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게임 비평,
인문학과 기술을 잇다
인문학과 기술을 연결해 고찰하려는 시도가 활발하다. 그러나 학문 간 경계는 여전히 굳건하며, 학제성을 표방하는 움직임은 폐쇄적인 전문 용어들에 막혀 쉽게 좌초된다. 어떻게 이러한 장애물을 넘어 인문학과 기술이 실질적으로 협업할 수 있을까? 문학 작품과 소프트웨어 기술을 아우르는 비평의 공간은 어디에 있을까? 이 책 ≪단위조작≫은 ‘비디오게임 비평’을 통해 이들 질문에 답한다. 비디오게임에서 발견한 원리를 바탕으로 인문학과 기술에 모두 적용 가능한 비평 방법론을 구축한다. 이때 핵심이 되는 개념이 바로 ‘단위조작(Unit Operations)’이다.
단위조작은 서로 맞물려 있는 표현적 의미 단위체들의 배열을 상정하는 개념이다. 결정론적인 체계보다 이산적이고 단절된 행위를, 맥락보다 기능을, 지속되는 것보다 사례들을 우선시하는 의미 형성 양태다. 단위조작은 비디오게임뿐 아니라 철학, 정신분석학, 문학, 영화, 소프트웨어, 심지어 세포들에 이르기까지 온갖 영역에서 관찰된다. 이러한 단위조작들을 살피는 ‘단위분석’은 모든 것을 단일하고 절대적인 체계로 환원하는 전체론적 접근이나 개별 요소에 집중하는 형식적 접근이 결코 포착하지 못하는 역동적 관계들을 드러낸다. 여러 분야를 넘나드는 풍성한 분석을 통해 단위조작 개념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다.
끊임없이 엮이고 짜이는 단위체들의 역동으로
철학, 문학, 과학, 기술을 새롭게 독해하다
단위조작은 근래의 기술적 환경에서 불쑥 출현한 현상이 아니다. 그 기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촉발한 보편자 문제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인간 문화는 늘 모든 것을 아우르는 표상 모델을 만들려는 체계조작과 이산적인 단위체들에서 출발하는 단위조작 사이에서 유동했다. 단지 객체 기술을 비롯해 단위조작에 토대한 소프트웨어 기술이 발달하면서 그 구도가 선명해졌을 뿐이다. 이 책은 단위조작이라는 개념 틀로 스피노자의 ‘신 혹은 자연’ 개념, 알랭 바디우의 수학적 존재론,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 등 다양한 사상을 종합한다. 또한 앨런 튜링과 존 폰 노이만에게서 기원한 계산 기술의 발달이나 마셜 매클루언과 프리드리히 키틀러 등이 제시한 매체 이론의 한계 역시 종합적으로 고찰할 수 있다.
이렇게 탄탄하게 구축된 단위조작 이론은 다양한 ‘문화적 인공물’의 재독해로 이어진다. 책 전반에 걸쳐 수많은 작품들이 등장한다. ≪마담 보바리≫와 ≪율리시스≫ 같은 문학 작품, <터미널>과 <아멜리에> 등의 영화, 무엇보다 <그랜드 테프트 오토>와 <심즈> 그리고 <젤다의 전설>을 비롯한 친숙한 비디오게임 작품들을 내용와 형식 둘 중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색다른 시선으로 읽을 수 있다. 작품의 서사적 측면, 기술적 측면, 산업적 측면을 골고루 조망하는 참신한 비평들이 숨 가쁘게 펼쳐진다.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 사이
게임 비평의 최전선을 펼치다
게임 연구는 오랫동안 게임이 무엇이고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려는 ‘루돌로지’와 게임이 전달하는 서사에 집중하는 ‘내러톨로지’로 양분되었다. 그런데 플레이어는 게임을 단일한 흐름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직접 조작 가능한 수많은 개별 행위들로서 경험하는 한편, 그러한 행위들로 짜여 현실 세계를 표상하는 시뮬레이션에 주관적으로 반응한다. 단위조작적 본성상 게임의 시뮬레이션은 언제나 불완전하며, 플레이어는 현실과 시뮬레이션 사이 간극에서 충동과 두려움을 동시에 내포하는 ‘시뮬레이션 열병’을 경험한다.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는 이러한 양상을 온전히 포착하지 못한 채 열병에 그대로 시달린다. 반면 이 책이 제안하는 단위분석은 현실과 게임 시뮬레이션의 간극에서 창조적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로써 게임의 규칙 체계와 플레이어의 반응을 균형 있게 고려하는 게임 비평의 장이 열린다.
