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량치차오 梁啓超

    량치차오 프로필

  • 국적 중국
  • 출생-사망 1873년 - 1929년

2015.01.0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
근대 중국의 대사상가이자, 혁명가, 문학가이다. 광둥 성(廣東省)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중국 전통교육을 받았으나, 1890년 상하이(上海)에서 세계 지리서인 『영환지략(瀛環志略)』과 서양 서적을 본 뒤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그해 캉유웨이(康有爲)를 처음 만나 그로부터 육왕심학(陸王心學)과 서학(西學)을 배우고 공양학(公羊學)을 익히는 등 스승 캉유웨이를 통해 개혁 사상과 서양의 근대 지식을 배웠다.
1895년 캉유웨이와 함께 베이징(北京)에 강학회(强學會)를 설립하고, 상하이에 강학회 분회를 설립하여 여러 나라 서적을 번역하고, 계몽적인 신문과 잡지를 발행하여 서양의 신사상을 소개하고 구사상을 배격하며 애국주의를 고취하여 중국 개화에 공헌했다. 그의 수많은 정치 논설들은 늘 사회에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캉유웨이와 함께 광서제(光緖帝)에게 보내는 상서를 함께 작성했으며, 이것이 광서제의 눈에 들어 결국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태후(西太后) 등 반개혁 세력의 반동으로 이 혁명은 100일 만에 실패로 돌아간다. 무술변법이 실패한 후, 그는 일본으로 망명하여 언론 활동을 시작한다. 그 역시 캉유웨이처럼 입헌군주제를 지지했으며, 진보당을 만들어 쑨원(孫文)과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중화민국에 합류했다. 이후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을 배신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그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했다.
당시 캉유웨이는 선통제를 복위시켜 입헌군주제 형태로 청나라를 되살리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량치차오는 이를 비판하며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돤치루이(段祺瑞)에게 국제 사회 진입을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하지만 당시 세력 있는 정치가인 돤치루이와 펑궈장(馮國璋)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실패한 후, 정치계를 떠난다.
1918년 말, 유럽을 방문하여 유럽 사회가 안고 있는 각종 병리 현상을 직접 목격한 뒤 귀국하여 서양 문명이 이미 파산했음을 선언하기도 했다. 1929년 신장병으로 죽을 때까지 학술사업에 몰두했다. 문학, 사학, 철학, 불학(佛學)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음빙실전집(飮氷室全集)』, 『음빙실총서(飮氷室叢書)』, 『청대학술개론(淸代學術槪論)』, 『중국근삼백년학술사(中國近三百年學術史)』, 『선진정치사상사(先秦政治思想史)』, 『중국역사연구법(中國歷史硏究法)』, 『중국문화사(中國文化史)』 등의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리훙장 평전> 저자 소개

량치차오 작품 총 4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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