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곤수창집≫의 편찬자 양억(楊億, 974∼1020)은 자(字)가 대년(大年)으로 개보(開寶) 7년(974)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고 뛰어나 11세에 신동으로 알려져 비서성(秘書省) 정자(正字)의 관직을 제수받았다. 이후에도 태상시봉례랑(太常寺奉禮郞), 광록시승(光祿寺丞), 저작좌랑(著作佐郞), 좌정언(左正言), 좌사간(左司諫), 지제고(知制誥),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호부낭중(戶部郞中), 공부시랑(工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경덕 2년(1005)에 왕흠약과 함께 ≪책부원귀≫를 편찬하는 일을 총괄하게 되었다. 대중상부 6년(1013)에 ≪책부원귀≫ 편찬이 완성되자 비서감(秘書監)으로 그 품계가 올랐다. 천희(天僖) 4년(1020) 46세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양억은 일생 동안 교유를 중시했고, 성격이 강직했으며 명예와 절조를 중시했다. ≪서곤수창집≫에 75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이 밖에도 많은 저작이 있다.
유균(劉筠, 971∼1031)의 자는 자의(子儀)이고 태조 개보 4년(971)에 태어나 양억보다는 세 살 위다. 함평(咸平) 원년(元年, 998)에 27세의 나이로 진사에 급제해 관도현위(館陶縣尉)가 되었다. 함평 5년(1002)에 양억에게 발탁되었고, 이후 진종에게 시 창작 능력을 높이 평가받아 대중상부 6년(1013) ≪책부원귀≫가 완성된 후 좌정언(左正言)·직사관(直史館) 등의 관직을 제수받기도 했다. 또한 지제고(知制誥)·우사간(右司諫)·상서병부원외랑(尙書兵部員外郞)·어사중승(御史中丞)·상서예부시랑(尙書禮部侍郞) 등도 역임했다. 천성(天聖) 9년(1031) 60세의 나이로 생을 다했다. ≪송사(宋史)·유균전(劉筠傳)≫에는 유균 역시 문사(文辭)의 대우(對偶)가 뛰어났으며, 당시 양억과 함께 ‘양유(楊劉)’로 병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서곤체 시인 중에서 양억과의 관계가 가장 밀접한 인물로, 양억이 창화 활동을 시작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해, 서곤체 시인 가운데 양억에 버금가는 위치를 차지한 주요 3인 중 한 사람이다. ≪서곤수창집≫에는 그의 작품 73수가 수록되어 있다.
전유연(錢惟演, 961∼1034)의 자는 희성(希聖)으로 오월왕(吳越王) 전숙(錢俶)의 아들이다. 건륭(建隆) 2년(961)에 태어났으니 양억이나 유균보다 그 연배가 10여 년이나 앞선다. 태평흥국(太平興國) 3년(978) 오월(吳越)이 망한 뒤 전유연은 아버지를 따라 송(宋)으로 가서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이 되었다가 이후에는 태복소경(太僕少卿), 급사중(給事中),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 공부상서(工部尙書), 추밀사(樞密使)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전유연 역시 문사가 청려(淸麗)해 양억·유균과 병칭되었으며 경우(景祐) 원년(1034)에 73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전유연은 양억과 유균 다음으로 서곤체 창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이다. ≪서곤수창집≫에 수록된 작품을 보면, 양억이 수창한 43수 가운데 화시를 지은 것이 25수이고, 유균이 수창한 13수 가운데 12수의 화시를 지었으며, 자신이 수창한 것 또한 9수나 된다. 기타 다른 시인의 작품에 화시를 지은 것까지 포함해 전유연의 시는 총 54수가 ≪서곤수창집≫에 수록되어 있다.
이종악(李宗諤, 964∼1012)의 자는 창무(昌武)이고 송 태종 때의 학자 이방(李昉)의 아들이다. 건덕(乾德) 3년(964)에 태어났고 7세에 이미 글을 잘 지어 향거(鄕擧)를 통과했으며, 진사에 급제해 교서랑(校書郞)을 제수받았다. 이후에 비서랑(秘書郞), 기거사인(起居舍人), 지제고(知制誥), 공부낭중(工部郞中),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등을 역임했다. 그가 한림학사가 된 것이 경덕 2년으로 양억보다 1년 앞선다. 또한 관각에서 벼슬을 한 시간이 비교적 길며, 양억과 비교적 일찍 교류를 시작했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여러 기록을 통해 이종악은 양억과 오랫동안 교유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백체 시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인지 양억의 시풍(詩風)과는 큰 차이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시풍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밀한 관계로 인해 ≪서곤수창집≫에 비교적 많은 7수의 화시(和詩)가 수록되어 있다.
진월(陳越, 973∼1012)은 자가 손지(損之)이고 개보 6년(973)에 출생했다. 어릴 적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특히 역사에 능통했다. 또한 글 짓는 재능이 뛰어나 이를 바탕으로 벼슬길에 진출해 저작좌랑(著作佐郞), 직사관(直史館)은 물론, 태상승(太常丞), 군목판관(群牧判官), 좌정언(左正言)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서곤수창집≫에 한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이유(李維, 961∼1031)의 자는 방중(仲方)이며 건륭 2년(961)에 출생했다. 관직은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지제고(知制誥), 중서사인(中書舍人), 상서좌승(尙書左丞), 공부상서(工部尙書) 등을 역임했으며 시 짓기를 잘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서곤수창집≫에 2수의 시가 전한다.