게임을 별개 영역으로 구축하려는 루돌로지는 결국 게임 연구를 고립시키며, 다른 학문의 방법론을 게임 연구에 단순 적용하려는 내러톨로지는 게임을 다른 분야에 종속시키고 만다. 이 책은 단위조작 개념을 통해 게임 비평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다. 즉 게임 연구가 다른 분야와 진정으로 협업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협업은 게임이 단순한 휴식과 기분 전환을 넘어 복잡한 인간 조건을 드러내고 탐구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한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인문학과 기술이 공통으로 초점을 맞춘 영역에 해당하는 네 부로 나뉜다. 각 부에서는 비디오게임 연구의 주요 주제를 소개하고 이론적 분석에서 구축된 도구들을 사용해 비디오게임 분석을 수행한다.
1부 “체계에서 단위체로”에서는 의미의 이산적이고 압축된 요소들을 살피기 위한 일반적인 개념적 틀, 단위조작 개념을 소개한다. 그리스 시대의 고전에서 초소형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단위조작에 대한 개념적 선구자들에 관해 논한다. 구조주의와 포스트구조주의에서 표상이 더욱 압축되어 온 과정을 추적하고, 이 압축을 계산 분야의 발전과 연관 짓는다. 정신분석 이론과 매체 이론이 취하는 존재론적 전략을 체계로 무너질 항시적 위험에 처한 단위조작의 예시로서 살펴본다. 소프트웨어 구조의 역사를 소개하고 사업 체계를 위한 실질적 단위조작 모델로서 객체 기술에 관해 논한다.
2부 “절차적 비평”에서는 여러 매체의 짜임적 표현을 식별하고 분석하는 비디오게임 비평에 대한 비교 접근법을 주장한다. <퐁>에서 <하프라이프>에 이르는 소프트웨어와 게임 엔진의 서사 구조를 탐구하고, 이러한 텍스트가 단위조작을 통해 기능하고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보여 준다. 그다음 루돌로지와 내러톨로지 사이 지속적 갈등에 대한 비판을 포함해 비디오게임 연구를 둘러싼 현재의 접근법에 관한 관점을 제시한다.
3부 “절차적 주체성”에서는 물질세계와 표상세계 사이를 오가는 단위조작으로서 복잡 적응계와 기본 세포 자동자를 탐구한다. 내장된 표상과 주관성 사이의 상호작용을 탐구하고, 단위조작 체계에서 의미는 짜임적 표상과 주관성 사이의 위기가 도사린 장소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놀이와 예술이 지닌 사회적 힘 사이의 관계를 조사하고, 이 관점에서 비디오게임을 단순 오락보다 더 높은 지위로 끌어올리는 비평의 능력을 탐구한다. 게임이 지닌 편향성의 양상에 관해 논하면서 미래 비평을 촉진하기 위해 수정된 시뮬레이션 개념을 제공한다.
4부 “설계에서 짜임으로”에서는 분열분석 분야를 복잡한 네트워크 이론과 관련지어 지속적으로 분석한다. 알랭 바디우의 들뢰즈 비판을 통해 단위조작의 표현으로서 노마디즘과 복잡성이 지닌 잠재력과 한계를 탐구한다.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비디오게임과 근대 소설을 아우르며 대규모 가상 공간에서의 자유에 대한 확장된 분석을 수행한다. 이어 비디오게임 비평과 연구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한다.