 관심을 갖게 한다. 즉, 우리나라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근대화 시기에 서구 열강 및 일본의 침탈을 겪음으로써, 부득이 우리의 본모습을 잃고 커다란 곤혹과 수모를 치르며 파행적인 근대화의 과정을 겪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 근대화에서도 서구적 근대화에 대한 저항과 수용이 중요한 문제 중 하나였으며, 이로 인해 중국과 유사한 모습들이 보였다. 때문에 본서의 작업을 포함한 역자의 연구 과제들은 중국 근현대 문학 및 사상의 형성·연계와 그 본질을 살피는 데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에 대한 이해를 통해 또 다른 각도에서 중국과 우리나라 및 세계의 근현대 문화와 사회를 이해하는 기반을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음빙실문집>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