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니키다 돗포(国木田独歩, 1871∼1908)는 일본 근대의 소설가이자 시인, 저널리스트, 편집자다. 치바 현(千葉県) 출생으로 히로시마 현(広島県)과 야마구치 현(山口県) 등에서 성장했다. 아명은 가메키치(亀吉)인데 데쓰오(哲夫)로 개명했다. 돗포(独歩)는 필명이며, 학력은 도쿄전문학교[東京専門学校, 현 와세다(早稲田)대학] 영어정치과를 중퇴했다.
작가 다야마 가타이(田山花袋),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国男) 등과 친교를 맺었고, 데뷔작은 청일 전쟁 종군기인 ≪애제통신(愛弟通信)≫(1894)이다. 대표 작품으로 자연 친화적인 시 <돗포 읊다(独歩吟)>(1897) 등과 사상 소설 <잊을 수 없는 사람들(忘れ得ぬ人々)>(1898), <쇠고기와 감자(牛肉と馬鈴薯)>(1901), 자연을 재발견한 명문 <무사시노(武蔵野)>(1898) 등을 발표하고, 후기에 <봄 새(春の鳥)>(1904), <대나무 쪽문(竹の木戸)>(1908)으로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적 역할을 맡는다. 잡지 ≪부인화화보(婦人畫報)≫(현존)의 창간자, 편집자로서도 평가받고 있다. 작가 후반기에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등이 돗포 작품을 높이 평가했고, 우리나라 근대 문학의 선구자 이광수는 1900년대 초 도쿄 유학 시절 돗포의 단편을 애독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1893년부터 일기 ≪거짓 없는 기록(欺かざるの記)≫을 쓰기 시작해 사후에 출판된다. 언론인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의 지인이자 개화기 작가인 야노 류케이(矢野龍渓)에게 소개받아 오이타 현(大分県) 사이키(佐伯) 소재 쓰루야학관(鶴谷学館)의 영어 및 수학 교사로 부임(1893. 10), 이듬해 8개월 만에 퇴직한다.
1894년, ≪청년문학(青年文学)≫에 참가, 출판사 민우사(民友社)에 입사해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가 1890년에 창간한 ≪국민신문(国民新聞)≫의 기자가 된다. 1894년 청일 전쟁 해군 종군 기자로 참가해, 남동생에게 부치는 서간체 형식으로 전쟁 르포 ≪애제통신(愛弟通信)≫을 연재해 ‘국민신문 기자 구니키다 테쓰오(国木田哲夫)’로서 일약 유명해진다.
귀국 후 1895년 11월, 기독교인 집안의 사사키 노부코(佐々城信子)와 만나 열애 끝에 도쿠토미 소호의 주례로 결혼하고 기독교인이 된다. 곤궁한 생활 때문에 귀향해 부모와 동거하게 되는데 이듬해 노부코(信子)가 실종되어 협의 이혼하고, 그 충격으로 실의에 빠진다. 나중에 이를 소재로 시라카바(白樺)파 작가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郎)는 소설 ≪어떤 여자(或女る)≫(1919)를 발표했다.
1905년 건강이 악화된다. 제2소설집 ≪돗포집(独歩集)≫(1905)을 간행하고, 단편 <호외(号外)>(1906)를 발표, 폐결핵으로 요양 생활 중, <궁사(窮死)> <절조(節操)>(1907) 등을 발표하고 37세에 작고한다. 자연주의 작가 다야마 가타이는 조사에서, 돗포의 인생은 한마디로 ‘궁(窮)’이라고 했다. 제3소설집 ≪운명(運命)≫(1906)이 높게 평가받았고, 돗포는 자연주의 운동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돗포의 문학과 사상은 명리(名利) 부정과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노장(老壯) 사상, 러시아 소설가 투르게네프의 자연 계절 묘사, 영국의 전원시인 워즈워스의 낭만성, 기독교의 박애(博愛)정신 등의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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