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이 책은 딜타이 전집 제5권에 있는 ‘정신과학과 개별화’의 관계를 설명한 논문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칸트가 자연과학의 철학적 정초에 관심을 가졌다면, 딜타이는 정신과학의 철학적 정초에 관심을 가졌다. 딜타이에 따르면 대상들을 설명하고자 하는 자연과학과는 달리 인간, 사회, 국가에 관한 학문인 정신과학은 근본적으로 대상의 ‘이해’를 추구한다. 이 책에서 딜타이는 다양한 예시를 통해 정신과학의 특성을 개별화의 모습에서 스케치해 보여주고 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번역에 사용된 원서는 딜타이 전집 제5권 ≪정신세계. 삶 철학 입문. 1부: 정신과학 정초를 위한 논고(Die geistige Welt. Einleitung in die Philosophie des Lebens. Erste Ha·lfte: Abhandlung zur Grundlegung der Geisteswissenschaften)≫의 241∼316쪽에 실려 있는 논문(이하 ‘번역 원본’이라 칭함)이다. 이 논문은 원래 서로 약간의 내용 차이를 가지고 두 차례에 걸쳐 발표된 바 있는 논문을 합본한 형태의 논문인데, 해당 논문이 1895년 발행되었을 때에는 그 제목이 ‘비교심리학에 대해(?ber vergleichende Psychologie)’라 불렸고, 1896년에 발표되었을 때는 ‘개별성 연구에 부쳐(Beitra·ge zum Studium der Individualita·t)’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논문이 서로 다른 제목을 가지게 된 데는 일단 그것들의 내용상의 차이와도 관련이 있다. 번역 원본은 5개 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1895년판 논문에서는 그중 1절 및 2절의 전반부가 빠져 있었고, 1896년판 논문에서는 5절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이로 미루어볼 때 두 논문이 내용상으로 서로 약간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논문의 제목이 서로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본 번역서에는 번역 원본의 1절(<자연과학과 정신과학>)과 5절(<비교 방법을 사용하는 정신과학들: 개별화 문제에 대한 방법론적 작업을 하기까지의 과정>)이 생략되었다. 즉 본서의 내용은 번역 원본의 2절, 3절, 4절, 그리고 쪽수로는 259∼303쪽의 완역이다. 그런데 1절과 5절이 빠진 후, 2∼4절의 내용은 주로 정신과학에서의 개별화(Individuation) 혹은 개별성(Individualita·t) 문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책의 내용은 정신과학과 개별화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역서의 제목도 ‘정신과학과 개별화’라고 이름 지어졌다.
본서에서 ‘개별화’/‘개별성’이라는 단어는 독일어 ‘Indivi- duation’/‘Individualita·t’를 번역한 말이다. 그것의 의미는, 논문에서 전반적으로 어떤 것이 다른 무엇과 구분되어 자기만의 특성을 가진다는 의미로, 그것은 대략 일회성, 유일성, 독특성, 개성 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딜타이는 <기술심리학과 분석심리학에 대한 이념들>이라는 논문에서 인간의 심적 구조의 발달이 어떻게 해서 인간 삶의 개별화를 낳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거기서 ‘개별성’은 후천적으로 인간들이 역사적 관계에서 획득하게 되고 또한 특히 타자와의 상대적 관계에서 차이를 통해 자기만의 독특성을 갖는 그 어떤 심적 구조의 배열 관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개별성은 분해될 수 없는 것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집합체를 상대로 해서도 사용되는 개념이다. 그것은 특히 대상들의 전체 속성을 의미하는 전형/유형(type)과 관련해서 사용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일군의 사람들이 일정의 동일 공통 속성을 보인다면, 이때의 속성 또한 개별성과 관련한다. 그 속성이 다른 것들이 갖는 속성과 구분되어 자신만의 고유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별성은, 개체와는 달리, 보편개념과 모순되지 않고 서로 상통한다. (그래서 ‘Individualita·t’는 본서에서 ‘개체성’으로 번역되지 않았으며 또한 주로 개체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행사하는 ‘개성’으로 번역되지 않았다.) 개별성의 파악은 이렇게 하나의 개별자를 그 자체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그것이 속하고 있는 전체 속성과의 관계에서 이해하는 일이다. 이해의 대상이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동안, 개별성은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재)구성된다.
딜타이는 ‘개별성’의 연구 문제를 정신과학의 한 중요한 특징으로 파악한다. 1장에서 이 문제는 자연과학 대 정신과학과 대조적 특성 형식을 매개로 논의되고 있다(위의 비교표 참조). 그리고 2장에서는 개별성의 문제가 이제는 거기서와는 또 다른 수준에서, 즉 유형이나 전형과 관련이 있는 동형성과의 관계에서 논의된다. 1장 및 2장의 논의는 다소 해석학 이론적인 논의에 속한다. 이런 이론적 논의는 실제의 해석적 실천을 통해 보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작업이 바로 3장에서 전개된다. 딜타이는 3장에서 문학의 경우를 실증 사례로 끌어들여 개별화 작용의 모습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달리 말해, 거기서 딜타이는 (동형성을 바탕으로 한) 개별화의 문제가 문학에서, 특히 희곡에서 어떻게 실현되어 왔는지를 추적한다. 그 작업은 고대 그리스의 희곡들에서 시작해 셰익스피어 등을 거쳐 괴테와 실러의 작품들에 걸쳐 이루어진다. 이것들을 통해 딜타이는 개별화가 문학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정신과학의 특성을 그런 개별화의 모습에서 스케치해 준다. 그리고 개별화가 삶 연관에서 구성되는 것인 만큼 그것은 또한 동시에 그의 삶 철학적 시각을 정신과학을 빌려 전개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그의 역사철학적 시각뿐 아니라, 사실은 위에서 거론한 요소들 모두가 전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독자 스스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