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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대한 글쓰기 천줄읽기 상세페이지

예술에 대한 글쓰기 천줄읽기작품 소개

<예술에 대한 글쓰기 천줄읽기>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에밀 졸라의 미술비평 기고문을 모아놓은 것이다. 문학에서의 업적이 워낙 지대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사실 에밀 졸라는 미술비평가로도 널리 활동했다. 특히 그는 당시 무명이던 마네의 예술적 가치를 최초로 인정해 주고, 화단에서 인정받지 못하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전폭적인 미학적 지지를 보냈다. 또한 안이하고 관례적인 미술비평 방식에 안주하고 있던 집단과 개인을 향해 단호하게 공격을 가했다. 예술과 사회적 정의를 위해 조직과의 전쟁도 서슴지 않았던 에밀 졸라의 용기 있는 비평은 그의 미술비평이 지니는 가치를 재평가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읽어야 할 내용들이다.


저자 프로필

에밀 졸라 Émile Zola

  • 국적 프랑스
  • 출생-사망 1840년 4월 2일 - 1902년 9월 29일
  • 데뷔 1862년 문학 니농에게 주는 이야기

2014.10.31.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 - 에밀 졸라
문학사와 예술사에 뚜렷하게 자신의 족적을 남긴 에밀 졸라는 당대 최고의 명문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거나 대단한 학력을 가진 사람이 결코 아니다. 그런 기대치와는 정반대로 그의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이 다이며,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이유도 입학시험에 두 번이나 낙방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때는 사회의 낙오자처럼 보였던 그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그의 생애를 다시 살펴보고 싶은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
에밀 졸라는 1840년 4월 12일 프랑스 파리에서, 프랑스인 어머니와 이탈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토목 기사로 일하던 그의 아버지는 결혼 전에 파리에서 잠시 지낸 적이 있다. 당시 43세였던 그는 우연히 알게 된 19세의 프랑스 처녀와 결혼했고, 이렇게 하여 에밀 졸라가 태어났다. 1842년 프랑스 남동부의 엑상프로방스(Aix- en-Provence)에서 운하 건설을 하게 된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그곳에 정착했으나 에밀이 7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린 시절의 에밀 졸라는 지극히 평범한 아이였던 것 같다. 학교에서의 성적은 들쑥날쑥했고, 공부보다는 친구와 놀기를 좋아했으니 말이다. 훗날 인상주의 화가로서 크게 유명해지는 폴 세잔(Paul Cézanne)은 당시에 그와 가장 친했던 친구였다.
점점 심해지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에밀의 어머니는 파리로 이사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1858년 파리로 상경한 에밀 졸라는 그의 지역 사투리 때문에 학교 친구들로부터 놀림을 받았다. 그래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에밀 졸라는 그다음 해에 본 자연계 대학 입학시험에 실패했다. 같은 해인 1859년 11월, 그는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유(Marseille)로 가서 다시 입학시험에 응시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크게 낙심한 어머니는 그가 일자리를 찾도록 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세관의 말단직에 취직했으나 그가 받는 급여로는 집안의 생계를 제대로 꾸려갈 수가 없었다. 그는 좀 더 나은 직업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그렇게 2년을 고생한 끝에 아셰트(Hachette) 출판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출판사의 일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전환점을 마련해 주었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책을 접하면서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던 문학적 재능에 신뢰를 갖기 시작했던 것이다. 24세부터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1865년 생리학자 클로드 베르나르(Claude Bernard)의 저서 ≪실험 의학 개론(Introduction à la Médecine expérimentale)≫에 심취한다. 이때부터 에밀 졸라는 정신에 미치는 육체의 영향과 유전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그의 대표작 ≪루공ᐨ마카르 총서, 제2제정 시대 어느 집안의 자연적·사회적 역사(Rougon-Macquart, Histoire na- turelle et sociale d’une famille sous le Second Empire)≫는 바로 이 문제를 증명하기 위해서 집필된 실험소설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자연주의의 대표적 주자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작품집의 제7권인 ≪목로주점(L’Asso- mmoir)≫과 제13권인 ≪제르미날(Germinal)≫은 자연주의 소설의 정수로 알려져 있다.
특히 작품 ≪제르미날≫은 우선 그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제르미날(germinal)’이란 단어는 원래 ‘씨눈의’라는 뜻을 가진 형용사이며, 동시에 ‘파종의 달’이란 의미를 지닌 명사로도 사용된다. ‘제르미날’은 그래서 프랑스 혁명력으로는 일곱 번째 달인 3월 21(22)일∼4월 18(19)일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에티엔 랑티에는 ≪목로주점≫의 여주인공인 제르베즈의 셋째 아들이다. 파리에서 기계공으로 일하던 그는 실직 후 북프랑스의 몽스 탄광에서 광부로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제공황이 시작되면서 탄광 회사는 광부들의 근무 조건을 악화시킨다. 그는 회사의 부당성에 대항하기 위해서 광부들의 파업을 선동한다. 파업이 시작되자 회사는 정부에 군대의 투입을 요청한다. 군대는 농성 중이던 노동자들을 몰아내고, 회사는 이들의 자리에 벨기에의 광부들을 투입한다. 이러한 처사에 분노한 노동자들이 군대를 습격하면서 사건은 최악의 사태로 치닫고 14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
파업은 결국 광부들의 패배로 종식되었고,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된 에티엔은 연인 카트린과 함께 다시 갱 속으로 내려가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지하 700미터 지점에 도달했을 때, 돌연 갱 내부의 받침목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한다. 파업의 실패에 분개한 무정부주의자 수바린이 갱목을 지탱하던 나무틀을 톱으로 잘라버렸던 것이다. 이 사고로 에티엔과 카트린은 갱도에 갇힌 채 3주를 보내게 된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태에서 이들은 정사를 벌이게 되는데, 이 장면은 ≪목로주점≫에서 추잡한 3인의 동거 생활 과정에서 태어났던 에티엔을 통해 자연주의적 관점에서 유전적 문제를 부각시키려는 작가의 의도로 생각된다.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카트린은 이미 죽어 있었다. 간신히 생명을 건진 에티엔은 건강이 회복되자마자 파리로 떠난다. 그의 상경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게 될 사회주의 운동의 거룩한 태동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작품 ≪제르미날≫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에밀 졸라는 귀족적이기보다는 서민적이며, 그래서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투쟁을 벌인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는 특히 ‘드레퓌스 사건(l’affaire Dreyfus)’과 관련하여, 1898년 1월 13일 <로로르(L’Aurore)>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장 형식의 논설 기고문을 발표해 프랑스 사회가 정의와 진실, 그리고 인권 옹호의 문제를 인식하도록 한 공로를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생전에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것은 아니었다. 드레퓌스 사건의 부당성에 대한 기고문을 발표한 직후, 그는 프랑스 육군 참모본부에 의해 명예훼손죄로 기소되어 징역 1년에 3000프랑의 벌금을 내라는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는 항소했고, 그해 4월 2일 고등법원은 그에 대한 유죄판결을 기각했다. 프랑스 육군 역시 고등법원의 판결에 항소했다. 에밀 졸라는 새로운 재판이 열리기 전에 변호사와 친구들의 충고에 따라 영국으로 도망을 쳐야 했다.
1899년 6월 5일 드레퓌스 대위가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면서 에밀 졸라도 영국에서 프랑스로 귀국했다. 그는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1902년 9월 29일 밤 뜻밖의 사고가 발생했다. 메당(Médan)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내고 파리의 아파트로 돌아온 에밀 졸라 부부는 몇 달째 비워두었던 집 안이 눅눅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난로를 피우고 식사를 한 후 잠자리에 들었다. 한밤중에 마담 졸라는 몸에 이상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그녀는 머리가 무겁고 속이 메스꺼웠다. 난로에서 발생한 일산화탄소 중독이었다. 에밀 졸라 역시 동일한 증세로 잠에서 깨어났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구조를 요청할 힘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경 아무런 기척이 없던 방문을 하인들이 열고 들어왔다. 그들은 이미 죽어 있는 에밀 졸라와 실신한 그의 아내를 발견했다. 당시 62세였던 에밀 졸라는 이렇게 어이없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02년 10월 5일 일요일, 그의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으며, 그로부터 6년 뒤인 1908년 6월 6일, 그의 유해는 프랑스의 위인들이 안치되어 있는 팡테옹 신전(le Panthéon)으로 옮겨졌다. 이제 그는 프랑스의 영원한 지성으로 기억되며 존경받고 있는 것이다.