유척(劉隲)은 ≪송사(宋史)≫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왕중뤄의 ≪서곤수창집주≫의 부록 <서곤시인약전(西崑詩人略傳)>의 <유척사집(劉隲事輯)>에 따르면, ≪송회요집고(宋會要輯稿)≫에 몇 가지 사실이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몰 연도는 미상이고 함평 2년(999)에 집현원에 들어갔으며 이후 개봉부거인(開封府擧人), 국자감거인(國子監擧人), 개봉부국자감거인(開封府國子監擧人) 등의 시험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전한다. ≪서곤수창집≫에 5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정위(丁謂, 966∼1037)의 자는 위지(謂之)인데 후에 공언(公言)으로 자를 바꾸었다. 건덕 4년(966)에 태어났고 순화(淳化) 3년(992)에 진사 급제했다. 이후 참지정사(參知政事), 동평장사(同平章事) 등을 역임했고, 진종조에는 정부재상(正副宰相)을 10년 가까이 맡았다. 인종 때 애주사호참군(崖州司戶參軍)으로 폄적되었고 명도(明道) 연간에 비서감(秘書監)으로 관직을 마쳤다. ≪서곤수창집≫에 5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조간(刁衎, 945∼1013)은 자가 부빈(符賓)이고 후진(後晋) 개운(開運) 2년(945)에 출생했다. 부친 언능(彦能)의 음덕으로 남당(南唐) 시기에 비서랑(秘書郞)과 집현교리(集賢校理)를 역임했다가 송대로 들어선 후에는 태상시태축(太常寺太祝), 대리시승(大理寺丞), 전중승(殿中丞), 우부원외랑(虞部員外郞), 비부원외랑(比部員外郞), 가부원외랑(駕部員外郞), 형부낭중(刑部郞中), 병부낭중(兵部郞中) 등을 역임했다. ≪서곤수창집≫에는 2수의 작품이 있다.
임수(任隨)는 함평 2년(999)에 저작랑(著作郞)에 있었으며 이후 태상승(太常丞)을 지냈다. ≪책부원귀≫ 편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집현원에서 일하면서 양억 등과 창화 활동을 한 결과 ≪서곤수창집≫에 3수의 시가 수록되었다.
장영(張詠, 946∼1015)의 자는 복지(復之)이고 태평흥국 5년(980)에 진사에 올랐고 이후 저작좌랑(著作佐郞), 비서승(秘書丞), 우부낭중(虞部郞中), 어사중승(御史中丞), 형부시랑(刑部侍郞), 이부시랑(吏部侍郞)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역시 유서 편찬에 참여하지는 않았으나 양억 등과 창화시를 주고받으면서 ≪서곤수창집≫에 3수의 시를 남겼다.
전유제(錢惟濟, 978∼1032)는 자가 암부(岩夫)이고 전유연의 동생으로 시풍이 전유연과 매우 유사하다. 제위장군(諸衛將軍), 은주자사(恩州刺史), 동염원사(東染院使), 봉주자사(封州刺史), 검교사공(檢校司空), 건주관찰사(虔州觀察使) 등을 역임했다. ≪송사≫에 손님을 초대해 연회 베풀기를 좋아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서곤수창집≫에 3수의 시가 전한다.
서아(舒雅)는 자가 자정(子正)이며 국자감승(國子監丞), 비각교리(秘閣校理), 직방원외랑(職方員外郞) 등을 역임했다. 역시 학문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서곤수창집≫에 3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조형(晁迥, 951∼1034)은 자가 명원(明遠)이고 어린 시절 일찍이 왕우칭 밑에서 수학했다. 후주(後周) 광순(廣順) 원년(元年, 951)에 출생해 태평흥국 5년(980)에 진사에 급제했으며 대리평사(大理評事), 장작감승(將作監丞), 전중승(殿中丞), 태상승(太常丞), 우정언(右正言), 우사간(右司諫), 지제고(知制誥),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서곤수창집≫에 2수의 시가 전한다.
최준도(崔遵度, 954∼1020)의 자는 견백(堅白)이고 태평 흥국 8년(983)에 진사에 급제했고 저작좌랑(著作佐郞), 전중승(殿中丞), 태상승(太常丞), 좌사간(左司諫),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예부낭중(禮部郞中) 등을 맡았다. 진월(陳越)과 마찬가지로 한 수의 시가 ≪서곤수창집≫에 수록되어 전한다.
설영(薛映, 951∼1024)의 자는 경양(景陽)이다. 진사에 급제하고 대리평사(大理評事), 태상승(太常丞), 감찰어사(監察御使), 좌정언(左正言), 상서예부낭중(尙書禮部郞中), 지제고(知制誥),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郞), 상서좌승(尙書左丞), 공부상서(工部尙書), 어사중승(御史中丞) 등을 역임했다. ≪서곤수창집≫에 6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유병[劉秉, 952∼1016, ‘장병(張秉)’이라는 설도 있음]은 자가 맹절(孟節)이고 진사에 급제해 감찰어사(監察御使), 우사간(右司諫), 도지원외랑(度支員外郞), 지제고(知制誥), 공부낭중(工部郞中), 병부낭중(兵部郞中),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 예부시랑(禮部侍郞) 등을 역임했다. 설영(薛映)과 마찬가지로 ≪서곤수창집≫에 6수의 시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