역자 - 조병준
조병준은 인하대학교를 졸업하고 프랑스 루앙대학교(Université de Rouen)에서 문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논문은 <앙리 미쇼의 작품에 나타난 정신분석(Analyse de l’esprit dans l’oeuvre de Henri Michaux)>이었다. 2008년 현재 인하대학교 서양어문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이브 본느프와의 시와 수학적 사고>, <쟝 폴랭의 시적 시간성>, <트리스탕과 이죄의 신화분석>, <무위의 시학(La poétique du non-agir)>, <시적 현대성에서의 로트레아몽과 앙리 미쇼(Lautréamont et Henri Michaux dans la modernité poétique)> 같은 논문 22편을 발표했으며, 저서로는 ≪그리스 신화 패러다임≫, ≪프랑스 문학 속의 여성 그리고 사랑≫ 등이 있다. 2005년 교환교수로 프랑스 르아브르대학교(Université du Havre)에서 프랑스 문학을 강의하기도 한 그는 이가림 시인의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Le Front contre la fenêtre)≫와 이광수의 ≪사랑(Amour)≫ 요약본을 각각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 파리의 라르마탕(L’Harmattan) 출판사와 메종뇌브 에 라로즈(Maisonneuve & Larose) 출판사에서 출판한 바 있다.

목차

해설
지은이에 대해

어떤 자살

나의 살롱

에두아르 마네

옮긴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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